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호주선교사기념사업회, 호주 선교부 복원 및 기념관 건립 사업 진행 … 한국교회 부끄러운 민낯을 가리다
통영호주선교사기념사업회, 호주 선교부 복원 및 기념관 건립 사업 진행 … 한국교회 부끄러운 민낯을 가리다
  • 엄무환 국장
  • 승인 2021.12.03 2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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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헐값에 매각한 호주선교사 사택지를 수억 주고 매입…“저희가 매입하기 직전 아파트 건축업자가 이곳에 아파트를 짓겠다고 매입의사를 밝혔는가 하면 절에서 절을 지으려고 매입하려 했으나 성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저희가 갔을 때 땅 주인이 ‘진짜 주인이 왔네요. 찾아가세요.’라고 말해 마음이 아팠다.”

 

거제·고성·통영 근대문화와 교육·항일운동의 산실인 통영 호주선교부 복원 및 기념관 건립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사)통영호주선교사기념사업회(이사장 강종기 장로, 회장 서상록 목사)에 의해서다.

호주 선교사의 집-기념사업회는 이 집을 다시 복원할 계획이다
호주 선교사의 집 - 기념사업회는 이 집을 다시 복원할 계획이다

호주선교사기념사업회 수석부회장 겸 실무담당인 배영빈 원로목사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1913년에 지어진 근대신 호주 선교부 건물을 108년 만에 복원하려 한다”며 “이는 호주선교사들의 기독교 복음 전파와 함께 교육, 문화, 예술, 의료, 항일민족운동 등 다양한 분야의 자료와 기록물을 상설 전시하여 시민들과 학생들에게 역사와 민족의식, 그리고 애향 정신을 고취하고자 한다.”고 복원 사업의 목적에 대해 설명했다.

이어 “이 일은 소수의 사람들로서는 감당하기 벅찬 일이다.”면서 “100여 전 호주선교사들이 우리를 위해 헌신하였듯이 이제는 우리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협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1944년부터 1941년까지 호주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선교 활동은 거제·고성·통영 근대화의 주춧돌이 되었고, 수많은 인재를 길러내는 산파 역할을 하였다.”고 밝힌 배 목사는 “일찍이 호주선교사들에 의한 통영 최초의 근대식 교육 기관인 진명유치원과 진명학교를 통하여 공덕귀(윤보선 대통령 부인), 최덕지(신사참배반대), 김춘수, 박경리, 유치환, 윤이상 등을 배출하였다.”며 “이들은 낯설고 열악한 환경의 통영에 와서 젊음을 바치며 문명의 빗장을 열고, 근대식 교육으로 숱한 인재를 길러내었던 호주선교사의 집(양관)과 학교는 산업화와 함께 훼손되었고, 그들의 역사적 행적과 헌신적 노력도 점차 잊혀져가고 있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쳤다.

통영호주선교사기념사업회 부회장 겸 실무담당 배영빈 목사
통영호주선교사기념사업회 부회장 겸 실무담당 배영빈 목사

인명진 목사, 첫 선교사 데이비스가 한국에 온 지 6개월 만에 풍토병으로 소천하였음에도, 오히려 호주교회는 선교사들을 계속 파송하여 의료, 교육, 복지, 교회 등 다양한 선교활동을 이어갔다

호주선교사들의 통영 선교와 관련하여 (재)한호기독교선교회 이사장 인명진 목사는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의 한국 사랑은 위대하다”며 “그들의 첫 선교사 데이비스가 한국에 온 지 6개월 만에 풍토병으로 소천하였음에도, 오히려 호주교회는 선교사들을 계속 파송하여 의료, 교육, 복지, 교회 등 다양한 선교활동을 이어갔다.”고 호주 선교사들의 활동을 높이 평가했다.

인 목사는 “그런데 이러한 선교활동은 당시 호주교회가 재정적으로 풍족한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며 “미국이나 캐나다 등의 선교부에 비하면 작은 규모였다. 호주 선교사 스스로도 자신들은 베냐민 족속과 같다고 했다. 그런 가운데 호주 빅토리아교회들이 아끼고 아끼며 열심히 모금한 재정으로 부산, 진주, 마산에 이어 통영에 선교부를 설치했다. 당시 작은 항구 통영에 유독 미신이 많은 것을 보고 호주선교사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지원하였다.”고 설명했다.

인 목사는 “통영 근대사는 호주 선교부를 빼고는 완전할 수 없는 역사가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며 “통영호주선교사기념사업회가 통영의 호주선교부 유적 중에 일부나마 복원하기 위하여 노력한다니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이 일에 통영의 많은 시민단체들은 물론 교회가 협력하고 후원하기를 희망하며 꼭 결실을 맺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통영사연구회 박형균 회장,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나라 잃은 통영 청소년들에게는 이심전심의 격려였고, 마음의 의지였다."

사단법인 통영사연구회 박형균 회장은 한호선교 130주년 기념도서로 발간된 “호주선교사 에이미 스키너와 통영”(에이미 스키너 지음, 서상록·양명득 편저, 2019.4.29. 발행)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호주선교사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직접 경험한 기억을 글로 남겼다.

“19세기 말은 약육강식하는 밀림의 논리가 전 세계를 팽배하던 격동기로, 그때의 한반도는 세계열강의 각축장이었다.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벌어진 청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동학혁명이 겹쳐 일어나 더욱 몸살을 앓고 사직(社稷)은 누란(累卵)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약 300년간의 통제영이 해체(1895년)되었고, 고성군에서 독립하여 새로운 군을 설치해야 한다는 지역민의 열망이 고조되었던 시기와 맞물린다. 이 시기에 통영에는 동시에 두 개의 외래문화가 들어 왔는데 그 하나는 일본제국을 등에 업은 일제 침략 문화였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서구 문화였다. 그러나 이 두 문화가 통영에 남긴 결과는 너무나 확연히 달랐다.

내가 어렸을 때 겪었던 이 두 문화는 각각 다른 색깔로 뇌리에 각인(刻印)되어 남아 있다. 전자는 어둠과 무시무시한 색깔로, 그리고 후자는 온유한 느낌의 밝은 장밋빛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제는 이 땅에서 두 번의 전쟁 끝에 이 나라를 강점하여 식민지로 수탈하였고, 종국에는 민족분단의 빌미마저 남겨 우리는 지금도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빼앗기 위하여 우리 땅에 왔었다. 그러나 선교사로 대표하는 서구 문화는 삶의 최고 가치를 봉사에 두고 현대식 의료병원을 개설하였고, 불우청소년들의 직업 안정을 도왔으며, 백년대계로 각급의 학교를 세워 인지계몽에 나섰다. 그들은 선교사업 이외에도 꼭 필요한 것을 씨 뿌리기 위하여 이 땅에 왔다.

호주 선교사의 집은 여황산의 남향 산록에 있었다. 우리들에게 그 서양 집은 늘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동화 속 요정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그리고 나의 집은 통제영 서문의 성하거리, 명정리에서 십자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윤보선 대통령 영부인 공덕귀, 소설가 박경리, 시조시인 장응두, 독립운동가 박봉삼, 피리 악공 주봉진 어른과 그리고 정갑섭 친구도 한 집 건너 서로 이웃하고 살았다. 그때 공덕귀 여사의 모친이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서양 집과 왕래가 잦았고, 공덕귀 여사는 당시 진명유치원 선생님이기도 했다. 또 나의 집은 삼촌을 비롯하여 위로 형님 세 분과 누님 세 분이 진명유치원에 졸업 또는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종교는 달라도 선교사들과 늘 가까이 지냈다. 개화기 통영의 문예 발전은 참으로 찬란했다. 발전을 이끌었던 통영 청년들의 각 분야 활동영역과 작품 속, 특히 항일운동에는 항상 호주 선교사들의 잔영(殘影)이 말없이 도사리고 있다.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나라 잃은 통영 청소년들에게는 이심전심의 격려였고, 마음의 의지였다.

그들은 1941년 강제 출국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당시 그들이 우리에게 남기려던 메시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언 80년이 지난 지금, 오랫동안 보존되어온 그들의 메시지가 호주에서 잠을 깨어 다시 우리 앞으로 다가온다.”

이상규 교수, "그에게 있어서 교육이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었다. 교육은 복음 전파를 위한 통로이자 도구였다."

고신대 이상규 명예교수는 “호주장로교는 1889년 10월 내한했던 해리 데이비스의 죽음을 계기로 한국선교를 시작하였고, 해방 이전까지 78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바 있다. 호주장로교 한국선교부는 부산(1891), 진주(1905), 마산(1909)에 이어 1913년에는 통영과 거창선교부를 개설했는데 통영지부는 통영 지방을 비롯하여 인접 지역과 거제, 고성 등지를 관활했다. 이곳에 파송된 첫 선교사가 왕대선(Rev R. D. Wason) 선교사 부부와 모이리사백(Miss E. S. Moore)이었다. 곧 위대인 의사(Dr W. Taylor)와 그의 부인이 통영지부로 배속된다. 이렇게 통영지부가 세워지고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신애미 선교사인데, 1941년 내한하여 거창지부에서 일정 기간 일하고 통영으로 옮겨와 한국을 떠나기까지 20여 년간 봉사했다. 호주 빅토리아주 북동쪽에 위치한 비치워스(Beechworth)의 의사 가문에서 출생한 그는 멜버른대학교 재학 중에 학생자원운동(SVM)의 영향을 받고 선교사로 자원하였고, 교회여성훈련원에서 선교사 교육을 받은 후 내한하였다. 그는 거창, 마산 그리고 통영에서 일했는데 그의 주된 사역은 학교교육, 특히 여성교육이었다. 교육학을 공부한 그는 선교지에서의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교육입국에 대한 확고한 신념의 인물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교육이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었다. 교육은 복음 전파를 위한 통로이자 도구였다. 기독교 복음이 진공상태에서 전파되거나 수용될 수 없었고, 기독교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는 문자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학교교육을 중시했던 것이다. 자식들에게 문자를 가르치되 단순히 문자교육이 되어서는 안되고 자기 스스로 성경을 읽게 하기 위해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던 존 코튼(John Cotton)과 비교될 수 있다. 신애미 선교사는 한국인 여성 교육이야말로 이 나라의 장래가 결정되는 잠재적 자산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교육 활동을 중시하고 그가 일한 선교지부에서 학교교육의 책임자로 봉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가는 어딜 가나 한국인들에 의해 ‘신 교장’으로 불렀다.”고 소개했다.

호주선교사기념사업회 서상록 회장, "중요한 또 하나의 과제가 있다면 통영인의 기억 속에 향수처럼 남아 있는 호주 선교사의 집을 복원하는 일이다. 그런데 교회들이 이런 일에 관심이 없다."

부탄선교사이면서 통영호주선교사기념사업회를 조직한 서상록 회장은 “통영은 지금도 인구 13만 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인데, 한국을 대표하는 거목과 같은 숱한 예술가들을 배출한 특이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며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이 점에 대해 궁금해하며 시민들에게 묻곤 하는데, 대부분의 시민들은 ‘자연풍광이 아름다워서’라고 얼버무리는 듯이 대답하는 모습을 많이 보아 왔다. 그래서 통영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가동되어 관심을 따라 가다보니 근대 호주 선교사들의 역할로 연결이 되어 있음을 알았다.”고 말했다.

이어 “조선에 온 최초 호주선교사 헨리 데이비스(1856-1890)는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파송으로 왔다.”며 “1889년 8월21일 헨리 데이비스와 누나 메리 데이비스는 호주 멜번을 떠나 10월2인 부산에 도착, 10월4일 제물포 도착, 10월5일 서울에 도착했다. 당시 서울엔 앞서온 미국과 캐나다선교사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데이비스는 선교사가 없는 곳으로 가기 희망하고 부산으로 가기로 했다. 1890년 3월14일 서울을 출발하여 20여일간 500km를 행진하였다. 천연두와 폐렴으로 부산에 도착하기 5일 전부터는 음식을 섭취할 수 없었다. 1890년 4월4일 부산에 도착하였으나 다음날인 4월5일 오후 1시경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순직하였다. 한국에 온 지 6개월, 부산에 도착한 지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났다. 먼저 와 있던 캐나다 선교사 게일이 데이비스의 시신을 복병산에 안장하였다. 이 소식이 호주 교계에 전해지자 호주 청년연합회와 여전도 연합회 결의로 선교사 파송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1891년 10월12일 멕카이 부부와 3명의 미혼 여선교사(멘지스, 퍼셋, 페리) 등 모두 5명의 선교사가 부산에 왔다. 이중 멕카이 부인 사라는 부산 도착 3개월 후인 1892년 1월27일 폐렴으로 순직하였는데 이는 두 번째 호주선교사의 희생이다.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추방 당하기까지 78명의 호수선교사가 한국에 파송되었다. 통영은 1892년 무어(Moor)선교사가 부산에 거주하며 정기적으로 통영을 순회 방문하였다.”고 호주 선교사들의 통영 선교 역사에 대해 정리하여 설명했다.

서 회장은 “통영 근대화의 산실 역할을 했던 호주 선교사들은 항일민족운동과 최초의 근대식 교육 그리고 다양한 사회사업으로 많은 업적과 영향력을 이 지역에 남겼다.”며 “이러한 그들의 숭고한 발자취를 답사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저도 선교사가 되어 100여 년 전 열악한 조선을 찾아온 호주선교사들처럼 그렇게 세계의 오지인 히말라야에 들어가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안식년을 이용해 통영지역의 기독교 전래와 호주 선교사들의 역할에 대한 신학 논문을 준비하면서 호주 선교사의 집이 있던 문화동 269-1번지 일대와 그들이 걸었던 간창골 골목길을 수도 없이 걸으며 얼마나 많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고 술회했다.

그리고 “이제 남은 중요한 또 하나의 과제가 있다면 통영인의 기억 속에 향수처럼 남아 있는 호주 선교사의 집을 복원하는 일이다.”며 “1913년에 호주 선교사들이 통영에 와서 12,000평의 부지 위에 학교와 기숙사, 유치원 등을 세웠는데 이 중에서 마지막 남은 땅이 540평이다. 지난 2016년 10월1일 사단법인 통영호주선교사기념사업회를 설립, 18명의 이사와 100여 명의 회원들 중심으로 모금한 3억 원을 가지고 주춧돌만 남아 있는 옛 집터와 부지 540평을 구입하였고, 앞으로 3천 평은 더 구입해야 기념관 등을 세울 수 있다. 한국교회의 기도와 관심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호주선교사 사택 등이 세워진 자리 - 지금은 농사를 짓고 있다
호주선교사 사택 등이 세워진 자리 - 지금은 농사를 짓고 있다
통영호주선교사기념사업회 정기총회 후 기념사진을 찍다
통영호주선교사기념사업회 정기총회 후 기념사진을 찍다

통영호주선교사기념사업회가 이 부지를 매입하기까지엔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호주선교사들이 1941년에 강제 철수당할 때 자신들이 세운 A교회에 부지 12,000평을 넘겨주었으나 호주선교회 지부들이 소송을 제기하여 6,000평을 잃고 나머지 6,000평도 A교회가 헐값에 팔았는데 서 회장이 추적하여 기적적으로 매입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러하다.

“저희가 매입하기 직전에 아파트 건축업자가 이곳에 아파트를 짓겠다고 매입의사를 밝혔는가 하면 절에서 절을 지으려고 매입하려 했으나 성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저희가 갔을 때 땅 주인이 ‘진짜 주인이 왔네요. 찾아가세요.’라고 말해 마음이 아팠다.”

서상록 회장이 기자에게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교회들이 이런 일에 관심이 없어요.” “부탄선교사역을 마치면 이 일에 제 남은 생애를 바치려고 합니다.”

호주선교부 복원 및 기념관 건립은 2층 목조 및 벽돌조로 지어진 통영 호주 선교부 건물(양관1관)과 호주선교사 기념관(양관2)을 복원하여, 양관1 내에 항일 민족관과 근대 교육관, 의료 복지관, 문화 예술관 등의 전시관 설치와 양관2 내에 자료실과 도서관, 연구실 등의 기념관(2관)을 설치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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