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복음] 영화 〈84번가의 연인〉 - 아날로그 감성과 카르페 디엠
[영화와 복음] 영화 〈84번가의 연인〉 - 아날로그 감성과 카르페 디엠
  • 임명진 목사
  • 승인 2023.09.14 14: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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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가을엔 그래도 책이다. 요즘엔 전자책도 많지만, 종이책이 갖는 묘한 매력이 있다. 우선, 아날로그 냄새가 난다. 전자책이 가격도 저렴하고 보관도 쉬우며 검색이나 파일링에 유리하지만, 내가 직접 만지거나 감촉을 느낄 순 없다. 가상이다. 하지만 종이책은 실재(實在)다. 거기엔 책장을 넘길 때의 쾌락과 낙서의 즐거움,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을 자신만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와 문장으로 재구성하여 마구잡이로 써넣을 공간과 여백이 있다. 질감과 무게감이 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약간 누렇게 변색한 색상은 인생의 경륜을 담은 듯한 느낌마저 준다. 특히 종이책 중에서도 헌책(중고책)은 그것을 보았던 사람의 흔적이 남는다. 그것이 손때든, 메모든, 밑줄이든, 접어둔 표식이든 상관없다. 누군가 앞서 누렸던 그 경험을, 비록 똑같진 않지만 나 역시 체험할 수 있다는 건, 인간으로서 함께 세상을 살아간다고 확신하게 만드는 멋진 기회가 된다. 그런 면에서 새 책보다는 헌책이 훨씬 인간적이다.

작가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84번가의 연인〉은 그런 헌책방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목만 봐서는 마치 84번가의 러브스토리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영국 런던 채링 크로스로드 84번가에 위치한 마크스(Marks) 서점 이야기다. 미국 뉴욕에 사는 고서(古書) 애호가인 가난한 작가 헬레인 핸프(앤 밴크로프트)는 자신이 원하는 책을 구할 수 없자, 우연히 가판대에서 발견한 토요문학평론지에 실린 고서 판매에 대한 광고를 보고 마크스 서점에 편지를 띄운다. 그 서점엔 책 관리인 프랭크 도엘(안소니 홉킨스)을 비롯한 직원 5명이 일하고 있다. 헬레인은 책을 주문하면서 그들과 편지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단지 보고 싶거나 구입할 책 리스트를 전달하는 걸 넘어서서,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 느낌 등을 편지에 담아 보낸다. 그렇게 20여 년에 걸친 독서가와 서점간 주고받은 편지 이야기다.

영화 첫 장면은 헬레인이 영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이다. 그녀는 설렘을 안고 영국에 도착하고 고대하던 마크스 서점에 다다른다. 그리고 화면은 바뀌어 1949년 10월 5일로 전환된다. 왜 뉴욕에 사는 헬레인이 멀리 떨어진 런던의 헌책방까지 편지를 보내야 했는지, 편지의 내용은 무엇인지, 어떻게 그 관계가 20여 년간 이어졌는지 영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듯 보여준다. 인터넷이 없고 통신이나 배송도 지금처럼 원활하지 않은 시대(50~60년대)라 소통방식은 오직 편지뿐이다. 마치 펜팔하는 느낌이다. 당연히 신속이나 편리와는 거리가 멀다. 해외 우편이니 시간도 많이 소요되고 정확도도 떨어진다. 게다가 주문도 전화를 놔두고 굳이 편지나 소포를 이용한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정이 느껴지고 감정적 공감이 발생한다. 편지나 책이 든 소포를 받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미학이 필요하고 설렘과 기대가 발현된다. 주문하고 당일 배송받는 요즘의 배송환경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건 ‘빨리빨리’의 생활방식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다. 하지만 여유와 여운은 그런 데서 생겨난다.

영화 마지막은 이미 사라지고 흔적만 남은 마크스 서점에 헬레인이 들어가 아쉬움과 회한을 안고 둘러보는 장면이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도대체 왜 20년간 한 번도 찾아보지 않다가 지금에야 찾았을까? 사실, 헬레인이 뒤늦게라도 서점을 찾아 영국까지 날아간 이유는 프랭크 도엘의 부고를 들었기 때문이다. 영원히 우정을 쌓으며 책과 삶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것 같았던 도엘의 비보를 듣고서야, 비로소 헬레인은 그곳을 찾지 못했던 자신을 후회하며 만사를 제쳐두고 서점으로 향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다. 진짜 소중한 건 거창한 미래에 있지 않다. 너무 늦기 전에 충분히 누리고 향유해야 한다. 때로 행복을 미래로 연기하거나 유보하란 말을 듣곤 한다. 하지만, 그 시절에만 누리고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있다. 그건 시간과 장소, 인물, 분위기, 관계성에 따라 달라진다. 지금 향유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카르페 디엠(Seize the day), 즉 현재를 즐기고 열심히 살아가는 자가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과학기술과 인터넷이 일상화된 현대는 모든 게 디지털화되어 아무리 시공간이 멀어도 영상통화로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직접 피부로 느끼며 몸으로 전해오는 감각과 울림은 ‘그 시간 그곳’에서만 가능하다. 내 몸이 가야 한다. 영상이나 원격예배가 대세인 듯해도, 정작 하나님과 인간 상호 간 관계성은 직접 만나는 아날로그의 미련함이 지켜내는 현장 예배와 나눔을 대신할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건 현재의 삶이지 과거의 경험이나 미래의 막연함이 아니다. ‘예전에’와 ‘나중에’는 현재를 대신할 수 없다. 그때는 이미 지나간 것이며 늦는다.

임명진 목사<br>북악하늘교회 담임<br>​​​​​​​문화사역 전문기자<br>
임명진 목사
북악하늘교회 담임
문화사역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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