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목회] 역설(paradox), 그 문학적 효용을 넘는 종교적 가치
[예술과 목회] 역설(paradox), 그 문학적 효용을 넘는 종교적 가치
  • 박혁순 박사
  • 승인 2022.08.10 15: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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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박혁순 박사 (조직신학, 한일장신대 겸임교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적 진실을 전하는 언어는 대개 비유와 함께 역설(逆說)을 쓴다. 부연하자면, 종교들은 그 창건 당시부터 다양한 우화 ‧ 우언 ‧ 유비들을 구사하여야 했다. 표층과 심층이 일부 일치되면서도 갈라지는 알레고리, 중의적 메타포, 역설과 비약, 말장난(pun), 언어의 왜곡과 파괴 등도 필요했다. 논리를 초월하는 이러한 표현이 아니면 고유한 진실을 전할 방도가 없는 것이 바로 종교가 지닌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타종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정제된 언어로 교리나 신조를 확립해온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도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특히 역설과 모순의 언어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의 신앙과 의식을 심층으로 안내하기 위해 신학적으로 가장 적절한 수사법(修辭法)을 찾는다면, 역설과 반어(反語)를 생략할 수 없다. 복음서 기자에 의하면, 예수님이 그러한 표현을 자주 쓴 당사자로 소개되어 있다.

평화의 왕이라 칭해지는 예수 스스로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 10:34) 또는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눅 12:49)고 했다. 그리고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요 12:25)이라 경고했다. 산상수훈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마 5:3, 눅 6:20)는 역설로 시작하며 역시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 등의 상식을 뒤집는 어법을 썼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떠했을까? 그 또한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하다”(고후 12:10), 그리고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비논리적 ‧ 비상식적 고백을 했다(빌 1:21). 이런 식으로 모순의 진술이 가득한 곳이 성서의 세계다.

사도 시대 이후 고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떠했을까? 그들이 구사하는 반어와 역설을 꼽아본다. 아우구스티누스 시대 이전에 형성되었던 ‘유월절 전야 미사찬송’(Paschal Vigil Mass Exsultet)에는 이른바 “복된 죄”(felix culpa)의 역설을 노래했다. 말하자면 “이처럼 위대한 속죄의 주를 가질 자격을 갖추었던, 오, 행복한 죄여!”라고 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악이 존재하지 않게 하는 것보다 악으로부터 선을 가져오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하며 인간이 짊어진 죄악의 역설적 기능을 긍정했다. 교부신학의 완성자 토마스 아퀴나스도 『대이교도 대전』 가운데 불행과 행복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불행은 그 자체로 사람들의 경멸을 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행한 이들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경의를 표시한다.” 어떻게 보자면,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신앙 자체가 역설이고,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 존재 자체가 역설이라는 사실에 있다.

가령 루터는 시편 117편에 관한 주석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매우 기이한 문장으로 하나님이 인간의 실존에 어떻게 드러나는 분인지 인상적으로 예시한 바 있다. “하나님의 진실과 진리는 진리가 되기 전에 먼저 큰 거짓이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세계에 대하여 그것은 이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유기하고 그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우리 마음속에 거짓말쟁이가 되도록 독려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요컨대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 없고 먼저 마귀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천국으로 갈 수 없고 먼저 지옥으로 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먼저 마귀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루터가 짚어내는 은혜의 실제란, 그것이 표면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처럼 나타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 본성과 다른 식으로 은폐될 수 있다는 점을 뜻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원한 사랑과 구원을 시위하기 위해, 마치 우리를 유기하고 죄악에 빠뜨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은 행여 ‘마귀’ 같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부정적 함의를 지닌 그 모든 단어는 곧 하나님 은총의 무한함과 놀라움을 표방하는 역설이 된다. 과학기술 및 공학이 발달함에 따라, 인류 문명은 점차 불합리하고 모순되는 것들을 추방하고 기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패스워드 가운데 자그마한 점 하나의 오류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세상을 살고 있다. IT 및 메타버스의 문명을 떠받치는 알고리즘과 코딩은 곧 계산적 정합성과 논리성을 대표하는 것들이다. 거기에 비논리와 모순이 개재할 여지는 없다. 그러나 이 어쩌랴? 하나님과 삶과 신앙이라는 것은 깊이 체험하면 할수록, 알아갈수록 역설 덩어리인 것을! 독자에게 귀띔해 드린다. 역설, 반어, 모순 등은 시인만이 구사하는 하나의 문학적 표현만 될 수 없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세계의 디테일과 정서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수용할 매우 중요한 계기와 수단이 된다. 이점을 항상 깊이 묵상하며 살아가 보시길 권한다.

박혁순 교수<br>한일장신대 초빙교수<br>
박혁순 박사
한일장신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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