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목회’라는 강력한 무기를 지닌 김의식 목사(2) …그가 가는 곳마다 어둠이 떠나고 치유역사가 일어나다
‘치유목회’라는 강력한 무기를 지닌 김의식 목사(2) …그가 가는 곳마다 어둠이 떠나고 치유역사가 일어나다
  • 엄무환 국장
  • 승인 2022.02.22 13: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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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교인들은 “네가 목사냐?” “X새끼 같으니라고...” “목회를 계속 할 수 있을 줄 아느냐?” “제 명예 죽을 줄 아느냐?” “네 배에는 칼이 안들어갈 줄 아느냐?” “아파트 문에 다이너마이트 폭파 장치를 해놓았으니 나올 때 콩가루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협박하기까지 했다

미국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 제4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셨잖습니까. 이민목회 어떠셨습니까.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는 52년 역사의 시카고를 대표하는 장로교회다. 시카고에서 가장 오래되고 초창기에는 400여 명까지 모일 정도로 가장 큰 교회였으나 제가 가서 보니까 교인 60여 명만 남아 있었다. 남아 계시는 권사님들이 푸념 삼아 “알곡은 다 날아가고 우리 같은 쭉정이만 남아 있어요!” 하시기에 “쪽정이는 다 날아가고 알곡만 남아 있는 거예요.”라고 위로해 드렸다. 그렇게 시작된 이민목회는 ‘잃은 양 찾기’에 주력한 끝에 1년 만에 200여 명이나 출석할 정도로 교회가 부흥했다. 그때 시험이 찾아왔다. 성전이 흑인 슬럼가에 있어서 백인 동네로 이사가자는 의견이 교인들 사이에 대두되면서 시카고 내에 있는 조그만 한인대학을 구입할 것인가 아니면 시외에 있는 미국 침례교회를 구입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 차이로 교회가 둘로 나뉘어졌다. 이럴 때 담임목사로서 교인들의 뜻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7:3 정도의 지지로 시카고 케이스 대학을 구입하여 이전하기로 공동의회에서 결의하였다. 그런데 자신들의 뜻을 이루지 못한 두 장로님과 집사들이 이상한 말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전에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이상현 교수님의 소개로 설교목회를 했던 펜실베니아 주 해리스버그교회에 다니던 국제결혼을 한 여집사님이 이혼 상담차 시카고에 찾아와서 여행사를 하던 우리 교회 집사에게 자신이 묵을 숙소를 소개해 달라고 한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그 집사가 그 사실을 왜곡해서 말하는 바람에 교회가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문제를 일으키는 교인들에게는 어떤 해명도 통하지 않아 매일 눈물 속에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했더니 모든 교인들이 저를 신뢰하고 지지해주어서 극소수의 반대자들이 코너에 몰리고 말았다. 결국 열 가정 정도가 전에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에 올 때 청빙경쟁이 되었던 목사님을 모시고 아가페교회를 개척해 나갔다. 그런데 부디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잘하길 기도했는데 그들이 몇 년 뒤에는 또다시 교회에서 분립되어 임마누엘교회를 세웠다.

인터뷰중인 김의식 목사
인터뷰중인 김의식 목사

한국에 돌아온 후 세월이 많이 흘러 당시 저를 배척했던 장로님이 은퇴하신 후 한국에 귀국했다가 저와 화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임마누엘교회의 부흥성회에 초청을 받고 나서 장로님들과 집사님들과도 지난날을 다 용서하고 화해하며 큰 치유의 은혜를 나누게 되었다.

이처럼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는 한 차례 홍역을 치른 후, 성전을 리모델링하고 성전 이전을 하여 다시 계속 부흥하였다. 그리하여 장년 출석 300명, 학생 출석 100명 합해서 400여 명 출석하는 옛 영광을 회복한 후 5년4개월이라는 적지 않은 세월동안 수많은 사건과 치유를 온몸으로 경험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청빙을 받아 한국으로 돌아왔다.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 교인들이 목사님을 붙잡았을 것 같습니다.

-맞다.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에서 4년쯤 됐을 때인 1996년 6월 1일 시카고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Ph.D.)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표를 냈는데 교인들이 평생을 함께하길 간절히 바랐기에 처음 당회에 사임서를 냈을 때 거절당했다. 두 번째 다시 사임서를 냈을 때 장로님들이 더이상 거절 못하고 “목사님이 꼭 가고 싶으시면 제직회 허락을 받고 가세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제직회를 열었더니 여기저기서 사임 반대 의견들이 터져 나왔다. 가까이 지내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의 발언은 충분히 이해되었지만 그동안 목회를 힘들게 하던 집사님들도 “목사님, 우리가 목사님 처음 오셨을 때 힘들게 해드렸는데 이제 은혜받고 열심히 하려는데 양 떼를 버리고 떠나는 목자가 어디 있습니까?” 하면서 붙잡는 것이었다. ‘이렇게 붙잡을 것 같으면 진작 잘해 줄 것이지...’ 하는 야속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궁리 끝에 1년간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 “하나님께서 1년 동안에 저의 마음을 바꿔 놓으시면 제가 이곳에서 뼈를 묻고, 만약에 저를 한국으로 보내길 원하시면 그때는 저를 선교사 파송하는 심정으로 보내주십시오!” 그렇게 그날 제직회는 끝이 났다. 그런데 1년을 기도해도 나의 마음을 계속 한국으로 달려갔다. 결국 1년 뒤에 다시 제직회로 모였다. “제가 아무래도 한국으로 돌아가야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카고를 떠나왔다.

어느덧 25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제 마음속에 첫사랑의 그들을 잊을 수가 없다. 평생 잊지 못할 양 떼들이요, 첫 담임목회의 너무도 소중한 동역자들이었다. 지금도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나와서 마지막 환송 인사를 나누며 눈물 흘리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을 잊을 수가 없다. 아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장신대 교수가 되셨습니까?

-귀국이 1년 밀리는 바람에 결국 장신대 교수의 꿈이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최고의 삶을 예비하고 계셨다. 1년 동안 위스콘신 주 밀워키에 계신 단기가족치료센터의 김인수 박사님을 통해 7년여 유학 생활을 마무리하는 하나님의 크신 선물을 받았다. 실제 해결중심 단기가족치료는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만능열쇠와 같은 것이었다. 저는 미국 문화의 배경 속에서 만들어진 치료 질문들을 우리나라 문화 배경에 맞추어 수정하여 재정립하였다.

장신대 교수의 꿈이 좌절된 이후의 삶이 매우 궁금해지네요.

-호남신학대학교(이하 호신) 황승룡 총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희 호신에 오셔서 가르쳐 주십시오!”라며 간곡하게 권유하셔서 1998년 1월부터 호신의 조교수로 부임했다. 그리고 한신대 목회상담학과 정태기 교수님의 배려로 1997년 3월에 설립된 크리스찬치유상담연구원에서 그해 9월 2학기부터 수업을 시작하였다. 그 후 2014년 교육부에서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로 인가가 나고 200여 명의 대학원(석사 과정) 학생들이 배우는 거대한 치유상담 전문 교육기관으로 발전했다. 3년 전 정태기 총장님으로부터 총장직을 맡아 달라고 하셔서 완곡하게 거절했다가 매년 부탁을 하시기에 지난해 1월 22일 제3대 총장으로 청빙을 받았고, 2월 28일 치유하는교회 당회가 만장일치로 허락하여 8월 30일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의 제2대 정태기 총장님을 이어 제3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치유하는교회 예배 광경
치유하는교회 예배 광경

치유하는교회 얘기 좀 해주시죠. 하실 말씀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2000년 6월 11일 화곡동교회(현 치유하는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부임하기 전 한 안수집사님이 교회를 비난하며, 화곡동교회에 오면 다치니까 오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A4용지로 10여 페이지를 보내왔다. 그런데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의식(義植)이라는 이름 그대로 누가 불의하게 압력을 가하면 더욱 드세게 일어서는 의식(意識)이 있었다. 그래서 ‘얼마나 시끄럽기에 이렇게 오지 말라고 압력을 가할까?’ 하는 궁금한 마음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런데 화곡동교회에 막상 와서 보니까 장난이 아니었다. 당시 화곡동교회의 문제는 이러했다. 김학만 원로목사님이 출석교인이 200여 명 되던 교회에 부임하셔서 24년 2개월 동안 2,000명에 가까운 교회로 뜨겁게 부흥시키시면서 목회를 너무도 훌륭하게 잘 마치셨다. 그런데 은퇴를 2년 앞두고 장로 불법선거 시비에 휘말리셨다. 총회재판국 판결대로 사실 문제삼을 것이 없었지만 그러나 시비를 걸면 문제가 되었다.

또 다른 문제는 제가 부임하기 한 주 전에 문제가 되었던 관리집사들을 해고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이 일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그리하여 당회가 양분되어 극심한 분쟁 가운데 있었다. 저는 과거는 다 지나갔고 이제라도 서로 간에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해해서 화평한 교회를 회복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그러나 사단은 결코 교회가 평안한 것을 바라지 않았다. 관리집사들은 끝내 당회의 화해의 손길을 거부하고 민주노총에 가입하여 투쟁의 길로 나섰다. 그리고 기독노조를 설립하여 교회와 대립하였다. 화곡동교회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 노조가 생겨난 것이다. 교회는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에 감사하면서 구원하고 치유하고 봉사하고 선교하는 곳이지 자신의 감정이나 명예나 이익을 내세우는 곳이 결코 아니다. 이 사건에 대해 대법원은 “교회 직원은 노조원이 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의 분쟁이 당회로부터 두 편으로 갈라져서 대립하여 6년 7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그래서 당회나 제직회나 공동의회가 있는 주일은 교회에 나가기가 싫었다. 심한 욕설과 몸싸움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사가 주일에 교회 가기가 싫을 정도라면 얼마나 힘든 상황이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어떤 교인들은 “네가 목사냐?” “X새끼 같으니라고...” “목회를 계속 할 수 있을 줄 아느냐?” “제 명에 죽을 줄 아느냐?” “네 배에는 칼이 안들어갈 줄 아느냐?”는 등 갖가지 폭언으로 위협했다. 심지어 어떤 교인은 새벽 1시든, 2시든 상관없이 목사 사택에 전화를 해서 “아파트 문에 다이너마이트 폭파 장치를 해놓았으니 나올 때 콩가루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협박하기까지 했다. 그날 이후부터는 새벽기도 나갈 때 아내에게 꼭 먼저 나가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놓으라고 했다. 어떻게라도 살아남아서 교회를 치유하고 회복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사명(?)을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화곡동교회에는 고소의 달인(?)들이 많았다. 자신들의 뜻대로 따라 주지 않는다고 계속해서 고소를 해댔다. 그래서 매주 경찰, 검찰, 법원, 노회재판국, 총회재판국에 나가는 것이 주례 행사였다. 그래서 심근경색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오기도 했다.

이렇게 길고 험난했던 54건의 고소가 끝난 지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너무나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세월이었다. 당시에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십자가를 붙잡고 믿고 의지할 분은 주님밖에 없으니 주님만 바라보며 치유목회를 계속해서 해나갔다. 그랬더니 교회 안에 성령의 불이 붙기 시작했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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