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그 그로즈(George Grosz)의 신즉물주의 작품과 ‘프로테스탄트’ 미술 2
게오르그 그로즈(George Grosz)의 신즉물주의 작품과 ‘프로테스탄트’ 미술 2
  • 신사빈 박사
  • 승인 2022.03.07 09: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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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신사빈 박사

(지난 호에 이어, 1부 링크)  게오르그 그로즈(George Grosz)의 신즉물주의 작품과 ‘프로테스탄트’ 미술 - 가스펠투데이 (gospeltoday.co.kr)

그런데 탁자 위를 보면 뜬금없이 눈을 가린 당나귀가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유에 담긴 여물을 먹고 있는데, 여물을 자세히 보면 무슨 종이처럼 보인다. 바로 신문이다. 당나귀는 말하자면 국민을 비유한 것이고, 국민이 매일 받아먹고 있는 여물은 언론의 거짓 신문기사들이다. 거짓 언론에 세뇌되어 진실을 보지 못하는 국민을 화가는 눈을 가린 당나귀로 그리며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탁자 아래에는 감옥에 갇혀 신음하는 사람의 얼굴과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보인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볼 수 있는 거짓과 진실의 세계처럼, 탁자 위의 세계는 거짓의 세계지만 안락하고, 탁자 아래의 세계는 진실이지만 참혹하다. 투옥되고 쫓겨다녀야 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화가는 쇠창살 뒤에 갇힌 이의 얼굴을 유일하게 온전한 사람의 얼굴로 그리고 있다. 반면 탁자 위 사람들의 얼굴은 부재하거나 흉칙하게 그림으로써 거짓과 진실의 두 세계를 대조시키고 있다. 탁자위 얼굴없는 사람들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같은 해에 제작된 <사회의 기둥들>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있다.

게오르그 그로즈 <사회의 기둥들> 1926년. 베를린 신국립미술관. 독일

그림을 보면 사회의 네 기둥을 대표하는 엘리트들이 각각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희화화(戲畫化)되어 있다. 앞에서부터 법조인, 언론인, 정당 정치인, 성직자가 차례로 그려져 있다. 맨 앞의 법관은 독일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기병대 제복을 입고 있으며 넥타이에 그려진 나치의 갈고리 십자가는 그가 나치당의 기수라는 것은 말해주고 있다.

일차대전 이후 독일에 출몰한 극우 민족주의와 이것을 표명하며 새롭게 부상한 나치당을 대변하는 자가 법관인 것이다. 그의 뺨은 칼자국으로 흉하게 일그러져 있고 귀는 없고 불투명한 맹인용 안경을 쓰고 있다. 진실을 판결해야하는 법관이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민족주의자, 군국주의자인 것이다.

이를 강조하듯 잘려나간 두뇌 부분에는 말 탄 기사가 그려져 있는데, 그가 제1차 세계대전때 기병대 장교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손에 든 맥주와 펜싱검은 전쟁에 대한 그의 갈증을 표현하는 사물이다. 그 다음 비판의 대상은 언론이다. 법관 왼쪽에 신문과 연필을 쥐고 있는 자가 보이는데, 바이마르 공화국의 극우 민족주의자이자 언론재벌이었던 알프레드 후겐베르크(Alfred Hugenberg, 1865~1951)이다.

그는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고 히틀러가 정권을 잡는데 크게 협조한 자이다. 평화의 상징인 종려나무 잎을 들고 있지만 그 위에 묻어있는 피는 그 평화가 거짓임을 말하고 있다. 그의 머리를 덮고 있는 요강은 거짓언론의 무책임을 비판한 풍자적 표현이다.

그의 오른쪽에는 독일 국기를 든 정치인이 그려져 있다. 그의 가슴팍 인쇄물에는 “사회주의는 일자리이다”(Sozialismus ist Arbeitsplaz) 라는 사회민주당의 정당 구호가 적혀있다. 그러나 그는 정작 노동자파업을 탄압한 자였고, 이 위선을 암시하듯 잘라진 두뇌 부분에는 배설물이 그려져있다. 마지막 비판 대상은 종교계이다.

그림의 맨 위를 보면 열렬히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설교하는 성직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정작 뒤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화염과 학살에는 등을 돌리고 눈을 감고 있다. 세상은 군국주의와 민족주의의 이념하에 폭력이 자행되고 있는데 이를 외면하는 교회의 위선적인 태도를 폭로하고 있다.

화가는 이들 모두를 술에 취해있는 모습으로 그림으로써 엘리트 사회지도층의 비상식적인 행태를 희화화고 있다. 위의 두 작품에서 게오르그 그로즈는 나치당과 히틀러정권이 들어서기 전 독일 사회에 팽배해 있던 선동적 이념과 물질과 타협한 지도층의 부패한 모습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있다.

진실을 보도해야 하는 언론, 정의과 공정을 실현해야 하는 정치와 법조계, 진리를 담지하고 있는 종교, 이들이 모두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에 군국주의와 파시즘, 민족주의를 체화한 히틀러 같은 비상식적 인물이 정권을 잡기에 이른 것이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담지하고 있는 미학의 영역이다. 이것이 예술과 사회과학의 다른 점이다. 사회를 비판하는 미술작품이라도 그 안에는 “아름다움”이 내재한다. 그러나 그로즈의 두 작품은 예쁜 꽃 그림도 아니고 숭고한 자연경관도 아니며 이상적 비율로 그려지지도 않았다. 어떻게 보면 추하다. 추(醜)함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틸리히가 ‘프로테스탄트’ 미술이라고 말하는 신즉물주의 작품에서 아름다움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필자 역시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되내였고 나름 답을 얻기까지는 적지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답을 얻은 것은 그림 자체에서가 아니라 그림 밖의 현실 세계에서였다.

스스로 “세계-내-존재”가 되어 얻은 답은 아름다움이란 눈에 보이는 화려함이나 그럴듯함, 근사해 보이는 가짜의 허상이 아니라 은폐된 악의 구조, 그 진실을 투시할 수 있는 맑은 눈에 담겨있다는 것이었다. 세상 안에서 악의 구조를 함께 돌리고 있으면 맑은 눈은 결코 얻지 못한다.

그 구조에서 벗어날수록 눈은 더욱 맑아지고 구조를 통째로 통찰하기에 이른다. ‘사회비판’은 그 맑은 눈에서 생겨나고, 아름다움은 이때 발현된다. 그러나 아름다움이 폭로하는 현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답지 않다. 흉하고 우쓰꽝스럽다. 물질과 돈이 지배하여 혼탁하다. 그 혼탁함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 즉 사랑의 질서를 가리고 있다.

대낮인데도 어둡다. 그런 세상에서는 히틀러같은 인물이 평화 대신에 전쟁을 주장해도, 법이 무법을 일삼아도 무감각하다. 언론이 진실을 왜곡해도, 잘못된 정보를 일용할 양식처럼 받아먹어도 국민들은 그러려니 한다. 게오르그 그로즈의 두 작품은 그런 혼탁한 세상을 근원적으로 통찰하게 하는 미학적 계기를 마련해준다. 작품의 외관은 추하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통찰한 화가의 맑은 눈은 아름답다.

이제 우리는 틸리히가 독일의 신즉물주의 미술을 왜 프로테스탄트 미술이라고 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로즈의 그림을 ‘계기’로 우리는 혼탁한 세상에서 통용되는 그럴싸한 가짜,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의 허상을 식별하고 판단(Ur-teilen)하고 비판할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다. 프로테스탄트 미술은 그러한 미학적 ‘가능성’으로 우리 앞에 열려있는 미술이다.

기존의 종교화처럼 성스럽고 숭고해보이지는 않지만 “더 큰 종교적 표현력”(틸리히)으로 우리를 거짓으로부터 진실로, 허상으로부터 실재로, 탁함으로부터 맑음으로 ‘돌아서게’ 한다. 이것이 그림을 통해 일어나는 “회심”이 아니겠는가.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티즘은 사회 ‘비판’과 ‘저항’의 정신으로 새로운 미술들이 산출되는 데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용해왔다. 기존의 가톨릭 성화는 비신성화(de-sacralized)되고 세속적 일상적 차원에서 인간 현실의 리얼리즘(Realism)을 담은 비판적 그림들이 수백년간 꾸준히 산출되어왔다.

현대신학은 그 루트를 발굴하고 탐구해야 한다. 그것이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망각하고 있는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길이고, 참됨(眞)과 선함(善)에 기초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길이다.

게오르그 그로즈는 혼탁한 시대에 맑은 눈을 지닌 아름다운 예술가였다. 그래서 히틀러같은 허상이 우상으로 등극한 부패한 사회시스템을 통찰했고 그림으로 강하게 비판하였다. 히틀러와 나치당이 정권을 잡자 그는 즉시 망명을 떠나야했고, 며칠후 그의 아틀리에는 게슈타포에 의해 파괴되었다. 독일은 아직도 그때 자행된 역사의 원죄를 짊어지며 살아가고 있다.

게오르그 그로즈의 <일식>과 <사회의 기둥들>이 “고전”(classic)인 것은, 1920년대 독일의 상황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든 사회의 구조적 악이 출몰하고 강화되는 상황에서는 ‘보편적’ 메시지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진리는 보편적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게오르그 그로즈의 두 작품은 진리이며,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을 가리켜 정의한 “진리의 자기정립” (Sich-ins-Werk-setzen der Wahrheit)에 충분히 부합된다. 그 진리는 ‘지금’ ‘여기’ 우리의 현실에서도 분명 어떤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다.

신사빈 박사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의 신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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