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대 초대총장 윤인구 박사를 세상에 드러낸 김재호 교수 著, ‘부흥의 우물’(4) …윤인구를 세상에 드러내라
부산대 초대총장 윤인구 박사를 세상에 드러낸 김재호 교수 著, ‘부흥의 우물’(4) …윤인구를 세상에 드러내라
  • 엄무환 국장
  • 승인 2021.11.08 14: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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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윤인구는, 목사였다!
그는 29세에 이미 주기철, 이약신 목사와 함께 경남 3대 목사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역사 과목을 몹시 싫어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나는 ‘윤인구를 세상에 드러내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순종자’에서 ‘노래’를 찾아 미지의 역사라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순례자’로 변했다. 내 영과 혼은 ‘화살과 노래’라는 두 단어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 두 단어는 나의 간절한 기도제목이 되었다.

“윤인구가 쏘아 올렸다는 ‘화살’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가 불렀다는 ‘노래’는 과연 어떤 것입니까?”

“그것들이 무엇이기에 한평생 몸 바쳐도 좋다는 것입니까?”

기도가 깊어지자 이 질문들은 나에게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한평생 몸 바쳐 살아갈 어떤 것도 없이 살아온 지난 50년이 허무했다.

‘이대로 계속 살아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인구 총장 시절 예배를 드렸던 채플실(지금은 박물관) 문 입구에서 김재호 교수
윤인구 총장 시절 예배를 드렸던 채플실(지금은 박물관) 문 입구에서 김재호 교수 / 사진 엄무환 국장

나는 한편, 주께서 왜 부산대학교에 관심을 가지시는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부산대는 국립대학교이다. 대학에 기독교적 색채가 있을 수 없다. 미션 스쿨이 아닌 일반 국립대이다. 대학에 신앙의 뿌리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의문은 내 안에서 끝없이 일어났다. 나는 계속 기도할 뿐이다. 그러다 윤인구가 애송한 롱펠로의 시로 시작하는, 오래된 신문 칼럼을 발견했다. 1994년 5월 21일자, 부산 <국제신문>에 게재된 이영희 기자의 기사다. 이 기사는 윤인구가 누구인지 알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교육자로서 윤인구가 왜 롱펠로의 시를 애송했는지도 이해하게 해주었다. 윤인구와 부산대학교를 연관지어 검색할 때 롱펠로의 시를 먼저 보게 된 것도, 아마도 이 기사에서 유래한 것 같았다.

『미국 시인 롱펠로의 <화살과 노래>는 부산대 초대총장 윤인구(尹仁駒, 1903~1986)가 평생 잊지 않고 힘을 얻은 시(詩)다. 자신의 수고와 노력이 후진의 가슴에, 그들의 일생에 남아 있고 도움이 된다면 교육은 몸바칠만한 것이라고.

그는 또 한 강의에서 이런 인용을 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 루터의 소학교 시절에, 그의 교장은 소학생을 대할 때마다 먼저 모자를 벗고 깍듯이 경례를 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묻는 이에게 그는 ‘이 안에 어떤 위대한 인물이 숨어 있는지 아느냐’고 답했답니다. 이 교장의 경례가 마르틴 루터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돌무더기 땅에서 오늘의 부산대를 일구어낸 윤인구의 교육관을 엿보게 하는 말이다. 팔십 평생 교육으로 일관한 그가 물질적으로 남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를 떠나보낸 뒤 부인 방덕수(方德守, 91) 씨 홀로 살고 있는 낡은 아파트조차 이미 부산대에 헌납된 상태다. 그러나 ‘화살과 노래’라는 시처럼 그가 뿌린 씨앗은 열매를 맺었다. 지난 15일로 개교 48주년을 맞은 부산대는 8만 5천 명의 학사 석사 박사 등 지역사회의 인재를 배출하며 뚜렷한 학맥을 형성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40년 전 사람도 살지 않고 교통편도 없던 부산대 자리에 ‘미친 사람’, ‘꿈꾸는 사람’이란 소리를 들어가며 쌓아 올린 상아탑은 그의 선견지명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청년기엔 부흥목사로서, 장년기엔 농촌과 농민을 위한 계몽자요 교육자로서, 노년에는 사회봉사자로 활동한 윤인구는 1903년 11월 1일 부산 구포(鷗浦)에서 태어났다. 부친 윤상은은 일제 때 독립군에 자금지원을 한 금융인이었으며, 동래 부윤(府尹)을 지낸 백부 윤필은과 독립투사였던 종형 윤현진 등에서 보듯, 그의 집안은 내로라하는 유지 집안이었다.

부산진보보통학교를 졸업, 동래고보에 다니던 중 3.1운동에 가담했던 윤인구는 중도퇴학 후 서울 YMCA 청년 학관에 다녔다.

그의 인생항로를 정해준 기독교와의 만남은 일본 유학시절이었다. 1920년 명치(明治)학원 중학부에 입학한 그는 성경과 톨스토이, 사회사업가인 체험록 등을 접하면서 기독교교육에 뜻을 둔 청교도적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명치학원에서 대학과정인 신학부를 졸업한 뒤 미국 프린스톤대학, 영국 에딘버러대학원을 마친 뒤인 1931년, 윤인구는 평생 동지인 동갑 방덕수와 28세라는 나이에 결혼하고 진주 옥봉리교회(현 진주교회)에 부임함으로써 종교지도자로서의 첫발을 내딛었다.

부산 초량교회의 이약신, 마산 문창교회의 주기철 목사 등과 경남 3대 교회의 하나를 맡은 젊은 윤인구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4년간의 목회생활 끝에 교회는 사회 특히 비참한 농촌을 향해 좀더 나아가야 함을 깨닫는다.

1935년 마산 복음농업실수학교로 부임, 농촌교회 사역자와 농촌지도자 양성을 꾀한 것은 개인적 사역에서 민족 인재 기르기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었다.

해방은 그런 그에게 많은 일감을 인계했다. 미군정(美軍政) 하 경남(慶南)도 학무과장을 맡은 윤인구는 일본인 교사들이 떠나버린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시 열고 교사 양성에 온 힘을 쏟았다. 뒤에 부산교육대로 발전한 부산사범학교도 이때 설립됐고, 이화여전을 나온 부인이 영어교사를 맡기도 했다. 학무에 관여한 5년간 그가 충원한 교사는 1천5백여 명에 달했다.

김재호 교수 저 부흥의 우물
김재호 교수 저 부흥의 우물

한편 윤인구는 대학설립기성회 5,6개를 통합해 1946년 5월 15일 부산대학교의 설립인가를 받아낸다. 그러나 마땅한 교사(校舍)가 없어 수산대, 대신동의 청년학술원 등을 전전해야 했다. 그것마저 군(軍)에게 뺏기고 대신동 운동장 뒤 종묘원을 매입, 천막교사를 지었다. 이곳에 유엔한국지원단 등과 후원회의 도움으로 목조교사를 다시 지었다.

땅값을 다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불쑥 전(前) 지주가 나타나 “내 생업을 망쳤다. 학장인지 고추장인지 나오라”고 고함치곤 해서 교사 뒤에 있던 집에서 잠자지 못하고 피하는 일도 겪었다. 그런 중에도 더욱 분발하여 1953년 4월 종합대학 승격을 이뤄낸 윤인구는 이해 11월 초대총장에 추대되었다. 1955년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전동 돌밭계곡에 미군의 원조로 부지를 마련했다. 한 제자의 표현처럼 그는 하나님이 천상을 가꾸듯 부산대를 천상화원으로 가꿨다.

“집에서 주먹밥을 뭉쳐서 현장에 나오셨죠. 인부들과 함께 국수를 삶아 먹으며 군용침대에서 주무셨습니다.”

효원 교사를 지을 때 함께 일했던 전 부산대 교수 오점량 씨(78)의 얘기다. 오늘날 남아 있는 새벽별 효원(曉原)이란 이름과 무지개문, 웅비의 기상을 염원한 웅비(雄飛)의 탑과 교기의 독수리상은 그가 창안한 것인, 부산대 구석구석 나라와 민족을 생각한 그의 정신이 스미지 않은 곳이 없었다.

윤인구와 접했던 사람은 그의 업적에 앞서 독특했던 품성을 떠올린다. 거짓말을 무엇보다 싫어한 대쪽같은 성격에 검소한 생활로 일관한 그에겐 공무로 출장 갔다가 출장비를 아껴 쓰고 돌려준 일화가 항상 따라다닌다. 그러나 너무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기 어려운 탓일까. 그에게는 의외로 적이 많았다.

“한번 신임 얻기가 힘든 분이었던 반면, 여러 번 테스트 끝에 ‘깨끗하다’란 판단이 서면 무한정 사랑을 주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입대했을 땐 논산까지 면회를 왔을 정도였어요. 거꾸로 ‘이 사람은 거짓되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눈 밖에 났으니 너그러움이 부족했다고나 할까요. 속이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으면서도, 이런 단순함 때문에 정치술수에 능한 이들에게 이용당해 오해를 사기도 했습니다.”

그의 제자인 동의대 정권섭 교수(56, 법학)는 그가 정치에 능했으면 포용력도 보였을 것이며 부산대를 떠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와는 무관했던 윤인구는 1947년 이래 학장설, 학장, 총장 등 12년간 장기집권한 데 대한 거부반응과 교직원들의 갈등, 자유당 정권과 연계된 반감으로 총장 연임이 거부되면서 1960년 부산대를 떠났다. 그는 총장직에 욕심은 없었으나 이를 둘러싼 파당과 감투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았다. 1961년 연세대 총장에 부임하게 됐지만 그 상처가 아무는 데는 그가 부산대에 쏟아부은 15년 세월만큼이나 긴 세월이 필요했다. 1964년 연세대 총장직을 사퇴한 그는 1980년 중풍으로 눕기까지 부산대 강사, 부산신학교 교장, 영남신학교 설립 등 꾸준한 교육활동을 벌이다 1986년 1월 25일 눈을 감았다.

윤인구는 청교도적 생활로 모은 2억 원의 재산을 부산대에 후진들의 장학기금으로 희사했다는데, 그의 사후 여기에 그의 부인이 살고 있는 아파트와 제자들의 성금이 보태져 1991년 5월 15일 그와 부인의 이름을 한자씩 딴 인덕(仁德)기념관이 교내에 세워졌다.

부산대 안에 세워져 있는 인덕기념관
부산대 안에 세워져 있는 인덕기념관 / 사진 엄무환 국장

“자신의 동상이 세워질까봐 걱정하셨을 정도로 사욕이 없으셨죠. 인덕이라 이름 붙인 것을 좋아하실 분이 아니어서 기념관 건립을 승낙한 사모님은 ‘내가 그이보다 속물인가보다’하고 많이 후회하셨습니다.”

부산대 시절 제자 이정원 씨(여, 58)의 말이다. 그처럼 맑은 인성(人性)을 간직했던 윤인구, 그는 갔어도 육영에 바친 그의 정신은 지금도 숱한 제자들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세상에, 윤인구는, 목사였다! 그는 29세에 이미 주기철, 이약신 목사와 함께 경남 3대 목사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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