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데겔설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달의 데겔설교] 말씀이 육신이 되어
  • 홍상태 목사
  • 승인 2021.12.22 12: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22년 1월 2일 성탄절 후 둘째 주일
요한복음 1장 (1-9) 10-18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사람의 몸에 부어 넣으셨다. 픽사베이 이미지.

목회적 관점

이 경이로운 말씀은 요한복음 전체에 대한 심오한 신학적 논쟁을 제공하고 요한복음의 주요 주제 대부분을 소개한다.

처음에는 이 말씀을 특별히 목회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사항으로 여기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아 보이겠지만, 크리스마스라는 상황은 예배와 성경공부를 위해 모인 사람들의 신앙과 경험에 중요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실제로 이 본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함으로 크리스마스 메시지의 핵심을 말해 준다.

“베들레헴의 아이는 누구이며, 왜 우리가 그의 탄생에 신경을 써야 하는가?”

성탄절기에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와 특히 예수와 사소한 부분에서 일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온 사람들은 위에서 한 일반적인 질문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되풀이한다. 12월 마지막 날과 1월의 첫날에, 예배에 모이는 대부분의 예배자는 축제 때문에 혹은 축제가 부족해서 감정적으로 지치고, 친척들이나 멋대로 구는 사람들에 대하여, 혹은 흔적을 남기는 외로움에 대하여 이중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다.

잠깐의 휴일은 성탄절 이야기에서 수집해야 할 심오한 의미들을 모호하게 만들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을 남긴다. 여러 해에 걸쳐 쌓여 온 많은 것들이 문화적 축적물이 되어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들의 기원을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어서 수렁에 빠뜨리고 있다. 죽은 나무를 거리로 운반해야 하고, 청구서를 지불해야 하며 생활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자연스럽지만 이야기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질문이 있다. 아무튼 이 모든 게 무엇에 관한 것이란 말인가? 이 질문에 응답하면서 요한은 천둥처럼 웅변으로 외친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겨났다.”(요한복음 1:1, 3b-4,14, 17b)

요한은 이것 말고 다른 어떤 것도 규정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사람의 몸에 부어 넣으셨다. 이 영원하신 말씀은 생명 그 자체를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 안에 있는, 그리고 가장 보잘것없는 시작인 아기의 모습을 한 역설적인 겸손 안에 있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대리자다. 이 놀라운 선언은 인간의 상상력의 한계를 압도한다. 더 많은 질문이 이어진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것은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지하게 이 이야기를 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는 질문들이 표면 바로 아래 숨어 있다.

실제로 이러한 질문으로 청중들을 자극하는 것이 목회 전략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영원한 말씀의 빛을 이기지 못하는 “어둠”을 생각해 보자. 어둠은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크리스마스 시즌에 전쟁, 인간의 파괴, 탐욕, 고문, 모든 종류의 억압, 또 실존적인 권태, 우울증, 혼란, 무력감, 절망 같은 다양한 사례들을 제공한다. 이러한 모든 어둠은 영원한 말씀의 빛, 즉 선포를 듣는 모든 개인을 포함하여, 창조 질서 전체에 지속적으로 생명을 주는 생명력을 이길 수 없다.

이것은 너무나 좋아서 사실이라고 믿기 힘들만큼 멋진 희망의 메시지이다. 이 모든 “빛”이 한 사람, 예수에게 있다. 빛과 어둠을 나란히 놓은 것은 결정적인 선택을 위해 숙고하도록 촉구한다. 우리는 이 빛의 밝은 조명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가? 혹은 어둠의 힘과 결탁한 채로 남아있기를 원하는가? 창조의 능력 자체에 근거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정체성을 인정하는 데서 온다. 그를 맞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12절)를 얻게 되는 것이며, 그것은 혈통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의 문제이다.

이런 식으로 예수를 보는 것은 또한 예수의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예수를 보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을 실제로 보는 것에 가장 가까운 일이다. 이것이 요한의 주장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목회를 위한 열매가 폭포처럼 엄청나게 쏟아질 것이다. 예수가 정말로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은 육신의 존재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깊이 그리고 친밀하게 현존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물질적 존재는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물질적 존재를 축복하셨다는 절대적인 인식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역시 중요하다.

예수가 정말로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은 인간의 경험, 인간의 고통, 인간이 겪는 모든 고뇌, 가장 무시무시한 인간의 죽음까지도 공유하게 된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다음번 호흡처럼 가까이 계시고, 우리가 기뻐하는 기쁨을 축하하는 것처럼 우리가 견디는 고통을 견디신다. 바로 이 메시지가 바로 요한의 마음을 목회적으로 개입하여 사로잡고 변화시킨 진리이다. 예수는 우리의 은혜로운 동료, 친구, 구원자, 생명, 빛, 연인이다.

그러나 말씀은 생명 자체의 근원이고, 예수는 시금석이시다. 뿐만 아니라 요한이 요한복음 15장에서 포착한 것처럼, 그의 지혜라는 진리를 이해하고 살아가는 열쇠이다.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5:13) 이것은 창조 때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말씀과 동일한 말씀이고,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신 것과 동일한 말씀이다. 권능과 자기 비움, 높아짐과 굴욕의 이 역설적인 신비는 요한복음의 첫 번째 구절들에 포착되어 있는데, 기독교의 정수를 선포하는 핵심이다.

설교적 관점

요한복음 서문은 소리 내어 읽기가 어려울 수 있고, 또 지난 몇 주간 풍성한 성탄절 이야기로 설교를 들은 교인들에게 설교하기가 쉽지는 않다. 목자들, 천사들 심지어 성전 안에 있던 율법 교사들이 오늘 요한이 언급하는 빛, 영광, 은혜 그리고 진리 등이 나타내는 이미지보다 훨씬 상상하기가 쉽다.

이 용어들이 친근하기는 하지만 대부분 추상적 개념들이라 설교자는 요한처럼 현실적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본문은 예수의 인성에 초점을 맞추는데, 거기에서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본 일이 없는” 하나님이 알려지게 된다. 구약성서에서 모세와 욥 모두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하기 때문에 설교자는 이 앞서 있던 목격과 이번 것을 비교하는데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요한은 예수 안에서 말씀 (the Word)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빛, 영광, 은혜 그리고 진리가 예수 안에서 구현된다. 하나님은 이러한 신적 속성들을 보고 듣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해, 이 속성에 피부를 입혀서 그들이 그 사람을 볼 수 있게 하였다. 본문 10-18절에 의하면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아버지의 마음에 가까운” 사람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보지 못한 반면 예수는 분명히 그의 머리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알고 있다. 후에 그의 머리를 예수의 가슴에 둔 사랑하시던 제자처럼 이 아들은 그의 아버지의 심장소리를 듣는 법을 알고 있다.

설교자는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써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구현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에 초점을 맞추어 요한복음을 따라갈 수 있다. 요한은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2절)”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은 예수 혼자만이 아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간 이후에, 그는 자신이 한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형제자매를 얻게 되었다 (요14:12).

거의 모든 사람은 생명을 살리는 어떤 말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에게 그 말은 “연민”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의”일 수 있다. 또 “관용”도 될 수 있고 “인내”도 될 수 있다. 누군가 그 말들에 근거하여 행동하게 될 때 까지 그 말들은 추상적 개념 곧 거의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좋은 생각들로 남아있다. 그 말들에 근거하여 행동을 하는 그 순간 그 말들은 육신이 된다. 그 말들은 우리 가운데 있고 그래서 우리는 그 영광을 볼 수 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말들을 구체적으로 현실화한다.

많은 교인들은 복음에 나타난 모든 말들을 구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 말들 가운데 하나 혹은 두 개가 육신이 되게 해야 한다. 어느 교인들은 “환대”를 현실화하는 것을 잘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기도”를 구현한다. 누군가는 “예언자적인” 것을 현실화하고 어느 사람은 “봉사”에 피부를 입힌다 (봉사를 구현한다). 이런 교인들은 목회자가 복음을 전할 때. 목회자가 항상 말로만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목회자들도 말이 생명을 가져올 수 있도록 우리의 몸을 자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물론 교인들도 누구나 그런 것처럼 치명적인 말들도 현실화 시킬 수도 있다. “심판”은 진짜로 살인자가 될 수 있다. “바빠”라는 말도 “독선”도 그렇게 될 수 있다. 때로 여러분들이 의미하는 말을 구현하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더 악성적인 말이 새어나가도록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여러분들이 말을 제대로 사용하는지 보아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어느 주일 아침 예배 후에 한 방문자가 교회를 떠날 때 그녀의 마음에 떠오르는 첫 세 단어는 무엇인가? 설교자는 교인들에게 이 단어들이 무엇이기를 바라는지 (그리고 두려워하는 대답은 무엇인지)를 물을 수 있다.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 중 하나가 생명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은 결코 늦은 게 아니다. 요한의 시를 설명하기로 마음을 정한 설교자는 그의 문학적 천재성을 강조하게 될 것이다. 요한은 서문에 창세기의 시작부분을 다시 썼고, 처음부터 말씀을 하나님과 함께 두었다.

지혜처럼 (잠언 8:22-31을 보라) 말씀은 창조 시에 하나님의 동반자였다. 그러나 지혜와는 달리 말씀은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진정한 빛이다 (9절). 이야기의 훨씬 후반부에 군인들이 예수를 정원에서 체포하러 올 때,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올 것이다 (18:3). 요한만이 이 부분을 풍자적으로 상세히 다루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세상의 빛을 체포하러 빛을 들고 온 사람들의 무지함을 강조한다.

이번 주를 지나며 다가오는 주현절에, 이러한 방향을 따르기로 정한 설교자는 빛이 본문에는 그렇지 않더라도 교인들의 마음에는 대문자로 (Light)각인되도록 하거나 요한이 선포하는 빛의 오심이 인간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이다.

가스펠투데이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Array ( [0] => Array ( [0] => band [1] => 네이버밴드 [2] => checked [3] => checked ) [1] => Array ( [0] => talk [1] => 카카오톡 [2] => checked [3] => checked ) [2] => Array ( [0] => facebook [1] => 페이스북 [2] => checked [3] => checked ) [3] => Array ( [0] => story [1] => 카카오스토리 [2] => checked [3] => checked ) [4] => Array ( [0] => twitter [1] => 트위터 [2] => checked [3] => ) [5] => Array ( [0] => google [1] => 구글+ [2] => checked [3] => ) [6] => Array ( [0] => blog [1] => 네이버블로그 [2] => checked [3] => ) [7] => Array ( [0] => pholar [1] => 네이버폴라 [2] => checked [3] => ) [8] => Array ( [0] => pinterest [1] => 핀터레스트 [2] => checked [3] => ) [9] => Array ( [0] => http [1] => URL복사 [2] => checked [3] => )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제동 298-4 삼우빌딩 402호
  • 대표전화 : 02-742-7447
  • 팩스 : 02-743-744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상현
  • 대표 이메일 : gospeltoday@daum.net
  • 명칭 : 가스펠투데이
  • 제호 : 가스펠투데이
  • 등록번호 : 서울 아 04929
  • 등록일 : 2018-1-11
  • 발행일 : 2018-2-5
  • 발행인 : 채영남
  • 편집인 : 박진석
  • 편집국장 : 류명
  • 가스펠투데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가스펠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ospeltoday@daum.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