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제 108회 총회에 바란다
[특별기고] 제 108회 총회에 바란다
  • 곽재욱 목사
  • 승인 2023.08.21 12: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의의 사자 아닌 양해의 강자 돼야
제2, 제3안을 만드는 ‘정치’ 필요
창원 양곡교회에서 열린 107회 예장통합총회 전경. 총회제공.<br>
창원 양곡교회에서 열린 107회 예장통합총회 전경.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08회 총회 개최 장소 선정에 관련한 갈등과 대립을 바라보는 눈이 몹시 불편하다.

지난 8월 9일 자, ‘총회를 사랑하고 제 108회 총회를 우려하는 총대와 목회자 일동’ 발신의 천명문은 ‘총회 장소 선정’의 부당함과 ‘일만 명 기도회’의 부적절함을 비판하는 교계의 끓어오르는 우려와 반대들을 집약 반영하였다. 그 천명의 근거로 제시한 사실 관계들에 대한 자신감은 건드릴 여지없이 탄탄했다. 총회의 결정이 이대로 간다면 총회의 개최 자체가 일대 혼란에 휩싸일 것이라는 우려는 설득력이 있었고, 권위를 상실한 임원회가 임기 회기 내내 갈등과 분열로 흔들릴 것이라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 문서는 수신 지정이 불명확하고, 따라서 그 메시지의 향방은 흔들리고 있다. 그 문서가 총대들과 교회들을 수신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목회자와 교회들에 대한 천명, 동의를 호소하는 것이다. 그것이 총회 장소를 결의한 총회 임원회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것이라면 그 문서는 임원회를 향한 항의, 내지는 시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수신의 모호함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문서의 내용 안에 적시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그 메시지의 성격상 다른 두 명의 목회자를 수신 지정하고 있는 것으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그 한 사람은 명성교회의 원로목사인 김삼환 목사이고 다른 하나는 장소결정의 권한을 행사한 부총회장 김의식 목사이다.

지난 세기말에 이르도록 명성교회의 원로목사는 내내 모든 신학도들의 영웅이었다. 그는 미래의 목회를 준비하던 모든 신학도들의 가슴속 호수를 파도치게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를 향했던 사랑과 존경의 본질은 ‘나도 그런 큰 교회의 목회자가 되어야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병약하고, 가난하고, 정규코스를 제대로 밟지 못한 목회자로서 겸손함과 기도로서 그 자리에까지 올라갔다는 그의 내러티브가 우리를 감동시켰던 것이다. 그는 사랑스러웠고 그가 속한 교단에 함께 소속되어 있음이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스스로 무너뜨렸고, 그를 바라보고 있는 신학도들의 가슴을 무너뜨렸다. 그와 그를 사랑했던 신학도들은 이제 더 들을 이야기, 들려줄 이야기를 잃어버렸다.

부총회장이 총회 장소 선정의 관례에 준한 그의 권한을 행사한 것에 대해서 그 문서도 존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문서는 거기에서 더 들어가지 않고 절제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관례 또한 일종의 권한이라 그 권한을 존중하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것이다. 더 파고들면 다른 여러 가지들이 함께 무너지는 법이므로. 이것은 이번 사안을 넘어 차후 우리 총회의 의사결정 구조가 정비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

총회 중에 기도집회를 갖는 것은 절차보다는 그의 ‘의지’에 관련된 문제로 보인다. 그것을 이해하자면 그의 성향과 의지를 읽을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의 부적절함을 지적하지만 그는 그 자신의 지난 목회 가운데 여러 번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던 인물이다. 많은 난제들을 극복하고 교회의 부흥을 이끈 그의 목회에 대한 평가에 인색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그것이 이번 총회의 난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절대적 전제는 될 수는 없다. 그는 좋게 말하면 주관과 소신이 강한 목회자이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독단적 목회자이다. 그는 지금까지 목회도, 교우관계도 그렇게 해왔다. 그것은 그의 스타일이고 타입이다. 그는 지금이라도 결정을 철회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고 있다.

문서의 발신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 문서에는 우리가 잘 아는 일곱 교회의 목회자들이 천명하고 서명하였다. 그들 중에는 필자와 절친한 목회자도 있고, 그들은 필자가 가장 신뢰하고 존경하는 목회자들이다. 그러나 친분관계와 별도로 일곱 교회 목회자가 모든 총대들과 교회들, 총회 임원회에 공식적으로 의사를 전달할 명분과 권한이 있는가를 묻고자 한다. 그들이 4월 28일 부총회장을 찾아간 정도는 잘 한 일이다. 그러나 8일 9일의 성명서는 본분을 벗어났다.

우리는 여기서 ‘장로교회’를 다시 한 번 정의해볼 필요가 있다. 이때 ‘장로’는 영어로 ‘프레스비터리(Presbytery)’, ‘노회’를 번역한 것이다. 그러니까 장로교회는 ‘노회교회’ 이고 총회는 그 노회들의 총모임, ‘제너럴 어셈블리(General Assembly)’이다. 그러므로 노회는 총회의 주체이며 모든 공식적인 사안들의 기안자이다. 그런데 현재 노회들은 개별교회와 총회의 중간존재로서 전락하여 그 권위와 존재감을 상실한 상태이다. 그것이 교회의 많은 문제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유이다.

장로교회는 대의원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모든 총대는 그 연령이나 교회의 사이즈나 직위에 관계없이 한 표(one vote)를 행사한다. 이 정신은 민주주의의 성립의 가장 중요한 원리요 정신이다. 일곱 교회, 일곱 교회의 목회자들은 그들의 의견을 자신이 속한 노회를 통해서 전달했어야 했다 그 문서를 접한 수많은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느꼈을 소외감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는가? 어쩌면 그들은 그것이 ‘대교회 대 대교회들’의 문제, 곧 ‘그들만의 리그’로 느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명성교회가 일으킨 혼란의 연속선상일 수도 있다. 명성교회의 문제의 근본이 어디에 있었던가? 힘을 가진 한 교회, 한 목회자가 자신을 노회, 나아가서 총회와 동등하게 여긴 데서 나온 것이 아닌가? 안다. 그 일곱 명의 목회자를 추종하는 여러 노회가 있음을. 그래도 그 사안은 저명한 일곱 명의 목회자가 나설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이 속한 일곱 노회를 통해서 했어야 했다.

우리 총회는 명성교회의 총회, 부총회장의 총회가 아니다. 그리고 일곱 목회자, 일곱 교회의 총회도 아니다. 사안과 별도로 우리 총회는 우리들의, 노회들의 총회이며 그 연합체이다. 이제 총회 임원회와 명성교회에는 그 성명서에 포함된 목회자들의 의사가 충분히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우리 교단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이 총회를 독단적으로 흔든다면 간과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교회의 사이즈로 주님이 주인이신 노회를 도구화하고 총회에 견준 것이 얼마나 큰 잘못임을 절실하게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여기서 우리는 자제하고 가다듬어야 한다. 정말 총회가 파행되고 양쪽으로 나누어지고 집회가 성토장이 된다면 우리 모두는 얻을 것보다 잃을 것이 훨씬 많음을 인정해야 한다. 다투고 대립하는 교회를 보고 정의롭다고 칭송할 세상은 어디에도 없음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세상은 교회의 성장보다 교회의 추문에 더욱 관심을 갖는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는 말은 세상이 교회를 불편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정치를 해야 한다. 정치는 원칙의 관철이 아니다. 앞에서 성토를 하기 전에 뒤에서 만나야한다. 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더라도 또 만나야 한다. 그리고도 안 되면 제 2안, 제 3안을 만들어 두는 것을 우리는 ‘정치’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서로의 제 1안들끼리 충돌하는 모습이다. 그것이 원칙과 정의의 천명일지는 모르지만 문제 해결은 아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의 제 2안이었다. 그리고 그 2안이야 말로 하나님의 1안이었음을 요한복음이 말씀하고 있다.

일단 이제 여기서 우리는 상대에게 져주어야 한다. 양해와 용서야말로 강자의 것이다. 정의의 사자가 되지 말고 양해의 강자가 되어주어야 한다. 어쩌겠나? 답답하긴 하지만 ‘한 달 밖에 안 남았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얻을 것을 웬만큼 얻었지 싶다. 임원들도 자신이 섬기는 노회를 통해서 독단과 파행에 대한 분명한 우려와 경고를 받았을 것이고, 명성교회도 자신을 향한 질책과 반감이 팽팽하게 살아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고 혼쭐이 났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그냥 단순하게 장소 사용으로만 보자. ‘장소 사용의 의미’가 아니고 그냥 ‘장소 사용’이다. 다른 교회나 신학교 캠퍼스를 사용할 수 있듯이 개최 장소로서 명성교회를 사용한다고만 생각하자.

곽재욱 목사. 가스펠투데이 DB
곽재욱 목사
서울서노회
동막교회

 

가스펠투데이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Array ( [0] => Array ( [0] => band [1] => 네이버밴드 [2] => checked [3] => checked ) [1] => Array ( [0] => talk [1] => 카카오톡 [2] => checked [3] => checked ) [2] => Array ( [0] => facebook [1] => 페이스북 [2] => checked [3] => checked ) [3] => Array ( [0] => story [1] => 카카오스토리 [2] => checked [3] => checked ) [4] => Array ( [0] => twitter [1] => 트위터 [2] => checked [3] => ) [5] => Array ( [0] => google [1] => 구글+ [2] => checked [3] => ) [6] => Array ( [0] => blog [1] => 네이버블로그 [2] => checked [3] => ) [7] => Array ( [0] => pholar [1] => 네이버폴라 [2] => checked [3] => ) [8] => Array ( [0] => pinterest [1] => 핀터레스트 [2] => checked [3] => ) [9] => Array ( [0] => http [1] => URL복사 [2] => checked [3] => )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제동 298-4 삼우빌딩 402호
  • 대표전화 : 02-742-7447
  • 팩스 : 02-743-744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상현
  • 대표 이메일 : gospeltoday@daum.net
  • 명칭 : 가스펠투데이
  • 제호 : 가스펠투데이
  • 등록번호 : 서울 아 04929
  • 등록일 : 2018-1-11
  • 발행일 : 2018-2-5
  • 발행인 : 채영남
  • 편집인 : 박진석
  • 편집국장 : 류명
  • 가스펠투데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가스펠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ospeltoday@daum.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