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막달라 마리아의 고난과 믿음
성 막달라 마리아의 고난과 믿음
  • 허성우 막달라 마리아
  • 승인 2022.03.16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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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주간 기념 설교문
말씀: 대한성공회 대전교구 허성우 막달라 마리아 종신부제

3ㆍ8 세계여성의날 기념, 3월 13일 서대문 새길교회에서 선포된 대한성공회 대전교구 세종교회 허성우 막달라 마리아 종신부제의 설교문을 게재한다._편집자주


3.8. 여성의 날과 크리스천 여성들

저는 3.8.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면서 동시에 교회력으로는 사순 2주일을 맞아 크리스천들이 기억하고 기념할 여성들은 누구인가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3.8. 세계 여성의 날은 1908년 3월 8일 미국 럿거스 광장에 모인 여성노동자들이 최소한의 노동기본권을 외쳤던 투쟁을 기념하여 제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모든 종류의 차별 속에서 고통 받는 여성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박탈당한 여성들의 고통도 목도하고 있지요.

우리가 기념해야 할 것은 3.8. 여성들이 고통 속에 마냥 주저앉아 있지 않고, 그들에게 금지되었던 장소들, 거리로 광장으로 공적 집회로 뛰어나와 외치고 싸운 자기구원의 행동일 것입니다. 크리스천 여성들도 각자의 삶에서 고난을 만나고 이것을 뚫고 나와 구원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에게 있어 고난이란 세상의 빵과 물질에 관한 것을 넘어섭니다. 크리스천들은 인간에게 물리적 신체와 생명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 신체와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들에게 고난이란 육체적 고난뿐만 아니라 영적 고난입니다. 이 영적 고난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동행하는 것입니다. 3.8.의 여성들의 구원은 세상을 향한 외침이지만 크리스천들은 세상을 넘어 그리스도를 향해 구원을 외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수제자 성 막달라 마리아의 고난과 믿음의 삶을 여러분과 함께 만나고자 합니다. 저의 세례명이 막달라 마리아이니, 이천년 후의 막달라 마리아가 이천년 전의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고난과 믿음

오늘 복음말씀(요한 20:11-18)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죽음 이후 시신이라도 찾으려는 간절함으로 무덤에 와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 사건 바로 전에 있었던 일을 잠시 보겠습니다. 그녀는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동트기 전 아직 어두울 때 예수님이 묻히신 곳으로 달려갑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고 시신이 없어진 것을 보고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알립니다. 베드로와 다른 한 제자가 무덤에 오고, 그들도 시신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다는 말씀을 깨닫지 못한 채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돌아가지 않고 무덤 앞에 남아 죽은 그리스도를 찾습니다.

1) 애도와 고통

저는 이 말씀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예수의 죽음에 대한 진정한 애도의 행위를 발견합니다. 그녀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습니다. 아마 한참을 울고 있었을 것 같아요. 저는 복음서 어디에서도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는 기록을 보지 못했습니다. 실제로는 그들이 울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마리아의 울음만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난 3년여 간 예수와 함께 먹고 자고 전도여행을 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배우고 논하며 살았던 제자들입니다.

메시아라 여기던 스승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이별을 슬퍼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며 진실한 예의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와의 이별을 진행하는 과정을 우리는 애도라고 부릅니다. 애도의 과정은 여러 복잡한 감정과 심리적 과정들을 동반하지만, 가장 먼저 즉각적으로 나오는 것은 슬퍼서 우는 것입니다. 눈물이 그저 온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죠. 떠난 이를 아끼고 사랑했던 그 깊이만큼 슬프게 울게 될 것입니다. 고인이 세상을 떠나고 없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 그 사람을 단 한번이라고 다시 보려고 합니다. 볼 수 없는 것을 보려고 미친 듯이 두리번거리며 찾게 됩니다. 만일 고인의 시신조차도 찾을 수 없는 경우라면 그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태가 됩니다.

무기력, 분노, 절망, 죄책감, 공허와 같은 복잡한 감정으로 광야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세월호 사건을 통해 떠난 아이들의 부모와 친구가 되어 마음으로 울부짖고 찾았었지요.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고 싶고 찾고 싶은 마음에 울고 울다가 다시 몸을 굽혀 무덤 속을 들여다봅니다. 새벽녘에 이미 무덤을 들여다봤었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것을 또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죽음을 슬퍼하며 밤잠도 못자고 무덤에 달려오고 울면서 죽은 이를 찾아다니며 그리워하는 애도가 단지 감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애도를 해 보신 분은 알겠지만 그것은 엄청난 감정노동이며 육체적인 에너지가 드는 온 몸을 바쳐서 하는 어떤 행위입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심대한 고통입니다.

빠져나갈 출구 없는 깜깜한 동굴 속에 갇힌 느낌이죠. 이 때 다른 남성 제자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고, 유다인들이 잡으러 올까봐 무서워서 집에서 문을 닫아걸고 숨어있었습니다(요한 20: 19). 자기를 보호하고 싶고 자기를 걱정한다는 것은 그들이 진정한 애도는 하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이 깊은 애도의 고통 중에 예수님은 부활로 나타나십니다. 예수의 부활은 그 죽음에 대한 깊은 슬픔과 죽은 이를 찾아 헤매는 막달라 마리아의 슬픔과 갈망 속에서 솟아나는 것 같습니다.

2) 고통을 뚫고 오신 부활

막달라 마리아는 다른 그 누구나 그 무엇보다 온전히 예수님만을 갈망하는 완전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녀에게 나타나신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매우 세심한 계획으로 이뤄진 듯합니다. 정신없이 울며 헤매고 있는 그녀에게 돌발적으로 나타나지 않으시고, 먼저 두 천사를 보내십니다. 천사들이 그녀에게 왜 울고 있냐고, 여기서 누구를 찾고 있냐고 묻지요. 그녀는 분명 예수님이 여기 묻혔는데 없어졌으니 누군가가 “제 주님”을 꺼내갔다고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다며, 그들을 동산지기인 줄 알고, 당신들이 그분을 옮겨갔거든 어디에다 모셨는지 알려주시면, 내가 모셔가겠다고 말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지금 천사고 뭐고 다른 것은 눈에 뵈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을 찾습니다.

여기서 “제 주님 my Lord”이라는 표현이 가슴에 큰 울림으로 와 닿습니다. 그냥 주님이 아니라 제 주님이라고 표현해요. 여러분은 주님을 부를 때 어떻게 부르시는지요? 내 주님이라는 표현은 나와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에 놓여있으며 완전한 신뢰 속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닐까요? 그녀가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전적으로 의지하고 전적으로 사랑하기에 이런 표현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갔지만,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그분이 이미 세상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내가 믿어야 할 제 주님인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믿음이란 완전한 100% 여야 합니다. 우리 믿음은 대체로 다 100%에 못 미치기 사실은 믿음이라 부르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너희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산을 이리 저리로 옮길 수 있을 거라고(마태 17:20) 말씀하시는 것이죠. 제가 보기에 그녀는 100% 아니 그 이상으로 집중해서 주님께만 향합니다. 그저 누가 부르니까 따라 부르는 주님이 아니라 크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속해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살아간다는 믿음의 표현인 듯합니다. 누가 뭐래도 예수는 변함없는 나의 예수, 나의 그리스도, 나의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는 우리 각각의 영혼에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다가오시며 그렇게 만나시길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내 주님으로 부르고 고백할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이렇게 마리아가 천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좀 정신을 차리게 하신 다음, 이제 주님이 직접 오십니다.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죠. 너무나 낯익은 목소리였겠죠. 익히 들었던 그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몸을 확 돌리자 거기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아니 선생님!” 하고 너무 놀라 외마디 소리를 쳤겠지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지상의 한 인간에게 그 실체를 드러내는 인류가 경험한 가장 놀라운 신비한 순간입니다. 예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당신의 몸의 특징도 알려주십니다. 이 몸은 곧 하느님께로 올라갈 몸이니 자신을 붙잡지 말라고 하시지요. 이는 부활한 몸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무엇인가 인간과 다른 하늘의 몸임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다른 형제들” 즉 다른 남성제자들에게 내가 부활했으며 곧 하느님께 올라간다고 전하라는 증언자의 사명을 주십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부활사건의 온전한 마침표일 것입니다. 실제로 다른 남성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처럼 애도하지 않았고, 유다인들이 잡으러 올까봐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숨어있었습니다(요한 20:19).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이 잘못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은 진정한 애도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다 아시고 계셨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도 아무에게도 이를 알리지 않는다면, 이것은 없는 일이 됩니다. 만일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비밀로 부치라고 하셨다면, 인류에게 영원한 비밀로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로 하여금 부활의 증언자가 되게 하셔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하심으로 예수 부활의 첫 사건은 완료됩니다. 여러분, 교회란 무엇인가요?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하느님이 모든 생명의 창조주이시며, 하느님의 끊임없는 용서와 사랑에도 불구하고 죄를 거듭하는 인간들을 위해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보내주심으로서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와 이토록 생생하게 부활을 목격하고 증언한 막달라 마리아는 교회와 신앙의 역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하고 영원한 기초를 놓은 사람입니다.

나가며

우리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를 원하고 그러리라 믿지만 그것이 끝내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때로 나의 ‘노오력’, 다른 사람들과 어떤 힘들이 나를 도와 줄 수는 있지만, 궁극적인 해결과 구원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절망에 빠지곤 합니다. 오래전 3.8. 여성들의 외침은 아직도 여전히 완성을 향해 가야만하는 미완의 외침으로 남아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자유와 정의, 평등을 이루기 위한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운동의 역사도 세기를 넘었지만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있고 외쳐도 아직도 잘 들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성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가부장제는 결코 하느님의 창조물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 특히 남성인간의 본성에 달라붙은 욕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한 발명품입니다. 따라서 가부장제는 성서적 의미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힘으로서의 ‘악’이라고 보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가부장제라는 악은 어디에나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세상에도, 교회에도, 심지어 성경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한분 하느님 안에는 가부장제도 성차별도 없습니다. 그 분은 완전한 사랑이며 온전한 빛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져야 합니다. 세상의 일은 세상에 외치고,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에게 외쳐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천년 전에 예수를 극진히 사랑하고 온전히 믿었던 뛰어난 제자로 살았던, 가부장제에 의해 삭제되고 왜곡되었지만, 결국 우리에게 드러난 막달라 마리아의 삶을 다시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죽음 앞에서 터져 나온 애도의 고통과 오직 예수만을 찾는 믿음을 뚫고 부활은 찬란하고 영원한 빛으로 옵니다. 이 사순절에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피흘리는 나의 고통, 여성들의 고통, 그리스도의 고통을 가슴에 새깁니다. 고통은 늘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깊은 고통 없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음을 오늘 성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배웁니다.

(대한성공회 표기법에 따라 '하느님'으로 표기한다._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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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우 막달라 마리아 종신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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