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오스] 당신의 2악장을 들려주세요
[엘레오스] 당신의 2악장을 들려주세요
  • 황보람 사회복지사
  • 승인 2023.10.10 10: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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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인 자립과 품격을 위한 협주의 시작

지난해 여름, 외가에 있던 오래된 피아노를 수리했다. 보유한 피아노도 처분하기에 바쁜 시대, 골동품에 가까운 악기를 고치다니! 때아닌 열정으로 고무된 가운데 ‘2악장 순례기’를 시작했다. 느린 악장의 서정성, 특유의 분위기는 특정 모델이 보유한 묵직한 음색과 어우러져서 매력적이었다. 음악에 관한 성찰이 부족했던 시절엔 빠른 패시지가 오가는 화려한 작품이나 입시 곡 위주로 기교를 습득하곤 했다. 하지만 작품이 지닌 느림의 여백과 깊이가 생략되면 음악에 대한 통전적 이해가 불가능하다. 어디 그뿐일까? 인간다움에 대한 본질과 품격을 추구하려면 2악장과 같은 삶의 징검다리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느린 악장의 품격이 모두에게 허락된 것은 아니다.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보면, 유럽 내 도시와 항구를 넘나드는 ‘광인들의 배’가 등장한다. 순례라는 이름 아래 (야릿한 승객이라 지칭되는) 광인들의 유랑과 추방이 관습처럼 이어진다. 우리나라 근대역사를 보아도 식민 시절 ‘선린학원’, ‘소록도 한센인 마을’과 같은 강제격리·학살의 아픔이 있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은 고립과 격리로 인한 인권 유린 현장으로, ‘내무부 훈령 제410호’와 같은 수단을 동원해서 국가가 직접 나선 역사적 오점이기도 하다. 푸코는 이러한 구조는 세기를 넘어서도 잔존하는데, 유사한 축출의 장치가 동일한 장소에서 숱하게 재발견된다고 했다. 축출하고, 축출당하는 위치와 대상이 바뀔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발달장애인 지원체계는 ‘그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엄한 존재라는 <사람> 중심의 관점’에서 축출의 역사를 뛰어넘는 ‘보통의 삶’을 지향한다. 단순히 의료·재활적 돌봄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자립을 원하는 발달장애인이 있다면 스스로 삶의 주인 되어 사는 것에 주안점을 두는 지원생활모델(supported living model)이 핵심 개념이다. 지원(supported)에 초점을 맞추는 패러다임은 장애 당사자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일상을 이어가는 것이 당연한 선택이 되도록 한다. ‘모든 장애인은 자립할 수 있으며 자립 이후에도 지원이 필요하며, 자립생활을 결정하는 것은 능력이나 장애 정도가 아니라 (결국) 지원의 양과 강도가 핵심 결정 요소’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Kinsella(2001)는 지역사회로의 독립 전 장애인에게 유독 더 ‘자립에 필요한 기술훈련을 요구’하는 잣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경제활동의 일환으로 투자해서 손해를 보는 것은 자본주의사회 내에서 얼마든지 용인되는 일이나, 발달장애인이 거스름돈을 받지 못하는 것은 자립의 결격사유로 인식할 수 있다. 5000원 상당의 제품을 구매하고 만 원 지폐를 내면 "거스름돈을 얼마를 받아야 할까?" 식의 산수 능력을 위한 훈련이 선행된다. 발달장애인의 안전한 자립생활을 위해 지원 가능한 가게들이 지역에 얼마나 포진해 있는지가 훨씬 더 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역사회 곳곳이 발달장애인 품격 있는 삶을 위해 구축된 자원을 토대로 탄탄하고 묵직한 음색을 가진 악기로 갖춰져, 연주자로 나서는 발달장애인들의 음색을 살려내는 밑받침이 된다면 어떠할까? 생각지 못한 사회자본들이 재생산되는 기쁨으로 함께 걷고 연주하는 공동의 생산자, 협주자가 되는 것이다.

‘2악장 연주’ 단상을 담은 서두에 비춰, ‘연주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Play’나 ‘Spielen’을 살피면 ‘놀다’라는 뜻으로도 통용됨을 알 수 있다. 자립 과정은 누구에게든 녹록지 않다. 그래서 2악장의 선율을 긴 호흡으로 놀이하듯 즐기려면, 자립의 도전이 가능한 여러 지원을 실험해야 한다. 발달장애인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통념에 붙들려 있기보다, 치지 못했던 악장도 한음 한음 두드린다면 그 삶의 그림체로 단 하나의 작품이 된다. 빠른 기교에만 치중하는 경쟁의 연주-인간이 만든 추출과 격리의 역사를 벗어나, ‘단 한 사람’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는 합주는 자립의 삶터가 갖춰지는 안온과 품격의 순간을 완성할 것이다. 그 기대감으로 이 땅의 모든 발달장애 당사자와 가족들에게 전하는 말, “당신의 2악장을 들려주세요! 함께 걷고 듣겠습니다.”

황보람 사회복지사<br>부안장애인종합복지관·종합사회복지관 지역공생팀 팀장<br>​​​​​​​전북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회복지학 박사과정
황보람 사회복지사
부안장애인종합복지관·종합사회복지관 지역공생팀 팀장
전북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회복지학 박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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