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상위 5%의 양복기술 명장 이동만 장로의 성공비결... ‘감사의 삶’
대한민국 상위 5%의 양복기술 명장 이동만 장로의 성공비결... ‘감사의 삶’
  • 엄무환 국장
  • 승인 2022.02.17 09: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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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억에 남는 고객은 ‘한경직 목사님’... 92세까지 양복 지어 드렸죠”
가정형편 어려워 들어갔던 미션스쿨...양복 일 하던 친형들 도와 심부름하며 일 배워
상경하는 아들 손에 성경 꼭 쥐어주신 어머니...개업 꿈 품고 호랑이 선생님께 배움 자청
양복 일 50년·개업 33년...감사의 삶으로 ‘대한민국 상위 5%의 양복기술 명장’ 반열에

우리나라 상위 5% 안에 드는 사람들의 명품양복 만드는 일을 자신에게 주어진 업(業)으로 알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가 있다. 양복 기술 명장이자 체스타필드 강남점 대표인 이동만 장로(광야교회)가 그러하다.

이 장로는 어떤 연유로 양복 만드는 일을 하게 됐을까. 그리고 어떻게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

이 장로의 삶을 들여다보노라면 부모님의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하나님이 그를 통해 영광받으시기 위해 어떻게 삶 가운데 보이지 않는 손으로 간섭하시는지를 알게 된다.

이동만 장로
이동만 장로
채스타필드 강남점 외부 전경
채스타필드 강남점 외부 전경

우연찮은 사건 하나가 인생을 바꾸다

1955년 9월 2일 전북 김제시 죽산면 종신리 종남부락에서 3남 1녀(형2, 여동생1) 가운데 셋째 아들로 태어난 이동만 장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이 장로는 7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간디스토마로 세상을 떠나심으로 가정경제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졸지에 가장이 되신 어머니는 그러나 믿음으로 혹독한 고생들을 감내하시며 자식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하셨다.

“어머니께서 막내아들인 저만큼은 목사가 되길 원하셔서 김제에 있는 미션스쿨인 고등공민학교(중학교)로 진학하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고등공민학교를 택한 또 다른 이유는 가정형편이 어려워서였습니다”

당시 이 장로의 첫째 형은 서울에서 양복 일을 했고, 둘째 형은 고향인 죽산에서 에덴양복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장로도 자연스럽게 양복 일을 돕는 심부름을 하게 된다.

“제가 한 일은 양복 만드는 원단과 부자재 심부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장로의 삶을 뒤흔든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한 달 결재금을 받아 형에게 전달하기 위해 가는 중에 나쁜 선배에게 돈을 전부 빼앗겨버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 장로 어머니가 이 장로에게 자신의 몸 정도는 자신이 지킬 줄 알아야 한다며 태권도를 배우라고 권면하셔서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그때부터 공부에 점점 흥미를 잃어 검정고시를 볼 여력이 안되어 고등학교 진학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십일조 헌금 훈련이 올곧은 신앙인으로 세우다

고등학교 진학을 못한 이 장로는 17살 때 서울로 상경하여 양복점을 하고 있는 큰형을 찾아간다. 이때 이 장로 어머니가 이 장로 손에 성경 찬송가를 쥐어주시며 이런 당부를 하셨다.

“어머니께서 제가 취직을 하게 되면 십일조는 고향의 본교회로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십일조가 매달 본교회로 잘 오면 막내아들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구나 생각할 수 있고 십일조가 끊어지게 되면 신앙생활과 멀어졌다고 생각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상경하여 취직 후 십일조를 본교회로 꾸준히 보내다보니 어머니께서 저를 신뢰하시고 ‘이제 네가 서울에서 출석하는 교회에 십일조를 하여라’ 말씀하시더군요. 그리고 막내아들이 매달 십일조를 꾸준히 보내는 것을 보니 어머니 품을 떠나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서 안심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만남을 통해 나타난다

어머니의 신앙훈련으로 어릴 때부터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한 이 장로의 삶을 하나님께서 어찌 침묵하실까. 하나님의 역사는 만남을 통해 나타났다.

“처음에는 심부름으로 시작하여 바지 만드는 선생님 보조를 하다가 바지를 직접 만들게 되었고, 다음으로 자켓 만드는 선생님 보조를 하다가 자켓을 직접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기술습득이 되어야 재단 기술을 배울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979년도 말에 이 장로는 마침내 재단 기술을 배우기 위해 공장에서 매장으로 내려가게 된다. 당시 체스타필드 양복점은 본점 외에도 신라호텔점, 워커힐호텔점, 소공동점, 광화문점 총 4군데의 프렌차이즈 지점이 운영되고 있었다.

“저는 꼭 본점에 취직하겠다 다짐하며 기다리던 중 드디어 체스타필드 본점의 가장 훌륭한 재단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의 선생님은 아주 무섭기로 소문나고 호랑이같은 성격을 가지셔서 그 선생님 밑에서 2년을 버틴 제자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저는 ‘내가 35살(1989년)이 되는 해 가을에 꼭 양복점을 개업할거야’ 하는 목표를 마음에 품고 무섭기로 소문난 호랑이 선생님께 배움을 자청했습니다”

자신의 사업장을 갖겠다는 목표를 마침내 이루다

이 장로가 양복 만드는 기술을 갖추자 여러 양복점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 받고있는 월급의 곱을 준다는 제의도 있었지만 그러나 이 장로는 자신의 사업장을 갖겠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모두 거절했다.

“선생님께 재단기술을 배우기 시작해 9년이 되던 해인 1989년에 마침내 개업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원래 그해 가을에 개업하려고 계획했는데 6개월이나 시기를 앞당긴 3월에 오픈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1989년 3월에 개업한 체스타필드 강남점은 33년의 세월이 흐른 2022년 2월 현재까지 서울 강남구 언주로 146번길 동현아파트 정문 앞에 자리를 잡고 있다.

“17살 때 양복일을 시작했으니까 양복 일은 50여 년, 제 가게를 오픈한 지는 33년이 되었네요. 처음 양복을 함께 시작했던 대부분의 동료들은 현재 양복업을 떠나 다른 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동만 장로의 삶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 장로가 양복업에 발을 내디딘 후 50여 년 동안 조금도 옆눈질하지 않고 지금까지 올곧게 걸어온 이유가 있다면 뭘까. 그리고 쉽지 않은 양복업 가게 운영의 성공적인 비결은 뭘까.

“제가 지금까지 경쟁력있는 양복점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건강을 지키는 것과 양복일 만큼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희 가게 계좌번호도 모르고 십일조 액수가 얼마인지도 모릅니다. 결재하는 것 등 다른 것들은 그 누구라도 해줄 수 있지만 양복일 만큼은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이 양복일 하나에 온 힘을 쏟았기에 지금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양복일에 자신의 전부를 올인했다는 것, 그리고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전문가로서의 실력을 갖췄다는 것.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그가 지불했을 인생의 고뇌와 쓰디쓴 눈물이 없었을까.

“처음 가게를 오픈했을 때 집에 화장실이 없어 공중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빈민가에서 가족들과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때 제가 모시던 고객들은 대한민국 최상위층 분들이었습니다. 출근하면 고객 출장을 위해 그 당시 최상위층이 모여 살던 성북동을 자주 방문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퇴근할 때는 빈민가로 퇴근을 하는, 말하자면 낮에는 최상위층 밤에는 빈민가였던 셈이지요. 하지만 저는 이러한 환경을 탓하지 않고 이런 삶에서도 감사할 점이 있다며 감사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장로의 고백처럼 이 장로의 삶을 통해 전달되는 메시지는 “감사하는 삶”이다. 이 삶은 부부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아내와 단 한 번의 다툼도 없었습니다. 저는 1남 2녀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첫째 딸(40세)과 둘째 딸(36세)은 결혼해서 출가했고, 셋째인 아들(30살)은 저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묵묵히 희생만을 감내한 아내 덕분이라고 항상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너무 고맙고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이 장로 부인인 이은자 권사(63)는 불교 가정에서 장녀로 태어나 이 장로를 만나기 전 이미 순복음교회에서 세례를 받아 신앙의 삶을 살고 있었다.

양복일을 하나님이 주신 천직(天職)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인생을 올인한 이동만 장로. 그는 감사의 삶으로 부부관계는 물론 마침내 대한민국 상위 5% 안에 드는 사람들의 양복만드는 기술 명장의 반열에 우뚝 섰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명찬)은 국가공인 양복기능사로 아버지의 업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양복명장 간판
한국양복명장 간판
이동만 장로(양복 명장)와 아들 이명찬(국가공인 양복기능사)
이동만 장로(한국 양복 명장)과 아들 이명찬(국가공인 양복기능사)
이동만 장로 가족
이동만 장로 가족

사회적으로도 빛이 난 이동만 장로의 삶

이 장로의 이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회적 활동도 대단해서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2007년 명지대학교 크리스찬 최고경영장과정 수료

2013년 경기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1998년 제13회 한국남성복기술경진대회 대상 노동부장관상 수상

2006년 국제라이온스 354D지구 무궁화사자 대상 금장 수상

2006년 국제라이온스 354D지구 삼성 라이온스 회장

2011년 국가기술자격검정 심사위원(산업인력공단)

2011년 지식경제부 장관상 수상

2012년 (사)한국맞춤양복협회 부산지부 감사패

2012년 싱가폴 아시아 기술경진대회 공로 금메달 수상

2012년 싱가폴 아시아 기술경진대회 기술경진대회 금메달 수상

2012년 한국 섬유패션대상 수상

2012년 국제로타리 3650지구 장원로타리 회장

2012년 (서대문관할) 북한 이탈 주민돕기 자선 음악회 주최(연세대학교 대강당)

2013년 한국 패션브랜드대상 수상

2013년 국제로타리 3650지구 총재 표창 수상

2013년 2013 한국을 이끄는 혁신리더 선정

2013년 뉴스메거진 보도

2013년 제35차 세계주문양복연맹총회 기술경진대회 금메달 수상

2014년 국제로타리 3650지구 총재 표창 수상

2014년 (사)한국맞춤양복협회 제23대 회장 취임

2014년 일본 아시아주문양복연맹총회 한국 대표단 단장

2014년 2014 소상공인기능경진대회 대회장

2015년 국회의장 표창 수상

2015년 핀란드 세계주문양복연맹총회 한국 대표단 단장

2015년 2015 소상공인기능경진대회 대회장

2015년 소상공인방송 ‘공감’ 출연

2016년 소상공인연합회 감사패

2019년 (사)한국맞춤양복협회 한국양복명장 선정

2019년 제38차 이태리 세계주문양복연맹총회 및 세계대회 심사위원 위촉

2020년 (사)한국맞춤양복협회 금익장 수상

2020년 인물지식가이드저널 WEEKLY PEOPLE 보도

2020년 NEWSMAKER 보도

2021년 2021 한국을 이끄는 혁신리더 선정

정말이지 눈이 부실 정도의 이력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장로 삶에 간섭하신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빛이 나는 인생 말이다.

이태리에서 각국 심사위원들과 함께 한 이동만 장로
이태리에서 각국 심사위원들과 함께 한 이동만 장로

하나님께서 빚으신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지...

이와 같은 삶을 살아낸 이동만 장로의 삶엔 숨어 있는 비결이 또 있다.

“저는 성경 속 인물들을 보면서 제 삶에 접목하기를 시도했습니다. 즉 아브라함과 롯을 통해 아브라함의 공정성을, 가인과 아벨을 통해 진정한 제사(예배)를, 노아를 통해 인내를, 다윗을 통해 복수하지 않는 것을 제 삶에 접목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행하는 것이 최고의 경쟁력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인지 옳지 않은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장로가 마음에 품고 있는 확신이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제 때에 미리미리 준비해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지식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비교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장로에게 늘 묵상하는 성경 말씀이 뭐냐고 물었더니 세 가지를 들었다.

“내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11장 40절) /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장7절) /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야고보서 2장 17절)”

이런 이 장로의 삶을 보며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있다.

“평소 저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영접한 분이 계십니다. 김진업씨라고. 그분이 65세 때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이 장로가 만든 양복을 입은 고객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고객이 누구냐고 물었다.

“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목사님은 한경직 목사님이십니다. 제가 만든 양복을 입으시고 설교하시며 목회하시는 모습을 볼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한경직 목사님은 92세 때까지 제가 양복을 지어드렸습니다.”

이와같은 이동만 장로의 신앙간증적 삶이 방송을 통해 소개된다. 2월15일 오전 11시와 2월16일 오후 3시에 방송된 C채널 ‘힐링토크 회복플러스’를 통해서다. 그리고 2월21일부터는 유투브에서 ‘힐링토크 회복플러스 이동만’을 검색하면 시청할 수 있다.

양복업에서 뿐 아니라 가정사역과 사회활동에서도 명장의 반열에 선 이동만 장로, 그를 만나면 하나님께서 빚으신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지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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