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언어와 와인
[전문가 칼럼] 언어와 와인
  • 박여라 위원
  • 승인 2021.11.29 2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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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박여라 위원(예술목회연구원)
스페인 ‘라벤토스 이 블랑’ 포도밭에서 자신을 뽐내는 재래종 포도. ©여라

세상에 언어가 하나여서 모두 같은 말을 하던 바벨탑 이전에는 사람들이 하려고만 하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내 말이 뒤섞이고 사람들은 흩어졌다.(창세기 11장)

언어와 관련해 이 이야기와 데칼코마니 반대쪽 같은 이야기는 초대 교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다. 바람이 휘몰아쳐 갈라지는 불길 같은 모양으로 수많은 혀가 나타나 하나씩 제자들 위에 내려앉았다.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제자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알아듣고 놀랐다.(사도행전 2장)

수많은 언어가 표현하는 것은 한 가지, 하나님이 하신 커다란 일이었다.

제자들은 유대인 각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함으로써 맡은 소임을 다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란 곧 내가 쓰는 말과 같은 말이다. 서로 장벽이 없다. 소통하려면 서로 뜻하는 바를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같은 말을 하든지 아니면, 상대가 알아듣는 말을 내가 해야 한다.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소통할 수 없다. 서로에게 가닿을 수 없고 각자를 넓힐 수 없다.

흥미롭게도 오순절 성령강림 현장을 묘사하는 본문 마지막에 포도주도 등장한다. 누군가 이 장면을 비아냥거리며 방언하는 제자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했다. 여기서 쓰인 헬라어 ‘글뤼코스’는 달다는 뜻의 ‘글루코스’(그렇다. 포도당의 어원 맞다.)에서 유래했다. 새로 짠 포도즙, 즉 아직은 달기만 한 포도주를 의미한다. ‘새 술’로 번역된 이 단어는 성서에 단 한 번 나온다.

와인 언어를 우리말로 번역하기 어려운 경우는 흔히 인문학에서 그러하듯 우리 사회·문화에는 없는 개념이나 관념 때문은 아니라고 본다. 순전히 이름이 많기 때문이다.

포도 이름, 지역 이름, 와이너리 이름, 와이너리에서 붙인 와인 이름에 토양 이름, 바람 이름, 온갖 맛과 향을 표현하는 낯선 과일 이름, 꽃 이름, 허브 이름, 나무 이름에 수많은 사람 이름이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독일어, 헝가리어, 그리스어 터키어 등으로 온다.

이름은 중요하지만, 너무 많아 진입장벽이 엄청 높다. 희소식(?)은 그래서 저 언어를 잘 안다 해도 와인 영역으로 들어갈 때 맞닥뜨리는 진입장벽은 마찬가지라는 것.

문제는, 전문용어인 것으로 보이게 치장해 토씨와 어미만 우리말인 잘못된 번역, 이도 저도 아니어서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게으른 번역이다. 궁금하다면 누구나 와인에 다가갈 수 있게 번역에 충분한 해석을 담는 정성이 중요하다.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장벽을 낮춰야 소통할 수 있고 즐겁게 익히지 않겠나.

스페인 바르셀로나 근교 카바(스페인 스파클링 와인) 와인지역에 있는 어느 와이너리는 가장 나다워야 나를 잘 표현하고 전할 수 있다는 소통 방식을 선택했다.

500년 넘게 그곳에서 대대로 와인을 만들었지만 2011년부터 외래종 포도나무를 뽑아내고 풍토에 제일 잘 맞는 재래종만 재배한다. 게다가 포도밭에서 필요한 모든 조건을 자급자족하는 다소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해 그냥 ‘카바’가 아닌 저만의 스파클링 와인을 빚어낸다.

포도밭을 잘 표현하는 와인을 알아듣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쩌면 그 와인의 이름도 어떠한 언어도 아닌 와인 그대로구나 싶다.

박여라 위원 (예술목회연구원 연구위원)
박여라 위원 (예술목회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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