[전문가 칼럼] 죽음과 혼돈을 대하는 또 하나의 영성
[전문가 칼럼] 죽음과 혼돈을 대하는 또 하나의 영성
  • 박혁순 박사
  • 승인 2023.10.10 2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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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순 박사 '인생 뒤안길'

우리의 깊은 영성을 확증하는 대목은 죽음과 혼돈에 관한 자세에서 발견된다. 유영모가 “종교의 핵심은 죽음이다. 죽는 연습이 철학이요 죽음을 이기자는 것이 종교이다. 죽는 연습은 영원한 생명을 기르기 위해서”라고 했듯,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영성, 그리고 신학 역시 죽음을 면전에 두고 전개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만물을 억압하는 죽음의 위협과 세력을 깨뜨리고 완전한 생명을 얻어내는 것을 죽음의 극복으로 설명해 왔다. 그리고 혼돈을 죽음과 짝지어진 악마적인 현실로 지목하기도 했다. 그 둘에 대항하여 하나님은 타협 없이 배격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세기에 새로운 정통주의를 확립했다고 평가받는 칼 바르트 역시 이런 논점에 있어서 예외가 아니었다. 나는 바르트의 그리스도론과 종말론이야말로 복음을 우리 시대에 유효하도록 탁월하게 재해석하고 선포했다고 평가한다. 그의 신학은 신자에게 창렬(彰烈)한 힘과 기쁨과 자유를 회복하게 한다. 반면에 그의 신학은, 다른 한편에서 죽음과 혼돈이 수반할 긍정적 계기에 대해 심중히 논하지 않은 맹점을 보인다. 우리가 죽음과 혼돈 자체를 예찬할 것은 아니지만, 그 역설적 순기능까지 눈을 감아버릴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우리 삶의 종식으로서 죽음을 문제 삼을 것만은 아니라고 제안했다. 왜냐하면 인생이 불가피한 죽음과 관련된 것에 주목할 때, 진지하게 존재와 무(無)에 직면하게 되고 새로운 존재 가능성이 얻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죽음을 선구적으로 결단할 경우, 무상하고 유약한 삶에서 벗어나 새롭고 도전적인 능력을 구가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이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으로 나타나며 우리를 둘러싼 허무한 소유 조건과 무상한 권력의 허울이 벗겨지고, 고유하고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대중은 문명 가운데 죽음을 지우려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부단히 애를 쓴다. 청년은 젊음이 영원할 것으로 착각하고, 산 자는 땅 위에서 천년만년 살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인간이 죽음에 직면하지 않으면 존재와 하나님에게 겸손할 수 없고 궁극적 지혜를 갖추기 어렵다. 무한한 권태와 욕망의 늪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다. 삶의 질적 수준이 고양되지 않는다. 갖은 편의와 이기(利器)를 누릴지라도 정작 우리 인생이라는 그릇에 담기는 의미와 가치는 빈약하다.

만약 그리스도교 역시 존재와 삶의 의미와 윤리적 · 미적 가치를 도외시하고 주야장천 사는 영생만 추구하는 것으로 소개된다면, 우리는 그러한 저급한 종말론을 심각하게 재고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자들과 마주 보며 영원히 살 수 없는 노릇이다. 사는 보람과 생경한 아름다움 없이 권태롭게 불로장생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죽음을 건전하게 사유할 때, 우리는 역사의 한복판에서 ‘사는 기회에’ 체득할 수 있는 윤리적 ‧ 미적 요건들을 다시 숙고하게 된다. 자발적으로 의미있는 죽음을 앞서 구하며 영원히 향유할 가치와 아름다움을 하나님에게 남길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기왕 살아야 할 지상의 삶 가운데 혼돈을 피할 수 없으면 이 역시 제거할 것만 아니다. 지우고 배척하자면 더 늘어 붙는 경향이 있다. 인간 의식에 내재하는 정신 법칙이란, 우리가 극구 부정하는 것을 우리로부터 주도권을 넘겨받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평화운동을 해야지 반전운동을 목적으로 하면 곤란하다. 당선운동을 해야지 낙선운동을 하면 시간 낭비다. 따라서 부드럽고 열린 마음으로 혼돈을 괄호로 묶고 관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인간이 떨쳐내기 어려운 ‘안정에의 욕구’는 곧 질서정연한 삶에 대한 욕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인생도 그러한 천복(天福)을 누리기 어렵다. 영성이 있는 인생이라면 평화와 질서가 갖추어진 환경뿐만 아니라 불화와 혼돈이 침노하는 환경까지 수용하고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오히려 갈등을 동력으로 삼고, 혼란을 게임으로 선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이에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믿음은 단지 순응이 아니다. 그것은 삶이다. 그것은 우리의 알려지지 않은 영적 내면만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감추어진 본질과 사랑의 가장 신비롭고 접근하기 어려운 깊이까지 침입하면서 삶의 모든 영역들을 껴안는 것이다.”

평화와 질서에 순응하지 못할 인생은 없다. 그러나 또 한편, 갈등과 혼돈의 세월을 대면하며 포용하는 힘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영역’을 긍정하고 껴안는 참 신앙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과 질서에 대해 감사할 것만 아니라, 죽음과 혼돈에 대해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야말로 모든 일, 모든 사태,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순수한 존재로 독존할 것을 버리고 대립과 차이와 소외가 있는 세계를 허락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 자신이 세계로 인해 고난받기를 자청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존재의 무대를 폐장하기 전까지 인간의 의식 앞에 놓일 죽음과 혼돈은 역설적이게도 또 하나의 축복의 관문이라는 것을.

박혁순 교수<br>한일장신대 초빙교수<br>
박혁순 교수
한일장신대 초빙교수
조직신학
예목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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