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발디의 모테트 「세상엔 참 평화 없어라」
그림 속에 네 사람이 보인다. 식탁에 둘러앉은 예수님과 두 제자, 그리고 엠마오의 여관 주인이다. 두 제자는 엠마오로 걸어갈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는데 알아보지 못한 바로 그 제자들이다.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처형과 부활 사건을 왜 당신은 모르냐고 힐난한다. 그런데 정작 자신 앞에 있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들이었다. 그 제자들은 저녁 식탁에서 갑자기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뒤늦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제자와 깜짝 놀라 양팔을 벌리고 충격 받은 제자가 보인다. 그런데 이미 그 순간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눅24:31).
런던의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이 그림은 바로크 시대 최고 화가 카라바조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작품이다. 제자들이 그들 앞에 갑자기 나타나신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을 연극의 한 장면처럼 훌륭하게 포착했다. 그들의 놀라움이 그대로 전달된다. 한 사람은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쥐고 벌떡 일어설 찰나이고, 다른 한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양팔을 벌리고 의아한 표정이다. 덥수룩한 수염, 주름진 얼굴, 누더기 옷에서 알 수 있는 평범한 노동자 제자들의 당황이 엿보인다. 구원은 평범한 누구에게도 찾아올 수 있다는 암시다. 극적인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서 카라바조는 키아로스쿠로(명암의 대비)를 사용해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왼쪽에서 강한 빛이 예수님과 오른쪽 제자의 얼굴에 떨어진다. 재미있는 것은 엄지손가락을 허리띠에 집어넣고, 이 사건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는 여관 주인이다. 세상을 상징하는 이 모습에서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중요한 사건도 그 의미를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세상은 예수님이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도, 그들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삼 일 후에 부활하신 것도 모른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마13:14). 예수님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한 제자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서로 말하길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24:32). 이 구절의 주석을 보면 단순히 “뜨겁지 아니하더냐” 정도가 아니라 “불타지 아니하더냐”라고 되어 있다. 예수님이 우리를 만나실 때는 항상 격정적이다. 평온해 보여도 그 만남이 누구와의 만남이든지 모두 기적이다. 이날 저녁 식사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셨고, 눈을 밝게 해주셨고, 마음에 불을 붙여주셨다. 그리고 자신을 알아보게 하셨다.
부활절이 되면 늘 떠오르는 음악이 있다. 비발디의 모테트 「세상엔 참 평화 없어라」(Nulla in mundo pax sincera RV630)이다. 천상의 소리와 같은 소프라노 엠마 커크비(Emma Kirkby)의 음성으로 들으면 모든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고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나와 함께하셔서 그가 주시는 참 평안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https://youtu.be/gPtxj7k-htk).
이 곡은 작자 미상의 라틴어 종교시(詩)에 음악을 붙인 곡으로 가사 해석을 보면 이렇다.
세상엔 참 평화 없어라
괴로움이 없는 참 평화 없어라
오직 예수께만
참되고 진실한 평화가 있나니
불안과 고통 속에서도
그 영혼은 만족을 얻나니
그의 유일한 소망
순결한 사랑이여
카라바조의 그림 속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이 음악을 듣는다. 고난을 이기시고 참 평화를 가지고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찾아오신다. 이때 누군가 내게 “어디에 가고 있느냐?”고 묻는다.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을 알아봐야 한다. 약속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말이다. 카라바조는 예수님 건너편에 내가 앉을 자리를 남겨 두었다 떨어질 듯 위태롭게 보이는 테이블 끝에 놓인 과일바구니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다. 그 과일바구니를 두 손으로 받으면서 예수님 앞에 앉아서 부활해서 우리를 찾아오신 그분 말씀에 함께 빠져들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