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산에서 내려오다 넘어져 손가락이 골절되었다.
반 깁스를 하니 손가락에 땀이 나 불편했고 씻기 위해 매번 풀고 매는 일은 더 번거로웠다. 다친 손가락은 네 번째 손가락인 약지였다. 그다지 존재감 없는 약지지만 막상 다치고 나니 위력이 대단했다.
두 달여 해 온 깁스를 풀었는데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는다. 다친 약지는 응당 그렇다 치지만 약지 옆의 중지와 새끼손가락은 왜 구부러지지 않는지? 6개월이 되어가는 지금도 다친 손가락과 양옆 두 개의 손가락은 온전하게 구부러지지 않아 불편함 속에 지내고 있다. 지체는 이렇게 영향을 받고 함께 아파한다는 것을 다치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최근에 두 가지 일을 겪으면서 이 깨달음은 심화하였다. 필자가 관련되어 재정을 지원하는 것으로 도움을 드린 목회자가 있다. 도움 받은 일로 그가 속한 단체의 입장과 다르다 하여 사퇴로까지 문제가 비화되었다.
해당 단체가 반으로 나뉘어 옳고 그름의 공방을 심하게 하면서 양쪽에서는 자신들이 유리한 입장이 되도록 필자가 편들어 주기를 요청해 온다.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다. 자체 내의 갈등이 없었으면 그 지원은 미담으로 남을 일이 어쩌다 다툼의 공방 재료가 되었고 이 일은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아 답답해 보인다.
다른 한 가지 사례는 여러 가지 사연 속 상실의 아픔을 가진 분들 이야기다.
자조 모임이 누구보다도 필요한 분들인데 코로나로 모임을 할 수 없었다. 이제 위드 코로나 시대로 접어들면서 회원들이 가을 나들이를 갈망하였다. 모처럼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 이 일에 필자도 마음을 보태고 싶어 한 지인에게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지인 본인이 교통편과 일정액의 경비를 주선해 보기로 하였다.
그렇게 시작한 여행 지원 건은 해당 단체의 책임자에게까지 전달되면서 필자의 작은 찬조 외의 경비 대부분과 차량 모두 부서 책임자가 지게 되었다. 이렇게 선한 의도로 발전된 여행 건은 이야기가 거듭되면서 여러 사람들이 마음을 모으고 힘을 거들어 정을 나누는 좋은 선례가 되었다. 그리고 그토록 갈망했던 여행은 즐거움의 환호성이 되었다.
이 두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생각해 본다.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아픈 일들에 나는 과연 얼마만큼 마음 아파했는가? 그 아픔으로 얼마만큼 영향을 받았는가? 나도 그처럼 아파하고 내게 그 아픔으로 인해 힘듦이 있어야 지체인데 나는 과연 그랬던가? 어느새 삼자의 입장에서 관조하며 판단하는 자리에 서 있지 않았나를 반성해 본다.
따스한 형제애가 더욱 그리워지는 추운 계절을 맞았다. 힘들어하는 이웃과 함께 아파하고 그 곁에서 길을 찾으며 답답함에 같이 동동거리는 지체가 주님 보시기에 참된 교회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