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겔 설교] “감사의 삶”
[데겔 설교] “감사의 삶”
  • 홍상태 목사
  • 승인 2022.10.05 14: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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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후 열여덟째 주일
본문말씀: 누가복음 17장 11-19절

신학적 관점

누가복음에 나오는 열 명의 한센인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읽을 때, 우리는 장로교회 (다른 교단 대부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겠지만) 예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 성만찬 기도로 이끌려진다. 이 기도는 우리가 그 내용에 대해 깊이 묵상하거나,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거나, 그 내용이 우리 삶의 한 부분이나 우리의 존재 자체가 되도록 기도할 때,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된다. 이 대감사의 기도(Great Thanksgiving)는 축제적이거나 근엄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거룩한 주일 아침 예배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크리스천의 삶의 모든 부분, 즉 세속적이고 일상적이고 사소한 모든 삶을 규정하기 위해 드려진 기도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진정 옳고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 된다고 여기며 기도하고 고백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도 확신한다. 결국,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질문86)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서 우리의 하나님께 향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의무가 아닌가? 그러나 오늘과 같이 사람들이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는 세상에서 누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을 의무로 여길 뿐 아니라 최대의 기쁨으로 여기겠는가? 누가 자신의 삶에서 가치 있고 좋은 것들, 더 나아가 삶 자체가 다른 사람 덕분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 자신이 스스로 만든 인생이 아니고 그 반대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고 고백하는 것을 기뻐하겠는가? 누가 감사하는 삶이 개인과 공동체가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사는 이유이고 근거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본문에서는 외국인 취급을 받았고,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소외된 자였고, 선민에 끼지 못했고, 이단 취급을 받았던 사마리아인이 거룩한 삶과 태도의 모범으로 소개된다. 그는 하나님을 붙잡는 믿음을, 하나님이 그에게 해주신 일에 대해 침묵하지 않는 믿음을, 그리고 자발적이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공적으로 돌려 드린 믿음을 보여주었다. (중략) 그러므로 그의 감사는 치유와 구원을 이루는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의 결과이다. 이 순간에 그 사마리아인은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coram Deo)” 서게 된다. 이 순간 그는 치유자요 구원자가 누구인지를 전존재를 통해 이해한다. 또한, 그는 그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의 실현이 그의 태도를 한탄에서 감사로 바꾼 것이다. 그의 반응은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 즉 사람의 제일 된 목적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과도 같았다.

주석적 관점

(중략) 본문 첫째 부분(11-14절)은 대부분의 치유 이야기의 구조와 같다. 병자가 예수께 그들을 고쳐달라고 요청한다. 예수는 고쳐주고 그들을 보내며 어떤 종류의 충고를 한다. 이 이야기와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예는 막 1:40-45(마 8:1-4, 눅 5:12-16)인데, 여기서는 단 한 명의 나병환자가 예수께 찾아와 발 앞에 엎드려 고쳐 달라고 요청한다. 예수는 나병환자를 만지고 말하기를 “깨끗하게 되라”고 했고 금방 나병이 나았다. 그러자 예수는 두 가지 명령을 내린다. 아무에게도 일어난 일을 말하지 말고,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모세가 규정한 대로(레13:9-17;14:1-32) 정결례를 드리라고 했다.

오늘의 이야기도 이것과 대단히 비슷하고, 용어도 누가의 것이 분명하기에 어떤 학자들은 그것을 15-19절의 이야기들을 발전시키기 위한 누가의 창작으로 본다. 다른 학자들은 그것은 누가가 그의 특별한 자료(누가가 의존하는 비유나 말씀이 담겨져 있는 문서나 세심하게 보존된 구전 전통)에서 발견한 이야기로 보고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언급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야기의 구성에 대해 어떻게 결론을 내리든 간에, 이야기는 분명히 누가의 관심 특별히 11절과 15-19절의 관심을 분명히 반영하고 있다.

11절의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라는 말을 제외하면 동네 자체는 어딘지 잘 알 수 없다. 주변적 위치나 돌아와 감사드린 사람이 사마리아사람(16절)과 이방 사람(18절)이란 묘사가 장소 설정에 충분하다. 사마리아는 왕상12장에서 다윗왕국에서 분리되고, 왕상16장에서 오므리왕의 북왕국 수도가 되면서 부터 이방 땅이 되었다. 앗시리아 제국이 주전 721년에 도시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몰아내고 다른 지역의 점령된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느헤미야4장에는 사마리아사람들과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예루살렘 성을 세우려는 유대인 사이에 대립과 긴장을 보여준다. 나중에, 헬라제국의 지배 기간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전 지역에 일어난 끊임없는 여러 가지 갈등에 있어 다른 입장을 취한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사마리아를 선교의 첫 번째 대상 중의 하나로 취급하는데(행1:8), 오늘 본문과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10:29-37)에서 전조를 보여주고 있다. (중략) 마지막 문장이 이야기의 긴장을 가져온다. 19절에서 예수가 나병환자였던 사람에게 한 말은 여러 의미를 가진다.

NRSV는 “너의 믿음이 낫게 했다”로 되어 있지만 “너의 믿음이 구원했다”로 해석할 수 있다. 두 가지 번역 다 가능하지만, 두 번째 것은 신학적 함축을 가진다. 누가는 돌아 온 나병환자에게 낫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가? 다른 아홉은 “낫기만”하고 돌아온 그만 구원받았다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무엇이 다른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나병한자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길에 깨끗해진다(14). 그러기에 돌아온 나병환자는 그가 치유 받았기에 그랬던 것이지 받을 것이기에 한 것은 아니다(15). 그는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돌아온 것이다.

목회적 관점

다시 한 번 우리는 믿음의 분량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을 듣는다. 마치 믿음이 원인과 결과의 문제라서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질’ 만큼 충분한 믿음을 가지고 있든 혹은 그렇지 않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예수는 믿음의 본질에 대하여 가르쳤다. 간단히 말해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믿음으로 사는 것은 감사하는 것이다. 믿음의 삶을 구성하는 것은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사마리아에서 온 사람을 정말로 그리고 아주 건강하게 만든 감사하는 믿음이다.

사실 “믿음”과 “감사”는 같은 뜻을 가진 두 개의 단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감사를 실천하는 것은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만약 믿음이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것, 즉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온전한 신뢰를 표현한다. 하나님이 모든 좋은 은사를 주시는 분이시고, 섭리의 손으로 모든 삶을 붙잡아 주시는 분이심을 안다면,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가 감사를 실천하면 누르고 넘칠 만큼 풍성하게 믿음을 얻게 된다.

목회적 관점에서 보면, 이 이야기는 예배당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거기에는 병을 고친 사람과 여전히 아픈 사람이 있고, 해방된 사람과 여전히 얽매인 사람이 있고, 성공한 사람과 실직한 사람이 있다. 만약 감사 기도가 영혼의 치유와 해방과 번영의 일부라면, 기도하는 사람의 물질적 환경은 덜 중요하게 될 것이다. 감사하는 한센병 환자를 구원한 것은 감사이고, 이런 감사는 모든 환경에서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그가 한 즐거운 경험 때문에 감사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고난을 겪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심에 감사한다. 우리는 정결해지지 않은 한센병 환자가(길가에 한센병 환자가 열 명은 넘게 있지 않았을까?), 그가 병에 걸렸는데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심에 감사하는 것을 상상해 본다.

의도적으로 감사를 실천하는 것은 확실히 개인의 삶을 변화시킨다. 그것은 또한 회중의 성격도 변화시킨다. 그리스도인이 감사를 실천할 때, 그들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기 위해서 예배에 나온다. 청지기직은 모금 활동이 아니라 즐겁게 기부하는 사람들의 즐거운 감사로 바뀐다. 교회의 사명은 윤리적인 의무가 아니라 감사하는 손과 가슴으로 하는 일로 바뀐다. 기도는 우리의 중보와 간구뿐만 아니라 식탁에서 드리는 감사도 포함한다.

설교적 관점

설교자에게 오늘 본문은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이자 멋진 선물인가! 오직 누가 만이 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이야기가 이방인이자 멸시당하는 소수자인 사마리아 사람을 묘사하고 있고 그런 사람을 만져 주시는 예수는 누가에게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와 일행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 (11절)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있는 중이었다. “사마리아” 라는 단어는 그 자체가 주홍글씨처럼 꼬리표가 붙어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나 사마리아 사람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멸시받는 집단이었고 문화적으로 열등하며 신학적이나 예전적으로는 이단이었다. 주석적 과제 중 일부는 어떻게 이런 일이 시작되었고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적대적이 되었는지를 다시 살펴보는 일이 된다.

우리는 이 관계를 오늘날 북아일랜드에서 개신교-가톨릭 간의 적대적 관계 (비록 하나님 덕분에 줄어들고 있지만) 혹은 이슬람 세계 안의 수니-시아파 사이의 폭력적 갈등 또는 주류 교단 내에서 보수-진보세력 간의 심한 대립에 비추어 생각해볼 수 있다. 거칠고 격렬한 싸움에 익숙한 사업가나 정치인들도 자신들의 교회 내에서 두 집단 간의 갈등을 접하게 되면 기독교인들이 서로에 대해 얼마나 증오할 수 있는 가를 보고 놀라게 된다. 유대와 사마리아 사이의 반목을 묘사할 때 우리도 잘난 체할 이유가 없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 근처에서 예수와 제자들은 나병환자 열 명을 만난다. 이 열 명이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고 격리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나병환자라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었는데 나병은 의심스러워 보이는 피부 상처나 발진 등을 묘사하는 광범위한 용어였다. 소위 한센병이라고 불리는 이 병은 오늘날에는 치료가 가능하지만 예수당시에 그것은 근본적으로 전염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피부발진은 예전적으로 정결치 못함을 의미하였다. 그 결과 나병환자들은 완전히 격리된 채 살았고 가정으로부터 사랑하는 배우자, 아이들, 부모님들 그리고 신앙공동체로부터 떠나야했고 그들의 그림자 위로 지나게 되면 감염될까 두려워했다. 그들은 공동체로부터 떠나 홀로 살았다. 때로 이들은 함께 모여 불행한 무리를 이루기도 하였다. (중략)

예수께서는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어느 병원 홈페이지에는 “감사로 당신의 건강을 증진 시키세요” 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이 글은 감사를 강조하는 수천 년 간의 철학적, 종교적 가르침을 소개했고 그런 다음 감사하는 사람들 곧 감사가 일상인 사람들이 건강하다는 새로운 증거를 제시했다. 감사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더 잘 보살피는 것일 수도 있지만, 감사하는 사람들이 더 희망적이라는 것과 감사와 면역체계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증거가 있다. 그래서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에게 할머니에게 전화해서 할머니가 보내 준 생일 카드에 감사의 표현을 하도록 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대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응답은 감사이다: 생명을 선물로 주심에 대한 감사,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일에 대한 감사,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주신 좋은 사람들에 대한 감사.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에 관계없이 희망을 선물로 주시고 그에 따르는 건강함과 온전함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이다.

*말씀의 잔치, 교회력에 따른 복음서 설교(2022년)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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