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목회] 오징어 게임 ㅡ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하는 자본주의적 서사
[예술과 목회] 오징어 게임 ㅡ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하는 자본주의적 서사
  • 장준식 목사
  • 승인 2021.11.05 08: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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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 켜 놓은 라디오(KQED/샌프란시스코 배이지역의 대표 시사 라디오 방송)에서 ‘오징어 게임(Squid Game)’ 열풍에 대한 대담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라디오 진행자가 질문한다. “왜 한국의 드라마 컨텐츠가 이렇게 세계적인 열풍을 불러일으킬까요?” 대담의 패널 한 명이 이렇게 답한다. “그것은 한국 드라마 컨텐츠가 미국화(Americanized)되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기생충>의 성공과 BTS의 선풍, 그리고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연이은 흥행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오징어 게임. 우리 동네(서울시 서초구 우면동/개발 전 강남)에서는 ‘오징어 가이상’이라 불렀다. 우리는 그렇게 불렀으나 지역마다 게임에 해당하는 ‘가이상’을 다른 명칭으로 부른 것 같다. 아무튼 그 모든 명칭을 통일해서 정리한 것이 ‘게임’이니, ‘오징어 게임’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미국화(Americanized)의 흔적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오징어 가이상’이라 타이틀을 정했으면 아마도 세계적 열풍을 불러 일으키는데 큰 지장을 초래했을 것이다. ‘오징어는 알겠는데, 가이상은 뭐야?’ 직관적 이해가 없으면 요즘 사람들은 흥미를 잃으니까. 

‘오징어게임’ 앙상블 포스터. 출처 웨이브
‘오징어게임’ 앙상블 포스터. 출처 웨이브

오징어 게임에는 여러 가지의 서사가 얽혀 있다. 우선 전면적으로 내세운 서사는 자본주의, 특별히 신자유주의 서사이다. 그래서 낯설지 않다. 지금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경제체제를 고스란히, 눈으로 보듯, 아주 감각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오징어 게임 장에 들어온 참가자들 중 그 누구도 강제로 그곳에 참가한 사람은 없다. 모두 자발적 의지를 통해서 들어왔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작동 방식을 보여주는데, 신자유주의는 스스로를 통제하고 착취하는 기술이다. 그렇기에 아무도 탓할 수 없다. 성과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며,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본인 자신만이 질 수 있다. 게임에서 진 참가자가 그 자리에서 죽는 장면은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오징어 게임에서 볼 수 있는 두 번째 서사는 리트로(retro/추억)서사이다.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모든 게임은 한국의 7,80년대에 유행하던 게임들이다. 오징어 게임 자체가 그렇고, 딱지치기, 구슬치기, 달고나 뽑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그리고 줄다리기가 그렇다. 서로를 죽고 죽이는 잔인한 게임 룰에서 등장하는 ‘깐부’라는 용어도 옛 추억을 떠올리기에 정말 좋은 장치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에서 술래를 맡은 거대한 인형은 옛날 교과서에 철수와 함께 등장했던 영희이다. 리트로, 즉 지난 날을 추억하는 서사는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에 향수를 불러 일으켜 따스한 감동을 주기 마련이다. 아무리 어려웠던 시절도 ‘시간’이라는 매직을 거치면 그리운 향수를 불러오는 법이다. 리트로 서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기에 충분하다.

세 번째 서사는 현대성(또는 근대성/modernity)이다. 천재 시인 이상이 쓴 <날개>에는 현대인(modern people)의 지루함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주인공은 현대성의 대표적 발명품인 백화점에서 “날자, 한 번 날아보자꾸나”를 외치는 것이다. 현대(또는 근대/modernity)라는 말 자체가 ‘새로움’이라는 뜻이다. 현대인은 새로움을 갈망한다. 현대인은 ‘신상품’을 갈망한다. 금방 싫증을 느낀다.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점점 자극적인 것을 원하게 되고, 오징어 게임에서 보듯이 온갖 탐욕이 그대로 노출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오징어 게임이라는 기획은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자본가들에 의해서 고안된 것이다. 그들은 삶의 지루함을 ‘새로움’을 통해서 달래고자 하는데, 그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오징어 게임을 만들어 냈다. 

오징어 게임을 직관적으로 보면 분명 그것은 자본주의, 특별히 신자유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오징어 게임을 통하여 직관적으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고통 당하는 자신들의 상황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것이 오징어 게임의 성공 요인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하는 자본주의적 서사를 가진 오징어 게임을 본다. 오징어 게임이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결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한다. 그 이유는 오징어 게임 자체가 자본주의적 서사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심화된 버전인 신자유주의는 실로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다. 자기 자신을 비판하도록 내버려 둠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체제를 더욱더 공고히 한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권위 있는 영화제나 예술대상에서 상을 받는 작품들은 대개 자본주의(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Parasite>이다. 그러나 대중매체라는 것이 원래 태생적으로 자본주의 선전물로 생겨난 것이기에, 대중매체는 결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한다. 결국 오징어 게임도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 같으나, 결국 자본주의에 이용당하고 말 뿐이다. 

우리는 오징어 게임의 돌풍 이후 그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넷플릭스 CEO가 오징어 게임의 돌풍을 축하하며 본인이 직접 467번째 참가자의 유니폼을 입고 사진을 찍고, 오징어 게임 체험관을 만들어 드라마를 홍보할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더 많은 이윤을 남기고 있다. 게다가 오징어 게임에 등장한 게임들은 다시 선풍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데, 특별히 달고나 세트는 없어서 못 팔릴 정도이다. 오징어 게임 컨셉은 돌풍을 타고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 파고 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오징어 게임을 통해 감각적으로 보는 바, 자본주의(신자유주의)는 무지막지하다. 그래서 현대 자본주의에는 ‘야수’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사람을 잡어 먹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한다. 자본주의적 서사에 열광한다. 이쯤 되면 이것은 종교라고 불러야 한다. 우리 시대 자본주의는 단순한 경제체제가 아니라 종교다. 신자유주의는 스스로 통제하고 착취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그래서 종교적이다. 그 어떤 종교보다 강력하다. 눈에 보이는 상(부/정규직/안정적 고용)과 벌(가난/비정규직/불안정적 고용)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지옥(불평등)은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곳에 가지 않으려고 사람들을 발버둥 치게 하는 것, 그 불안의 조장이 신자유주의 체제를 돌아가게 만드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악이 따로 없다. 우리는 지금 악을 끌어안고 살고 있다.

현대/근대(modernity)의 산물인 자본주의를 마르크스가 비판한 이유는 그것이 사람들의 생명을 터무니없이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 점을 분명히 간파했다. 자본주의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미워하게 만드는 체제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있으면 우리는 결코 서로 사랑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오징어 게임에서 아주 감각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자본주의에 열광한다. 지금 전세계에서 부는 오징어 게임 열풍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자기 자신을 향하여 원망을 퍼붓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열광하게 만들어 그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마법과 같은 능력이다. 우리는 모두 이 마법에 걸려 산다. 

현대(modernity)는 사랑의 개념도 개인적인 사사로운 감정으로 전락시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전복적인 능력을 축소시키고 빼앗아 갔지만, 우리 인간이 서로 사랑하면서 산다는 것은 단순히 서로의 감정을 나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특별히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은 단순히 그러한 사사로운 감정 놀이가 아니다. 사랑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고 서로 미워하게 하며 인간성을 훼손하고 생명을 빼앗는 그 어떤 악한 세력들에게라도 저항하게 하여 그들의 악마적 게임 법칙에서 벗어나,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생명이 풍성한 하나님 나라, 새로운 세상을 여는 전복적인 힘이다. 사랑은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악을 이기고 전복시켜 새로운 세상을 여는 힘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는 것은 오징어 게임 같은 자본주의적 서사가 아니라 새가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우리를 악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신 그리스도의 은총과 사랑에 있다. 이것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이 세상이 정해 놓은 오징어 게임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 세상을 구원한다. 

 

장준식 목사

(세화교회 목사 / 예술목회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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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구 2021-11-09 10:49:38
이 글은 소비자이자 근로자이고 생산자인 그리스도인이 다시 생각해 볼 점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네요.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지, 그 속에서 자신의 역할은 무엇이고, 이기고 지는 것의 의미, 삶의 방향성과 관계성, 내적 상태 등 그리스도인이 재미와 새로움 사이에서 자칫 간과할 수 있는 부분을 돌이켜 보게 됩니다. 오징어 게임뿐 아니라 다른 많은 분야에 있어서 우리가 잊고 있는 기독교적 가치, 인식, 태도 등에 대한 글이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살고 돌아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네요. 훌륭한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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