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우리말과 와인
[전문가 칼럼] 우리말과 와인
  • 박여라 위원
  • 승인 2021.11.19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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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해 전 11월 북 캘리포니아 앤더슨밸리 나바로 빈야드. 와인을 익히기에 언어가 필요한가. ©여라

와인 백과사전 ‘옥스퍼드 와인 컴패니언’은 표제어 ‘와인 언어’를 정의하면서 에밀 페노(1912~2004)를 인용한다. “와인에 관해 깊이 있게 이야기하려할 때 우리가 가진 표현 수단은 바로 한계에 맞닥뜨린다… 묘사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할 필요가 있다. 맛에 관한 한 언어가 어느 정도는 우리를 저버렸다고 느낀다.”

이어 백과사전은 와인언어가 지닌 세 가지 문제를 지적한다. “우선, 사람들이 와인의 맛을 보고 향을 맡을 때 경험이 각자 서로 다르다. 둘째, 기존 어휘가 다소 모호해졌다. 그리고, 시장은 경쟁이 치열하고 고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야 하니 솔깃하면서 괴상한 표현이 이어졌다.”

왜 언어인가. 와인에 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할 때 으레 외국어를 처음 배울 때처럼 단어장을 만들어 들고 다니며 외웠다. 새로운 단어들도 적지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단어에 새로운 뜻을 담아 확장하는 일이 더 힘겨웠다.

익혀야 할 단어들은 이내 묶음으로 이어져 더 큰 덩어리가 되었다. 덩어리째 파악해야 그제야 개별 단어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그려졌다. 세계 여러 지역 지도를 그려 외워야 할 내용도 많아 색연필 세트를 꺼내 놓고 지도를 그려가며 내용을 빼곡히 채워 단어장을 한두 개 만들다 보면 금세 몇 시간이 지나갔다. 힘에 부쳤지만 재미있었다. 새로 익힌 와인언어는 내가 가진 언어체계를 더 넓고 깊게 해주었다.

문제는 영어로 이렇게 익힌 내용을 한국어로 표현할 때 아주 세게 부딪힌 장벽이다. 말은 차라리 나았다. 읽거나 쓰는 일은 지금도 자주 곤혹스럽다. 와인의 긴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다양한 언어는 온전히 한국이 아닌 곳에서 왔기 때문에 수많은 포도 종류와 지역 이름과 그들의 오래된 관습과 규정, 와인의 맛과 향을 기술하는 단어들을 단순히 소리 나는 대로 옮기는 것만으로는 의미 있는 우리말을 만들기에 턱없는 일이었다.

번역과 해석을 어떻게 한국어에 켜켜이 담느냐가 숙제로 떠올랐다. 번역과 해석이 되지 않으면 와인에 관한 한국어는 영원히 남의 것이거나 극소수만 이해할 수 있는 은어로 남을 수밖에 없는가.

언어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의사 표현과 정보 전달이다. 소통이 되려면 서로 같은 말을 해야 한다. 언어에 관해 생각할 때 창세기 11장 바벨탑 이야기를 자주 떠올린다. 와인언어가 복잡한 이유는 바벨탑을 쌓아 올릴 때처럼 말이 뒤섞여 서로 알아듣지 못해서일까. 말이 통하지 않아 도시를 세우지 못하고 바벨에서 흩어진 사람들. 과연 같은 와인도 다르게 경험한다는 것은 와인을 더욱 복잡하고 알기 어렵게만 하나.

같은 말을 쓴다면 와인에 관해 나누는 이야기는 흥미로워진다. 얼마큼 신맛이 느껴져야 아주 신지 약간 신지 사람마다 느끼는 문턱이 다르다. 오감을 객관적인 수치로 재단할 수는 없지만, 많은 이들과 와인을 매개로 소통하면 내가 떫은맛에 민감한 편인지 단맛에 둔한지 잘 알지도 못했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된다. 소통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게 되는 과정이다.

우리말로 와인에 관해 같은 말을 쓸 수 있을까. 한국어는 와인언어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이 나의 여전한 질문이다. 될 수 없다면 왜. 만일 될 수 있다면 어떻게.

 

박여라 위원

(예술목회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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