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기의 기독교미술
[기획특집]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기의 기독교미술
  • 가스펠투데이
  • 승인 2021.11.1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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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목회연구원 예술신학 콜로키움

1. 14세기 후반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시작하여 16세기 중반까지 서유럽 전역에서 전개된 학문·문화·예술의 새로운 경향을 르네상스(Renaissance) 라고 한다.

르네상스기의 성격을 규정할 때 빈번히 사용하는 표현은 신중심의 중세가 인간중심의 근대로 진입한 시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는 여전히 신중심의 시대라고 말 할 수 있다. 교황청의 아비뇽유수(1309-77), 서방교회의 대분열(Schisma, 1378-1417)로 교회의 권위가 약화되고 성 프란체스코(San Francesco d’Assisi, 1181-1226) 이후의 새로운 신학과 영성이 중세인들이 몰두하였던 종교적 관심사와 달리 신의 섭리와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변화를 초래하였지만 르네상스인들은 여전히 종교적이었다. 그리고 인문주의자들이 추구한 고대의 부활이라는 시대정신도 기독교신앙과의 융화라는 범주 내에서 수용되었다.

르네상스를 근대 초,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로 파악하는 것을 넘어 중세와의 단절을 지닌 세속적인 근대로의 진입으로 과도하게 이해한 것은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을 거쳐 이제 막 근대를 경험한 19세기 역사학계의 한계였다. 르네상스는 중세에서 유발한 발전경향이 심화·가속화한 것으로 중세와의 연속성(Kontinuität)을 지닌다. (J. 하위징아, A. 하우저)

2. 14세기 이탈리아의 단테(1265-1321), 보카치오, 페트라르카(Francesca Petrarca, 1304-74)를 위시한 인문주의자들이 시대적 과제로 여긴 고대의 부활이라는 인식은 16세기 후반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74)의 ‘예술가열전’(1550/68)에서 고전고대 미술의 부활·재생(renascita : 레나시타) 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 용어를 19세기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Jules Michelet, 1798-1874)는 그의 저서 ‘프랑스역사’(Histoire de France, 1833-67)에서 16세기 알프스이북의 문화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르네상스(Renaissance, 1855)라는 말로 번역하였다. 스위스 역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Jacob C. Burckhardt, 1818-97)는 그의 저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en: Ein Versuch,1860)에서 이 용어를 재차 사용함으로 르네상스 개념의 보편화에 기여하였으며, 세계와 인간의 발견, 고대의 부활 등 우리가 지니고 있는 르네상스 상(象)을 정립하였다.

3. 중세를 넘어 새 시대를 구현하고자 한 르네상스(Renaissance) 운동의 동력(動力)은 16세기 종교개혁(Reformation)의 발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종교개혁을 통해 비로소 르네상스의 정신이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르네상스운동이 고대의 부활·재생(rebirth)을 모토로 삼아 새 시대를 추구한 반면, 종교개혁은 고대교회가 품었던 복음의 재발견을 통한 세계와 교회의 개혁(reform)을 지향하였다. 르네상스인들이 인문주의(Humanismus)를 통해 시도한 중세의 해체, 새로운 세계의 구성은 복음의 재발견에 근거한 새로운 신학적 사고가 삶의 모든 영역에 작용함으로 종교개혁에서 비로소 구현되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각성한 ‘하나님 앞에(Coram Deo) 서 있는 개인의 믿음’은 중세적인 집단적 세계관을 대체하는 개인(Individuum)과 자유(Freiheit)의 개념을 유발함으로 근대의 문에 들어서게 한다.

흔히 인본주의 대 신본주의 단순도식으로 이해되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실상은 각각의 문명·정신사적 기반인 헬레니즘(Hellenism)과 헤브라이즘(Hebraism)에 근거해 동일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현상의 발현이었다. 18세기 계몽주의, 19세기 자유주의 역사가들의 자기 시대의 시선이 투영된 이해와 달리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기는 여전히 종교의 비중이 큰 시기였으며,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도달하고자 한 중세 이후 새 시대의 지향이라는 목표는 결국 종교개혁을 통해 달성되었다.

4. 이 강의는 종교개혁과 르네상스의 상관관계를 교회사·문화사적으로 고찰하고 당대의 개신교와 가톨릭 진영의 신학이 회화와 조각, 건축 등 미술언어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살펴봄으로 오늘의 개신교를 구형한 종교개혁사를 이해하고자 한다.

1) 루카스 크라나흐부자, 종교개혁제단화(Reformationsaltar, 1547)

종교개혁의 어머니교회로 불리는 독일 비텐베르크 시(市) 교회에 설치된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부자의 ‘종교개혁제단화’는 개혁운동의 후원자인 작센의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가 슈말칼덴전쟁에서 패배해 가톨릭지배자 카를 5세 황제의 군대가 비텐베르크에 진입해오는 위기상황에서 개혁의 중단 없는 지속과 신앙고백의 천명이라는 정치적·신학적 함의를 가지고 1547년 4월 27일 봉헌되었다.

루카스 크라나흐 부자, 종교개혁제단화, 1547, 독일 비텐베르크 시(市) 교회

전통적인 세 폭 제단화 형식을 취한 종교개혁제단화는 전면의 두 날개를 펼쳤을 때 중앙과 좌우 패널로 이루어진 레타벨(Retabel)과 그 아래 프데델라(Predella)에 네 장면을 담고 있다. 상단 세 개의 패널에는 성례가 그리고 하단에는 설교가 표현되었는데, 이것은 필립 멜란히톤이 기초한 ‘아욱스부르크 신조’(Confessio Augustana, 1530) 제 7항의 개신교 교회론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모든 시대에 하나의 거룩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반드시 존재하고 존속할 것이라고 가르쳐진다. 이 교회는 그 속에서 복음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복음에 따라 바르게 집행되는 성도들의 사귐이다”

제단화의 중앙은 성찬(Abendmahl), 좌측은 세례(Taufe) 그리고 우측은 성찬과 세례의 전제인 참회(Beichte)를 담고 있으며 아래 프레델라는 설교(Predigt)를 묘사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성찬의 기원을 이루는 최후의 만찬 장면에 등장하는 원형식탁이다.

대(大) 루카스 크라나흐, 종교개혁제단화, 중앙패널, 성찬, 1530s, 비텐베르크 시 교회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의 대표작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최후의 만찬’(c.1495-98)에는 화면중앙 그리스도의 좌우에 제자들이 세 명씩 네 그룹으로 배열되어 있다. 곧 발생할 유다의 배신을 언급한 그리스도의 말씀직후 동요하는 제자들의 심리와 내면이 동적인 몸짓으로 외적으로 표현된 장면은 고요한 자세와 표정을 흐트러트리지 않는 그리스도의 정적이고도 평온한 모습과 대조된다. 원근법에 의해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설정된 소실점은 관람자의 시선을 결연한 의지로 사명을 받아들이시는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c.1495-98, 460cm×880cm,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 밀라노

레오나르도를 비롯한 이탈리아미술이 표현한 직사각형 모양의 성찬식탁은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교황을 정점으로 한 가톨릭 성직계급의 위계질서를 암시한다.

하지만 1530년 루터의 신학적 제안에 따라 대 크라나흐가 표현한 원형식탁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일체된 공동체(communio)를 뜻한다. 사냥꾼으로 변장해 바르크부르크성에 은거할 당시의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묘사된 루터는 주님과 사도들의 식탁에 함께하며 포도주잔을 시종에게 건네고 있다. 얀 후스(Jan Hus)의 이종성찬분급을 지지한 입장이 재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16세기 비텐베르크 신앙공동체는 주의 만찬을 행함으로 초대교회의 공동체와 영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제단화 하단 프데델라에 표현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는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을 회화적으로 형상화 한 것이다.

소(小) 루카스 크라나흐, 종교개혁제단화, 프데델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대한 설 교, 1547, 독일 비텐베르크 시 교회

그는 하이델베르크 변론(Heidelberger Disputation, 1518)을 통해 중세 가톨릭의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의 대척점으로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를 계승한 십자가의 신학을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교회와 신학의 중심이며 교회는 죄인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은혜를 선포하는 도구이다. 화면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설교자와 회중의 중심에서 교회를 지탱하는 기둥처럼 묘사된다. 그리스도 중심주의(Christocentrism)의 표현이다. 화면 우측 설교단의 루터의 왼손은 성경위에 놓여 있다. 그의 설교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근거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의 오른손은 세례요한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설교의 본질이 십자가 복음의 증거임을 나타낸 것이다. 걷혀져서 바람에 휘날리는 흰색 세마포는 돌아가신 그분이 또한 부활하신 분임을 나타낸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만이 죄인을 구원하신다. 화면 좌측에는 설교를 경청하고 있는 회중의 모습이 나타난다. 회중들은 말씀을 통해 십자가에 달려 죄인을 속죄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오직 믿음’(sola fide)이 ‘오직 은혜’(sola gratia)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게 한다.

17세기 플랑드르 바로크 거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작품은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교회의 혼란을 수습하고 내부개혁을 주도한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의 기수였던 예수회의 설립자 이냐시오 데 로욜라를 묘사하고 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기적, 1617-18, 미술사박물관, 비인

그는 여전히 진리에 대해 정관하고 사색함으로 회중들이 알지 못하는 영적인 세계의 신비를 사제가 깨닫는 스콜라 전통을 대변하고 있다. 회중은 사제를 통해서 은혜를 받는다. 반면에 루터의 만인사제설은 모든 신자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구원받음(Justfication by grace of God through faith)을 강조하고 있다.

2)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피에타(Pietà), 1498-1499/1547-1553/1564

15세기 말과 16세기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는 일생동안 ‘구원을 향한 미술’을 추구하였다. 그의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신플라톤주의 이념과 이와 상반된 사보나롤라의 사상과 가톨릭 내부의 그리스도 중심주의 등 개혁신학의 영향은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의 격변기에 구원을 갈망한 그의 영혼의 궤적을 나타낸다.

로마에서 제작한 그의 초기작 피에타(Pietà,1498-99)는 고전주의 미술의 이상적 미를 완벽하게 구현한 전성기 르네상스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피에타(Pietà), 1498-1499, 대리석, 203cm, 성베드로 대성당,
바티칸

피라미드 구도 속의 두 인물의 조화와 균형, 옷자락의 주름과 인물간의 대비는 안정감과 평온함을 준다. 그리스도의 수평적인 선과 성모의 수직적인 선이 교차하여 중심축을 이룸으로 각각의 부분이 합쳐져 완벽하게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고전주의 구성(Komposition)이 돋보인다. 14세기 유럽 인구의 1/3을 앗아간 흑사병이 창궐 할 당시 독일 라인란트 지역에서 발원한 피에타(Pietà Vesperbild) 상의 정수는 무고하게 죽은 아들의 몸을 무릎에 누인 채 오열하고 있는 어머니의 고통의 사실적 표현이었다. 당시의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어머니 마리아의 처절한 아픔 앞에서 자신을 동일시하며 위로를 구했다. ‘피에타 뢰트겐’(c.1360)은 알프스 이북의 고딕 사실주의 경향을 대표한다.

피에타 뢰트겐(Pietà Roettgen), c.1360, 목재에 채색, 89cm, 라인주립박물관, 독일 본

미켈란젤로는 프랑스대사 그로슬레의 의뢰로 제작된 초기 피에타에서 북유럽미술의 사실주의와 감정표현을 특유의 열정과 기교로 여지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해 전에 마무리된 레오나르도의 회화 ‘최후의 만찬’(1495-1498)과 함께 그의 조각 ‘피에타’는 절제와 규범, 균형과 이상적인 미를 추구한 전성기 르네상스 고전주의 미술을 양식적으로 성취하였다.

세부묘사는 사실적이지만 안정된 구도를 위해 마리아의 어깨와 치마폭이 실제보다 넓게 잡혀 있다. 수학적 분석으로 대상을 재현하고 부분의 묘사에 치중하였던 콰트로첸토(Quattrocento, 15세기 초기르네상스) 미술과 달리 인간의 착시효과를 감안한 시각적 효과까지도 배려한 친퀘첸토(Cinquecento, 16세기 전성기르네상스) 미술의 완숙함이 나타난다. 수염 난 아들에 비해 너무 젊은 어머니의 얼굴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동정녀 어머니, 당신의 아들의 딸’이라는 성모의 비범한 젊음, 영원한 동정을 의미한다.

유미적이고 고요하며 세속의 욕망을 넘어 명상에 잠긴 마리아의 표정은 인간의 감정에 고통으로 호소하는 독일적 도상과 달리 그리스도의 희생을 감내하는 노력으로 내적인 비애와 고귀한 품위를 드러낸다. 죽은 예수의 몸과 자는 듯 한 얼굴은 아름다운 영혼과 부활을 대변한다.

동일한 주제인데도 북유럽과 남유럽 간 신학적, 상징적 해석의 차이가 극명함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비잔티움제국의 멸망(1453),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1492) 등 전환기의 상황에 대해 알프스를 경계로 나타난 대조적인 현실인식과 그에 따른 상이한 미술현상은 이후 종교개혁의 배경을 이룬다.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묘비로 구상한 피렌체 피에타(Pietà Bandini, 1547-1553)는 수평으로 누인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마리아상이 아니라 네 인물로 구성된 원추형이다. 그의 초기 피에타에서 나타난 초월적인 엄숙함보다 인간적인 고통과 슬픔이 부각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성모가 강조되는 전통적인 도상을 변경해 그리스도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는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가톨릭 내부에 형성된 그리스도 중심주의(Christocentrism) 신학을 형상화한 것이다.

자신의 자화상을 조각가의 모자를 쓴 니고데모로 표현한 미켈란젤로는 죽은 예수의 몸을 일으켜 세우며 부활을 염원한다. 트렌토공의회(Tridentinum, 1545-1563) 이후 이런 움직임이 이단으로 정죄되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작품을 파괴하려고 하였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피렌체 피에타(Pietà Bandini), 1547-1553, 대리석, 226cm,
두오모박물관, 피렌체

죽기 직전까지 보듬었던 피에타 론다니니(Pietà Rondanini, 1564)는 이상적 미를 구현한 초기 피에타와는 너무나도 다른 추상미술에 가까운 모습이다. 고전적이고 이상적인 미를 추구했던 르네상스 미감의 해체가 완연히 느껴진다. 르네상스의 이성적 제작과 달리 작가의 감성적 표현을 중시한 매너리즘의 입장이 재료가 지닌 돌의 자연성(matière)을 부각시키며 미완성(non-finito) 상태로 작품을 마감한다.

그의 생애 마지막 피에타에서는 전통적 도상과 달리 마리아가 오히려 그리스도에게 기대어 있는 모습이다. 긴 생애동안 인간사의 부침을 경험한 그가 죽음을 앞두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신앙에서 구원의 길을 찾은 것이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론다니니 피에타(Rondanini Pietà), 1564, 석재, 195cm,
카스텔로 스포르체스코성, 밀라노

3) 개신교 최초의 교회건축, 토르가우 성채 예배당(Torgauer Schlosskapelle, 1544)

독일 작센 주 엘베 강변의 토르가우 성채 예배당은 마르틴 루터의 신학적 구상에 의해 세워진 개신교 최초의 교회건축(Kirchenbau)이다. 건축주인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용맹공(1503-54)은 르네상스 제후로서 종교개혁을 위한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였으며 일생동안 루터를 존중한 신실한 개신교도였다. 그는 15세기에 시작된 하르텐펠스 성의 건축을 르네상스 양식으로 마무리 지으면서 궁정 주변에 성채 예배당(1544)을 건축하였다.

토르가우 하르텐펠스 성(Schloss Hartenfels), 궁정, 독일 토르가우
토르가우 성채 예배당(Torgauer Schlosskapelle) 내부, 1544, 독일 토르가우

예배당은 길이 23m, 너비 11m, 높이 14m의 단일한 홀(Saal)로, 내부의 양 측면에 원형아치로 이루어진 이층의 갤러리를 지님으로 모두 삼층으로 이루어진 구조이다. 천장은 고딕 건축기법인 그물형 궁륭으로 마감하였다. 소박하고 검소한 예배당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전적으로 루터의 의지의 반영이었으며 건물 전체를 감도는 은은한 빛깔의 색감은 화가 대 루카스 크라나흐의 의견이었다. 루터는 이 예배당이 무엇보다도 말씀선포, 회중기도, 성례라는 세 가지 개신교 예배요소에 집중하는 거룩한 공간으로 지어질 것을 주문하였다.

루터의 제안에 따라 교회 문을 들어선 회중들의 눈에는 가장 먼저 입구 맞은 편 벽면에 있는 설교단(Kanzel)이 들어온다. 개신교 예배에서 설교가 지니는 신학적인 위상을 예배당 중심에 설교단을 위치 지움으로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설교단에 새겨진 그리스도 생애의 세 장면을 담은 부조(Relief)는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나타낸다. 루터는 간결하고 검박한 모습으로 제작된 제단(Altar)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둘러선 회중들에게 떡과 포도주 이종성찬을 분급하였다.

예배당의 중앙 벽면에 설교단이 설치되고, 제단을 중심으로 회중들이 원형을 이루어 성찬을 나누는 예배의식을 담은 토르가우 성채 예배당의 건축유형은 16세기 독일 개신교 제후들의 궁정예배당 건축양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더 나아가 말씀선포에 건축적, 내용적 지향을 이룬 토르가우 예배당의 건축유형은 이제까지 가톨릭 전례에 부합하였던 라틴십자가형 중세교회건축과는 다른 중앙집중형 개신교 교회건축(Protestantischer Sakralbau)의 전통을 이루는 기원이 되었다. 18세기 중엽 드레스덴에 세워진 독일 바로크양식의 성모교회(Dresdner Frauenkirche, 1726-43/1994-2005)는 이러한 전통의 중심에 서있다.

드레스덴 성모교회(Frauenkirche), 1726-43/1994-2005, 독일 드레스덴
드레스덴 성모교회(Frauenkirche), 1726-43/1994-2005, 독일 드레스덴

4) 반종교개혁신학의 구형, 로마 일 제수 교회(Il Gesù, 1568-84)

16세기 중반 반종교개혁의 기수였던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 1491-1556)는 예수회(Societas Iesu)의 모(母)교회인 로마 일 제수(Il Gesù)가 이전의 교회건축 양식과는 다른 새로운 건축 유형으로 지어지기를 원했다.

로마 일 제수 교회(Il Gesù), 1568-1584, 파사드(façade, 1573-1577), 로마

그는 일 제수의 공간구성이 이제까지의 라틴십자가 모양에서 익랑(翼廊, transept)이 없는 단순한 직사각형 형태가 되기를 제안하였다. 이러한 구상은 종교개혁을 교회분열로 인식한 그의 반종교개혁 신학의 반영으로 직사각형 모양의 신랑(nave) 옆에는 측랑(aisle)이 없고 대신 작은 예배당(chapel)들이 벽 속에 들어가게 함으로 회중의 시선이 오직 전면의 주제단으로만 향하도록 하였다.

로마 일 제수 교회,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1279-1420) 평면도

그의 신학적 구상에 의해 건축된 로마 예수회교회(Il Gesù)는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건축에서 나타난 중앙집중형(central plan)을 탈피해 서방교회의 전통적인 바실리카양식(longitudinal plan)으로 복귀하면서도 단순한 직사각형 형태의 통일된 공간감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을 담아내려고 하였다.

로마 일 제수 교회, 내부, 로마

일 제수에 나타난 이러한 건축 유형 즉 Gesù-Typus는 17, 18세기 유럽과 남미, 아시아에 세워진 예수회 교회건축의 원형을 이루었다. 더 나아가 매너리즘 2세대 건축가 자코모 바로지 다 비뇰라(Giacomo Barozzi da Vignola, 1507-1573)와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 1532-1602)가 건축한 일 제수는 17세기 전 유럽에서 펼쳐진 바로크 시대의 기원을 이룬 원(原) 바로크(Proto-Barock) 양식의 창안이었다. 다 비뇰나는 일 제수교회의 평면과 내부장식(1568-1584)을 이루었고 그의 제자 델라 포르타는 정면부(façade, 1573-1577)를 마무리하였다.

5) 아시시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Basilica di San Francesco, 1228-53)

루터와 로욜라가 구상했던 회중의 시선을 전면부의 제단/설교단에 집중하게 하는 건축유형은 이미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 상부(superiore)에서 나타나고 있다.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Basilica di San Francesco, 1228-53), 상부(superiore), 아시시

상부성당 내부는 일반적인 중세교회건축과는 다르게 회중이 제대 방향에서 선포되는 강론에 집중할 수 있도록 회랑이 없이 신랑만 있는 독특한 구조(aisleless nave) 이다. 그리고 예배당 좌우벽면은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조토(Giotto di Bondone, 1266-1337)가 프레스코기법으로 제작한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 28도’(St. Francis Cycle, 1297-1300)로 채워져 있다.

생전에 청빈과 무소유의 삶을 지향한 성 프란체스코(San Francesco d'Assisi)는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며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강론을 하였다. 메시지의 강조와 함께 미술이 지닌 메시지 전달력에 주목한 프란체스코의 영성과 신학은 르네상스 사실주의 미술의 태동을 유발한다.

 

 

임재훈목사

독일 칼스루에벧엘교회 담임

유럽기독교문화예술연구원장

예술목회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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