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와 들보] 민간인 학살의 기억, 우리는 피해자였고 또 가해자였다
[티와 들보] 민간인 학살의 기억, 우리는 피해자였고 또 가해자였다
  • 정종훈 교수
  • 승인 2021.08.26 1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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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이 되면 광복의 기쁨보다 분단의 아픔이 더 느껴진다. 나의 조부모 세대와 부모 세대가 일제하에 당했을 억압과 착취를 사죄할 줄 모르는 전범국가 일본을 보면,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오른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국가 간의 관계는 어느 정도 정상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일제하에서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구체적으로 당한 정신대 성노예 할머니들과 징용노동자들에게 개인적 차원의 보상이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일관계가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고 희망찬 미래를 향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오늘의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

일제가 자행한 민간인 학살의 사례들 역시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대한독립을 외치며 비폭력저항을 하던 3.1 운동 당시 제암리의 무고한 주민들이 학살당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해서 일본 국민이 공황상태에 있을 때, 그들의 흉흉한 민심을 돌리기 위해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거짓 소문을 근거로 일본인 자경단을 조직하고, 수천 명의 조선인을 학살한 것 또한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의 접경지역인 간도에서 독립군 토벌에 실패한 일본군이 수만 명의 한국인을 학살했던 간도참변은 별로 드러나지 않은 사건이다. 이 외에도 우리 무고한 선조들이 일제에 의해 얼마나 억울하게 죽었던가.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우리 정부가 수립되기 직전 미국 군정 아래서 군대와 경찰에 의해 제주와 여수, 순천 등지에서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학살되었던가. 한국전쟁 당시에는 어떠했나. 좌익세력의 통제와 회유를 목적으로 결성되었던 ‘국민보도연맹’의 회원들이 예비검속과 즉결처분의 과정에서 얼마나 무력하게 죽임을 당했던가. 전쟁 초기 미군이 자행한 노근리 민간인 학살을 비롯하여 국군과 인민군에 의해 일어난 민간인 학살은 얼마나 빈번했던가. 그 후 한 세대가 지나지 않은 1980년 5월 18일 군부독재의 종언을 소망하며 민주화를 외치던 광주시민들에게 신군부는 도대체 무슨 짓을 자행했던가.

다른 한편 독재정권 시절에 한국군은 미국의 동맹이라는 이유로 ‘베트남전쟁’에 참가했다. 1964년에서 1973년까지 미국의 용병처럼 활약했던 32만 명 한국군 가운데 일부가 수천 명의 베트남 주민을 학살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우리는 흔히 한국군이 베트남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서 파병되었고, 그 대가로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을 세웠으며, 결국 한국군 파병은 경제발전의 초석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한국군이 전쟁에 종사하지 않는 베트남 주민들, 그것도 노인과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에 대해서 잔인하게 학살한 것을 무슨 말로 변명할 수 있을까.

이처럼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의 사례를 돌아보면, 우리 안에 이미 학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병존함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우리는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자신을 피해자로서만 처신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미국이 주도한 ‘베트남전쟁’에서 너무나 분명한 가해자로서 역할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민간인 학살 문제는 한국군을 용병처럼 활용한 미국에서 논란거리였고, 당시 우리나라 중앙정보부조차 그 진상을 조사했다. 최근에 한국군의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103명의 베트남 생존자가 역사의 진실과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 청와대에 청원서를 제출했는데, 우리 정부는 아직 명쾌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나는 광복절 76주년을 지나면서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과거청산의 과제를 제기하고 싶다. 모든 학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고, 가해자는 무엇보다 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야 한다. 가해자로서 사죄의 진정성을 드러내려면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적절한 보상을 해야 한다. 유사한 행위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함께 상응한 후속 조치를 해야 한다. 우리가 세계공동체 속에서 더욱 성숙한 시민의식을 발휘하려면, 우리는 피해자 의식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해자였던 사건을 인정하고,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정 종 훈 교수

(연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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