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미술 수업을 떠올려 보면 상상화 그리기 시간을 가장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틀에 갇히지 않고 마음대로 상상하며 그릴 수 있는 자유가 있었지만, 거듭하여 그릴수록 기계 아니면 괴생물이라는 대상과 우주 또는 심해를 배경으로 하는 단조로운 반복과 자기복제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상상력에는 한계가 있으며, 일찌감치 상상은 천재들의 일로만 여겨 왔던 것 같습니다.

얼마 전 『탈성장을 상상하라』는 책의 출판기념행사에 패널로 참석할 일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저에게 맡겨진 일은 논찬, 논평이 아닌 무려 ‘상상 유발자’라는 역할이었습니다. 기후위기를 유발한 성장 논리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사회 질서인 탈성장을 상상해 보는 주제로 진행되는 한 행사 덕분에 어린 시절 일찌감치 포기했던 상상을 다시 ‘상상’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행사에 참석한 관객들의 상상을 유발하기 위해 고심한 끝에 상상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어떤 천재적인 작업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소재들과 익숙한 단어, 개념, 전통들 가운데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천재적인 발상뿐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서 기존의 개념과 경험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 역시 놀라운 상상력의 발현이었음 알게 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어 ‘복음(유앙겔리온)’은 식민지 지배에 성공한 로마 개선장군들의 행렬을 알리는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따르는 민중들의 일어남을 일컬어 ‘복음’이라는 말을 차용하여 식민 지배의 질서를 전복시켰습니다. 식민지의 피지배 계층들을 억누르던 ‘복음’이,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좋은 소식’이 되었습니다. 너무 흔해져서 잘 쓰지 않는 은총, 복음, 회개 등의 단어와 여러 개념 역시 얼마든지 우리에게 상상력을 유발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작은 국가 중 하나인 투발루는 해발고도가 2m에 불과한 까닭에 기후변화의 밀접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농작할 땅조차 얻기 힘든 섬나라 투발루의 사이먼 코페 외교부 장관은 국가 소멸 위기를 극복하자는 연설을 위해 물에 잠긴 상태에서 연설하여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습니다. 상상력은 때로 내가 속한 환경이나 배경을 벗어남을 통해 발현되기도 합니다. 기후위기가 잘 와닿지 않거나 불편한 주제 이상으로 들리지 않는다면 한번 기후위기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나라의 상황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삶의 변화를 촉진하는 책임 있는 상상력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기후위기에 한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느끼며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는 ‘기후우울’ 현상이 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인류가 자초한 기후위기 앞에서 망연자실하기보다 그 위기를 극복하고 되돌릴 수 있는 것 역시 인간에게 달려있음을 상상해 본다면 지금이라도 우울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단 기후위기의 문제뿐일까요? 노동의 문제 교육의 문제 등 수많은 문제 앞에서 관료적인 탁상행정이 아니라 수많은 평범한 이들의 상상력이 발휘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요? 불평등 해소를 상상하라! 부와 가난의 양극화 타파를 상상하라!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상상하라! 소수자, 난민 권리 보장을 상상하라! 등 우리 사회에 부족한 것은 예산과 행정이 아니라 성실한 상상력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송기훈 목사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