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의 리딩누크] 소설의 세계에 가까이 가보고 싶은 설교자에게
[설교자의 리딩누크] 소설의 세계에 가까이 가보고 싶은 설교자에게
  • 황재혁 기자
  • 승인 2023.10.10 2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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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의 『문학 강의』

흔히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말합니다. 너무 춥지도 않고, 너무 덥지도 않은 가을은 참으로 독서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가을이 은근히 바쁩니다. 한 해 사역을 마무리하고 내년 사역을 준비하는 시기가 바로 가을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올해를 마지막으로 교회 사역지를 새로 옮겨야 하는 목회자라면 가을이 유독 짧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분주한 목회자가 느긋이 소설을 읽는 건, 누군가에게 사치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한 권의 소설은 열 권의 신학 서적보다 더 큰 울림을 주기도 합니다. 소설은 신학 서적에서 만나기 힘든 신앙의 딜레마를 독자에게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일본의 엔도 슈사쿠가 집필한 『침묵』이야말로 그 어느 신학 서적보다 목회자에게 큰 울림을 주는 소설이 아닌가 싶습니다. 『침묵』은 지난 2003년 홍성사에서 정식으로 계약하여 출판한 이래 지금까지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셀러입니다. 지난 2016년에는 『침묵』을 원작으로 하는 ‘사일런스’라는 제목의 영화가 개봉하기도 했습니다. 혹시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감명 깊게 읽은 독자라면, 그의 문학 강의 역시 좋아할 것 같은데요. 지난 2018년에 도서출판 포이에마에서 엔도 슈사쿠의 문학관과 세계관을 알 수 있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소설의 자리가 우리가 사는 삶의 자리와 그리 멀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인생의 후미에를 밟으며

『문학 강의』에서 엔도 슈사쿠는 그가 집필한 여러 소설에 대해 심도 있게 언급합니다. 그중에서 그가 『침묵』에 관해 이야기하는 부분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그는 『침묵』의 집필 아이디어를 어느 동판을 보고 처음 얻었다고 합니다. 그 동판에는 예수상이 새겨져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동판 언저리에 어느 이름 모를 사람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고 하지요. 이를 일본어로 후미에(踏繪)라고 하는데요. 과거 일본의 에도시대 기리시탄(Christian)은 정부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았고 이 후미에를 밟고 지나가면 그 박해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그들이 후미에를 밟고 지나간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상이 새겨진 동판인 후미에를 밟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당시의 기리시탄에게는 자신이 가장 믿고 있는 사람의 얼굴,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얼굴, 자신이 이상으로 여기는 사람의 얼굴을 밟는 일이었습니다. 에도시대 기리시탄의 후미에와 마찬가지로 전쟁 중 우리 역시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여기는 신조, 동경하는 삶, 그런 것을 흙 묻은 신발로 짓밟듯이 살아야만 했습니다. 전후 사람들이나 요즘 사람들 역시 많든 적든 간에 자신의 후미에를 갖고 살아왔을 겁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후미에를 밟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17쪽)

 

삶의 모순을 포착하는 그리스도교

엔도 슈사쿠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3년에 태어나 1996년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참된 일본인이자 참된 가톨릭 신자로서 그의 문학작품은 그의 고민과 번뇌를 담고 있습니다.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교인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 나라입니다. 그가 일본에서 종교 소설을 여러 권 집필한 건 그가 단지 판매 부수만 생각하는 소설가였다면 결코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그에게 소설 집필은 신앙과 삶의 문제를 조금이나마 해결해 나가고자 하는 몸부림이었고, 그는 지극히 진솔한 방식으로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인간 내면의 모든 요소, 그것이 인간적인 것이라면 아무리 추잡하고 더러운 부분에도 오케스트라 같은 소리를 울려주는 종교가 아니면 저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진정한 종교라면 인간의 어떤 부분에도 제대로 교향악을 울려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추잡한 부분, 더러운 부분, 모순된 부분이 있는 것도 인간이니까, 그리고 그런 인간을 그리는 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교 작가니까 두려워하지 않고 쓰는 것이 좋다. 하지만 동시에 모순된 인간을 그리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53쪽)

엔도 슈사쿠는 지난 20세기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생명력이 있어서요. 일본과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꾸준히 읽히는 편입니다. 엔도 슈사쿠를 소설의 세계로 진입하는 좁은 문으로 삼는다면 우리의 신앙이 그의 작품을 읽어 내려가며 더 깊고도 넓게 뿌리내릴 수 있을 겁니다.

황재혁 목사<br>예수마을교회 청년부 담당<br>​​​​​​​본보 객원기자<br>
황재혁 목사
예수마을교회 청년부 담당
본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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