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소설가 vs. 목회자(1)
[특별기고] 소설가 vs. 목회자(1)
  • 김승호 교수
  • 승인 2022.10.05 14: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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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김승호 교수(영남신대)
무라카미 하루키

* 본 내용은 2022년 8월 29일, 목회윤리연구소가 주관한 “제3회 부교역자와 미래목회 세미나”의 발제 내용 중 일부를 요약한 글이다.

현존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소설가로는 다치바나 다카시와 무라카미 하루키라 할 수 있다. 특히, 하루키는 자신의 저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양윤옥 옮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서울: 현대문학, 2016초판1쇄/ 2020초판3쇄) 에서, 소설가로서의 자신과 소설가라는 직업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진솔하게 들려준다. 과연 그가 오랜 세월 소설을 쓰면서 깨달은 바는 무엇일까? 그가 가진 어떤 관점과 시각과 행동과 노력과 판단이, 그를 대중에게 사랑받는 세계적인 소설가로 발돋움하게 했을까? 이 책을 통해 독자는 오랜 세월 세계적인 팬층을 확보해온 하루키의 직업관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언젠가 한 서점에서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종교적인 내용이 전혀 언급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소설가라는 직업인으로서 자기 직업을 대하는 그의 자세는 소명 받아 주의 뒤를 따르는 목회자가 가져야 할 기본자세와 너무나 흡사한 면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목회윤리 분야를 연구한 필자에게는 소설가로서의 자기 인식과 소설가로서 자기 직업을 대하는 자세, 즉 하루키의 직업윤리가 목회자의 목회윤리와 비교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물론 소설가와 목회자는 그 직의 특성상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하루키가 자기 직업을 대하는 자세는 소명 받은 목회자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통찰력을 제공해준다. 본고는 ‘자질’이란 측면에서 소설가와 목회자를 비교해 보고자 한다.

“1회: 소설가는 포용적인 인종인가”에서, 하루키는 소설가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이렇게 소개한다.

첫째, 평범하지 않고 자기주장이 과도하게 강한 일종의 ‘별종’이며; 둘째, 이기적인 인종으로 자존심이나 경쟁의식이 강하다.

반면, 소설가는 자기 영역, 소위 ‘내 구역 의식’에 대해 관대한 포용력을 가지는데, 그 이유는, 첫째, 누구나 쉽게 소설 쓰기에 진입할 수 있지만 오래 버티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 문학계가 제로섬 사회가 아니라는 점(신인 작가가 등장해도 현역 작가가 직을 잃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그는 소설가가 어느 정도의 지성, 교양, 지식이 필요하지만, 너무 머리가 좋은 사람은 소설 쓰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소설 쓰기는 저속, 즉 느린 템포로 진행되는 작업이고, 소설가는 자신의 의식 속에 있는 것을 ‘스토리’라는 형태로 치환해서 표현하는 사람인데, 선명한 메시지를 가진 사람이나 두뇌 회전이 빠른 사람은 그걸 그대로 언어화하면 빠른 메시지 전달이 가능하므로 일부러 자신의 메시지를 스토리로 치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지식이 많은 사람도 지식을 최대한 논리적으로 조합해서 언어화하면 되지, 일부러 스토리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을 가진 사람은 저속, 즉 느린 템포로 진행되는 소설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신인 작가 대부분은 곧 그만두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그런 이유로 인해 기성 작가는 신인 작가를 경계하지 않는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저자의 이런 설명은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으레 소설가라 하면 천재적인 재능이 없으면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그런 유의 작업을 하는 사람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키는 소설가에 대한 이런 일반적인 생각을 한순간에 허물어 버린다. 자기주장이 강한 면은 있지만, 소설가가 별로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런데, 하루키가 소개하는 이러한 ‘소설가’의 자질은 ‘목회자’의 자질과 유사한 면이 있다.

목회자 역시 어느 정도의 지성, 교양, 지식이 필요하지만, 너무 머리가 좋은 사람은 목회직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목회직은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단기간에 행하고 그만두는 일이 아니라, 다양한 상황에 직면하고 굴곡 있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저속, 즉 느린 템포로 일생을 헌신하는 직이기 때문이다.

소설가가 그렇듯, 목회직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설교 한두 번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지속성’이다. 한국교회에서 목회자는 주로 설교자로 인식되어왔다. 그것은 목회자의 직무에서 설교가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주일설교, 수요설교, 새벽설교, 심방설교, 특별설교 등 한 주간 의무적으로 감당해야 할 설교의 횟수가 이를 증명해 준다.

규모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는 부목사들과 설교의 기회를 나눌 수 있지만, 작은 교회 담임목사는 대부분 혼자서 이 모든 설교를 감당해야 한다. 설교 외에도, 목회자는 성경공부, 심방, 절기 행사, 특별행사, 각종 회의 등의 행정업무를 포함하여, 지역사회의 여러 행사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만약 교회 내 특정 리더와의 인간관계에서 긴장이 발생하면, 목회자는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체력적으로 상당한 부담 가운데 목회직을 수행해야 한다. 또한, 상식적인 선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와 지속적으로 대면해야 하는 경우, 목회자가 느끼는 스트레스의 강도는 더욱 높아진다.

문제는 이러한 기본적인 목회자의 직무는 은퇴 시까지 감당해야 할 지속적인 활동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소명 받고 목회자가 되었다 해도, 목회직은 사명감과 끈기와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지속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목회자는 소명 받은 자로서 유의미한 사역을 수행하고 있다는 긍지로 목회직을 수행하지만, 항상 그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근거 없는 비판이나 황당한 비난에 직면해야 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목회자 스스로 ‘특별한 소명 수행’이 아니라, ‘너무나도 평범한 일’ 혹은 ‘너무나도 무의미한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좌절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것은 목회자가 건강한 교회를 세워가려는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따라주지 않는 목회환경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처음 목회직으로 부름 받을 당시의 소명 의식은 목회 현장에서 경험하는, 이성적인 대화와 논의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간관계의 어려움과 목회환경의 한계에 직면하면서, 쉽게 무력감으로 대치될 수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목회 활동이 ‘무의미한 일’의 반복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므로 목회직 수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두뇌와 논리를 기반으로 하는 이성적인 요소가 아니라, 소명 의식에 기반을 둔 맷집과 끈기와 인내라는 자질이다. 그런 점에서 목회직은 머리가 좋고 두뇌 회전이 빠른 사람에게는 매우 힘든 직이 아닐 수 없다.

하루키는 소설가라는 영역에의 진입 장벽이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언급한다. 그런데 목회자 영역에의 진입 장벽 또한 그리 높지 않다. 물론, 공적으로 인정받는 교단의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이 요구된다. 보통, 대학 4년과 신학대학원 2~3년 과정을 졸업한 후에 목사고시에 합격해야 하고, 거기에다 다시 최소한 2년 이상의 훈련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면, 목사라는 영역에의 진입 장벽이 매우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각 교단 소속의 신학대학마다 신학대학원 과정의 입학생 중에서 중도 탈락자가 많지 않다는 사실은 목사의 진입 장벽이 높다고 말하기는 곤란한 측면이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최근 들어 목회자가 되려는 이들의 수가 현저히 줄어든 관계로, 신학대학원의 지원자 수가 급감했다. 이런 현실은 목사라는 영역에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데 한몫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가와 목회자는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소설가와 달리, 목회자는 자기 삶이 노출된다는 사실이다.

소설가는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쓴 소설이라는 결과물을 출간하여 그것으로 자신의 수고에 대한 평가를 받는다. 즉, 소설가는 자신이 쓴 소설이라는 결과물만으로 평가받는다. 반면, 목회자는 설교와 상담과 행정 등 자신이 수행하는 목회 활동 자체를 통해서도 평가받지만, 동시에 자기 삶을 통해서도 평가받는다. 그러므로, 소설을 쓰는 일보다 목회직 수행이 어려운 이유는 사역과 삶 모두를 평가하는 ‘이중적 평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목회자는 개인의 삶뿐 아니라, 가족의 삶까지도 상당 부분 교인들에게 노출된 상태로 살아간다. 이런 현실이 목회자와 그의 가족이 져야 하는 부담 가운데 하나이다. 지역교회에서 신학대학교로 사역지를 이동하면서, 필자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 중 하나가 바로 이점이다. 교수는 연구와 강의와 행정 등 자신이 수행하는 업무에 대해서만 평가받는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개인과 가족의 삶은 공적으로 노출되지 않고, 평가 대상에 속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신학대학 교수는 연구와 강의 준비 등 자신이 수행하는 일 자체를 위해 애쓰지만, 개인의 사적인 삶은 거의 공개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이런 현실은 한편으로는 신학대학 교수가 지역교회 목회자보다 삶과 행동에 있어서 보다 자유로운 환경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교수직의 이런 환경이 스스로 긴장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퇴보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필자가 교수 사역을 감당할수록 더 분명하게 인식되는 것은, 점점 더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이 약화하고, ‘선생’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화된다는 사실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은 한편으로 일리 있는 말로 들린다. 똑같은 목회자라 해도, 어떤 유형의 직을 수행하는가에 따라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다.

지역교회 목회자이든, 신학대학 교수이든, 회중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데 초점을 맞추어 온 목회자는 이성적 사고 훈련으로 균형을 잡아야 할 것이다. 반면, 이성적 사고에 호소하는 데 익숙해진 목회자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훈련으로 균형을 잡아야 할 것이다. 소설가의 자질에 관한 하루키의 견해는 그의 이런 언급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소설 한 편을 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뛰어난 소설 한 편을 써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간단한 일이라고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못 할 일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소설을 지속적으로 써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28.

여기서 하루키는 소설가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이 ‘천재성’이 아니라, ‘지속성’임을 언급한다. 이는 소설가뿐 아니라 여타의 직을 수행하는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목회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하루키의 언급은 목회자에게 다음과 같이 적용될 수 있다.

“설교 한 편을 준비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뛰어난 설교 한편을 준비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간단한 일이라고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못 할 일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설교를 지속적으로 준비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1~2년간 목회를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1~2년간 뛰어난 목회를 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간단한 일이라고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못 할 일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평생 목회를 감당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음 호에 계속)

김승호 교수 (영남신대, 한국교회언론연구소 연구위원)
김승호 교수
영남신대
한국교회언론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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