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1)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1)
  • 최부옥 목사
  • 승인 2023.06.26 10: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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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_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본 자료는 지난 6월 19일, 성락성결교회에서 열린 한목협(대표회장 지형은 목사) 24차 전국대회에서 최부옥 목사가 강의한 내용을 요약, 편집한 것이다_편집자 주


비록 차이는 있지만, 우리 대부분의 교회 현실은 숱하게 많은 장벽들 앞에 직면해 있다. 자주 듣게 되는 충격적인 소리 중 하나는,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는 시대가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염려해 주는 시대’라는 말이다. 이는 각종 종교여론조사들에서, 기독교가 가장 낮은 신뢰도를 얻고 있음에서 확인된다.

이를 어찌할까? 성령의 탄식이 크게 들린다! 믿는 자여, 어찌 할꼬! 그러기에 우선 정체성의 재확립이 시급하다. 이를 위하여, 먼저 성경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가 누군가 - 우리의 정체성(Identity) 찾기

성경이 지시하는 우리의 삼위일체적 정체성은 다음 몇 가지이다. 첫째,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다. 둘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셋째,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할 증인(證人)들이고 전해 줄 선교인(宣敎人)들이다. 이 셋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모두 상호간에 밀접하게 연계된 하나이다. 이제 그 내용들을 살펴본다.

아브라함이 누구인가? 그에 대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뢰는 신구약성서 전체에 가득하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임을 복음서의 첫 장 첫 절에서 선언할 정도이다(마 1:1). 그의 존재는 예수께서 소개하신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보면(눅 16:24~31) 정말 대단하다. 그가 하늘 심판대에서, 거지 나사로에게는 자비를, 부자에게는 심판을 선언할 정도이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존재감은 여전하다. 세계 4대 종교들인(개신교, 카톨릭, 유대교, 이슬람) 모두도,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데에 전혀 이의가 없다. 그의 이러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신뢰는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고향-본토-친척-아비의 집(메소포타미아)을 떠나 내가 지시 할 땅(팔레스틴)으로 가라’는 여호와의 명령과(1절)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게 하리라’는 여호와의 약속(2-3절)에 온전히 순복하는 믿음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을 어떤 존재로 세우고 싶으셨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창세기 12장 앞부분에 나온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의 내용과 특성을 우선 들여다보자.

먼저 ‘내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리라’(2절)는 첫 번째 복을 살펴보자.

인간이 스스로 복의 주체인 근원과 뿌리가 되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 하지만 바로 복의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굳게 맺어질 때에는 가능해진다. 복의 원천인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필수 요인이다. 그러면 어느 정도의 하나님 사랑이면 되는가? 십계명과 예수님이 제시하신 수준, 즉 ‘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면 된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신 6:5, 막 12:30 참조). 그러면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게 하리라’(3절)는 두 번째 복은 어떤 것인가? 내가 받은 복을 나 혼자만 누리지 아니하고, 받지 못한 세상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며 사는 일이다. 곧 ‘이웃 사랑’의 복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가능한 것인가? 물론 가능하다. 곧 내 마음을 열고, 펴서 살려는 분명한 의지만 있으면 된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은 바로 그런 성격의 복 이었다! 받기도 해야 되고, 또 반드시 주기도 해야 되는 복이었다.

그런데 이 두 복들에는 큰 특징이 있었다. 이 두 복들이 일괄처리(package)처럼, ‘서로 성격이 다른 두 가지를 하나로 받는 묶음(option)이었다. 아브라함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패키지 복’, 곧 그 둘 중에 하나만 취하려고 하는 순간, 다른 하나까지도 아예 못 받게 되는 그런 일괄처리(一括處理)형인 복을 받았다.

‘전부냐 전무냐’(All or Nothing)형이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로 묶여서 함께 취급되는 유형이었다. 이 얼마나 독특한 복 인가! 결국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이 불가분리의 사랑의 시스템을 수용했다. 그는 생각 밖에 큰 책임과 부담이 자신에게 부여된 복을 지게 된 것이다. 큰 멍에였다! 그는 진정 ‘복 받는다’는 것부터가 어떤 것인지를 다시 생각해야만 하게 되었다. 복은 좋지만, 그러나 거기에 걸맞은 세상과 이웃을 향한 책임과 부담을 함께 감당해야만 되었기 때문이었다.

복(福)을 이중적 계명의 틀 속에 묶으신 이유

그러면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과 그의 백성들에게 처음부터 이 둘을 하나로 묶어 주셨을까? 사랑에도 위험성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사랑 없는 하나님 사랑은 기복주의에 빠져서 희생이나 섬김이 없는 야욕의 도구가 될 위험이 있고, 하나님 사랑 없는 인간사랑은 그 중심을 상실한 사랑이 되어서, 교만해지거나 공의를 잃어버린 것들이 될수 있어서, 이 둘의 상호견제와 보완을 통한 사랑의 온전함을 확립하게 위하여 그러한 틀을 제시하여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라는 이중 계명을, 처음부터 하나의 구원의 옵션으로 묶어서 그의 백성들을 건강한 사랑의 사람으로 세우고자 하셨다! 일원론의 근거다. 하나님은 그런 당신의 선하는 뜻에 아멘하고 수용하는 아브라함을 기뻐하셨다. 그 때부터 그가 받은 복의 실체가 그 자신과 후손들에게서 서서히 세상에 드러났다. 선교와 섬김과 교제와 나눔도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알고 보면, 이러한 복들은 모든 생명체들의 머리가 되는 복이었으며(신 28:13 참조),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이었다(창 12:2~3).

이웃 사랑이 흔들릴 때 - 이스라엘 신앙의 실패의 결정적 요인

큰 문제는 이웃 사랑에 있다. 이는 말과 생각만으로는 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부딪치고 그 어려움을 체득해야만 나올 수 있는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실현을 위하여,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을 그 모델로 선택하셨다. 이스라엘의 ‘이웃 사랑’은 매우 낮은 곳과 밑바닥에서부터였다(시146:7~9 참조).

시작은 이집트의 노예 신분에서 부터였다. 그것도 그들이 노예 생활을 하면서, 짓눌리고 빼앗기고, 나그네 되어서, 헐벗고, 병들고, 두들겨 맞기도 하며, 그래서 주변에서 고통당하는 숱한 이웃들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소위 ‘좋은 이웃’이 될 실전 훈련을 정말 치열하게 받았다.

그 후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에는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만했다. 그들 가슴에는 ‘너희는 종(從)이었었다는 점을 절대로 잊지 말라. 그것을 망각하면 내가 멸(滅)하겠다’(신 15:15을 비롯한 신명기 전체)는 경고용 딱지가 항상 붙어 있었다.

그러면서 언제나 주변의 사회적 약자들인 고아-과부-나그네들, 그리고 경제적 약자인 제사장-레위인을 돌보는 생활들이 옵션으로 부과되었다. 그들의 세 절기들 중(유월절-칠칠절-초막절)에서 두 절기들은 모두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요구되는 때이기도 했다. 그때 그들은 건강히 살았다.

그런 이스라엘이 비극에 빠져 든 것은 언제였나? 조상이 받았던 패키지의 복들을 저버릴 때였다. 그들이 세상의 왕정체제를 택하면서, 권력과 돈과 전쟁의 맛에 빠져들면서, ‘하나님 사랑’만 붙들고, ‘이웃 사랑’을 외면할 때였다. 인간을 신분과 소유와 환경에 따라 차별하고 배제시키면서 부터였다.

이에 하나님은 격노하셨다. 그것은 당신과의 계약 위반(違反)이었고, 아브라함 자손임을 포기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신 일들, 곧 약자를 착취하고, 불의로 재물을 모으며, 힘없는 자들에게 군림하면서, 당신 앞에 나와서는 마치 흠 없는 자처럼, 뻔뻔하게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그런 제사를 아주 역겨워하셨다(소선지서들 참조).

그들이 당신을 성전 안에서 제물이나 받고, 복이나 베풀어주는 신으로 취급하며, 세상과 인간의 일과는 상관이 없는 신처럼 예배와 삶을 분리하는 행태를 맹비난하셨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종교를 죽은 종교로 만들었고, 백성들을 길 잃게 한 것이다. 이는 종교가 이원론에 빠져든 요인이었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나라가 남북의 분열과 패망으로 이어졌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우상종교에 깊이 빠져들면서, 앗시리아의 침공으로 참혹한 멸망을 당했다. 그들의 잔인한 혼혈 정책으로 인하여 문제의 사마리아인들이 생산되기도 했다.

남 왕국 유대는 바벨론 제국의 포로가 되어 70여년의 서러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면서 계속 이어지는 제국들의 식민지 백성으로, 주권(主權)상실의 나락 속에 빠져서 오랜 세월 탄식하며 살아야만 했다. (다음 호에 계속)

최부옥 목사한목협 중앙위원기장총회 증경총회장
최부옥 목사
한목협 중앙위원
기장총회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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