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하나님, 아주 작고 파란 고요
[전문가 칼럼] 하나님, 아주 작고 파란 고요
  • 이민재 목사
  • 승인 2023.05.16 09: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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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관상 영성에 기반한 어린이 교재를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만들고 있다. 어린이들에게 침묵이 실재임을 알려줄 좋은 방법이 없을까, 했더니 선생님 한 분이 『조안의 보물 가방』(알랭 세르)이라는 그림책을 소개해줬다.

주인공 조안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물을 찾아다닌다. 조안이 찾으려는 보물은 ‘고요’다. 소음이 가득한 곳에 숨어있는 작은 고요들을 찾아낼 때마다 조안은 보물처럼 소중하게 가방에 넣는다.

조안은 아이들이 소리 지르며 노는 운동장에서 나뭇잎들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나뭇잎들이 맞이할 밤을 생각하며, 커다란 밤의 고요를 보물 가방에 간직한다. 갑자기 세찬 비가 내려온 세상이 시끄러울 때는 꽃잎에 매달린 빗방울의 고요를 조심조심 가방에 넣는다.

조안은 자동차 소리가 요란한 도시 한복판에서도 고요를 찾아낸다. 빨간불이 소리 없이 파란불로 바뀔 때의 고요, 크리스마스트리를 파는 아저씨의 미소에 깃든 고요…. 조안은 이 고요들도 가방에 담는다. 조안은 맑은 물속에 사는 작은 물고기 두 마리가 만들어내는 물방울들에서도 고요를 본다. 조안은 그 물방울들의 고요도 보물 가방 깊숙이 집어넣는다.

조안이 찾아낸 보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은 집 뒤에 있는 숲에서 찾아낸 파란 고요다. 소리 없이 눈송이가 쌓이던 날, 아주 작고 파란 고요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것은 새였다. 새가 눈 위를 소리 없이 걷는데 그 그림자가 파랬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고요했다.

어느 날 조안은 엄마와 아빠, 동생 노베르와 강아지 앞에서 그동안 정성껏 모은 보물들을 하나씩 꺼내 보여준다. 밤의 고요, 빗방울의 고요, 신호등의 고요, 미소의 고요, 물방울의 고요, 그리고 아주 작고 멋진 파란 고요를! 보물 이야기를 듣는 가족들의 마음속에선 평화로운 고요가 자라난다.

하나님은 무한한 신비다. 그렇기에 하나님 경험의 경우의 수 또한 무한하다. 하나님이 하늘에도 계시고 땅에도 계시고 바다 끝에도 계신다는 시편 시인의 경이로운 고백(시 139)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일상의 도처에서, 또는 만물과 만인 속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예수님은 새와 꽃 같은 미물에서 하나님의 돌봄과 현존을 경험하신다. 이때 새와 꽃은 성사(聖事)가 된다. 예수님의 이러한 성사적 감수성은 세리, 창녀, 이방인같이 가난하고 버림받고 부서진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자신과 동일시하신다.

바울은 만유 안에서 그리스도를 본다. 아니, 만유가 그리스도다.(골3:11) 또 아테네 시민들을 향해 아레오바고에서 설교할 때는 이런 말도 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행17:28) 바울은 현존 인지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시편 시인의 보편적 임재 감각, 예수님의 성사적 감수성, 바울의 현존 인지 감수성은 모두 하나님을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영적 감각이다. 영적 감각이 뛰어난 신비가 중 하나가 성 패트릭이다. “사슴의 외침”(Deer’s Cry)이라고 알려진 기도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그리스도여, 당신은

나를 생각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도 계시며,

나에 대해 말하는 모든 이들의 입 속에도 계시며,

나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의 눈 속에도 계시며,

내 말을 듣는 모든 이들의 귓속에도 계십니다.

영적 감각을 일깨울 수 있을까? 침묵 수련이 많은 도움을 준다. 침묵 수련을 통해 영적 감각이 깨어나면 침묵 경험이 달라진다. 침묵이 실재임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덩달아 하나님 경험도 풍부하고 깊어진다. 침묵의 특성과 하나님의 속성이 거의 같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영적 스승들은 이러한 침묵과 하나님의 근사성(近似性)을 알고 있었다. “침묵은 하나님의 친구다.”(요한 클리마쿠스) “침묵만큼 하나님을 닮은 것은 없다.”(에크하르트) “침묵은 하나님의 최고 언어다.”(십자가의 성 요한) 심지어 6세기 시리아의 성 이삭은 “침묵은 하나님이다”라고까지 단언한다. “고요 안에 머물라! 하나님 안에서 쉬어라!” 현대 영성의 거장 토머스 머튼의 말이다. 그에게 고요(침묵)와 하나님은 동의어였다.

하지만 나는 영적 스승들을 통해 침묵을 배우기 전에 침묵과 하나님의 근사성을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통해 배웠다. “침묵이란 그저 인간이 말하지 않음으로써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의 첫 문장이다. 침묵은 소리의 부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침묵은 “원초적 주어져 있음〔所與〕”이며 “원초적 현상”이며 “원형적 실재”다.

이어지는 침묵에 대한 묘사는 하나님에 적용해도 손색없다. “침묵은 독립된 전체이며, 자기 자신으로 인하여 존립하는 어떤 것이다. (…) 침묵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 침묵은 창조되지 않은 채 영속하는 존재이다. (…) 침묵은 자신 안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 침묵은 언제나 완전하게 현존하며, 자신이 나타나는 공간을 언제나 완전하게 채운다.”

침묵과 친해지는 만큼, 침묵을 향유하는 만큼 하나님 경험도 풍성해진다. 하나님은 침묵의 방식으로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침묵은 일상의 도처에, 언제나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침묵 속에 머물면 만유, 만물, 만인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설거지할 때나 산책할 때나 운전할 때뿐 아니라, 심지어 똥 눌 때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 경험이 어렵지 않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침묵을 모른다.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배척한다. 하여, 한국교회의 하나님 경험은 빈곤하다. 침묵을 통한 하나님 경험을 모르니 하나님 경험을 방언, 신유, 예언, 입신, 탈혼, 환시, 직통 계시 따위 몇몇 신기한 심령현상에 한정한다. 그럴수록 하나님 경험은 더욱 빈곤해진다. 신앙생활에선 신비도 사라지고 삶에선 기쁨도 사라진다.

조안이 시끄러움 속에서도 고요를 찾아내듯, 침묵의 방식으로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일상의 도처에서 만난다면 하나님 경험은 얼마나 풍성해질까. 세상은 얼마나 경이롭고, 사람은 얼마나 사랑스럽고, 삶은 얼마나 행복해질까.

이민재 목사<br>은명교회 담임<br>감신대 객원교수
이민재 목사
은명교회 담임
감신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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