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용 장신대 총장(서리), ‘버팀목 사역의 중요성’
김운용 장신대 총장(서리), ‘버팀목 사역의 중요성’
  • 엄무환 국장
  • 승인 2021.08.26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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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누군가가 있을 때 ‘세워지는역사’는 오늘도 계속된다
-포스트코로나 시대 ‘세움’ 사역의 영적원리-
김운용 장신대 총장(서리)
김운용 장신대 총장(서리)

버팀목이 있어

제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는 주목(朱木) 몇 그루가 섬겨져 있다. 섬긴 지 오래되어 대부분 잘 자라고 있는데 며칠 전 산책길에 보니 주목 한 그루가 비스듬히 쓰러져 있었다. 일으켜 세워주고 발로 다져 주었더니 조금 나아졌지만 산책길에 버팀목 하나 주어와 끈으로 묶어 일으켜 세워주었다. 몇 주 전에 바람이 세게 분 날 버팀목을 대어준 반대편으로 쓰러져 있었다. 버팀목은 삼각으로 세 개를 받쳐주어야 했는데 하나만 세워주었더니 그런 모양이다. 단지를 산책하며 버팀목 할 것을 찾았지만 구하지 못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보니 아예 나무를 송두리째 뽑아내 버렸다.

주로 고산지대에 서식하는 주목은 흔히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 간다는 귀한 나무다. 오래전 강원도 화천에서 소총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진급을 앞둔 대대장이 상관들에게 상납하려고 화악산 벼락 맞은 주목을 캐오라는 임무를 주었다. 벼락 맞은 주목을 뿌리까지 캐서 끌고 내려오는 일이 보통 일은 아니었지만 군대에서 안 되는 일 없기에 트럭에 그것을 싣고 몇 번 목공소에 들린 적이 있는데 정말 멋진 작품으로 바뀐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만약 버팀목이 있었다면 그 귀한 나무는 쓰러지지도 뽑히지도 않았을거다. 복효근 시인은 이런 멋진 시를 남겼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고쳐 심고/ 각목으로 버팀목을 세웠습니다/ 산 나무가 죽은 나무에 기대어 섰습니다/ 그렇듯 얼마간 죽음에 빚진 채 삶은/ 싹이 트고 다시/ 잔뿌리를 내립니다/ 꽃을 피우고 꽃잎 몇 개/ 뿌려 주기도 하지만/ 버팀목은 이윽고 삭아 없어지고/ 큰 바람 불어와도 나무는 눕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 나무가 죽은 버팀목에 기대어 섰다는 표현이 정말 아름답다.

가장 어려운 때 중책을 맡아 업무를 시작하면서 어떻게 학교를 이끌 것인지 고심하며 깊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이 시를 읽으면서 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렇지 하나의 버팀목이 되는 것이지…쓰러진 나무 고쳐 심고 기울어진 나무 바로 세우고…그러다가 삭아 없어지는 것이지…’ 버팀목, 그것이 우뚝 서 있는 곳에는 큰바람 불어와도 나무는 눕지 않는다. 시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이어진다. “내가 허위허위 길 가다가/ 만져보면 죽은 아버지가 버팀목으로 만져지고/ 사라진 이웃들도 만져집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하여/ 나는 싹틔우고 꽃피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시인은 이 시를 읽는 사람들의 기억을 소환한다. 인생길 걸어가다 보니 거기 내 인생을 세워준 버팀목 아버지가 만져진다. “만져보면 죽은 아버지가 버팀목으로 만져지고…” 이 부분을 읽다가 저의 부친이 생각나 울컥했다. 누구나에게든 이런 버팀목이 있었고 그래서 오늘의 내가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버팀목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헌신과 수고, 눈물과 기도, 그리고 내가 삭아 없어지는 그런 일이기 때문이다.

무너진 교회를 세울 버팀목이 되어라

하나님께서는 1901년 5월 이 땅의 나라가 무너지고 있을 때 평양 땅에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작은 사랑방에서 학생 2명으로 한 학교를 시작하셨다. 1907년 6월 1회 졸업생 7인을 배출하였다. 길선주, 양전백, 서경조,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이기풍… 한국교회 최초 목사들이었다. 학생들의 나이 38세부터 58세 당시 남자 평균 수명이 40세 정도였으니 별 기대가 되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그렇게 뿌려진 작은 씨앗은 거센 바람에 흔들리기도 했고 짓밟히기도 했다. 일본 제국주의 신사참배 위협 앞에서 스스로 학교 문을 닫기도 했다. 해방 후 개교한 학교는 공산 치하에서 모진 위협을 당하다가 4대 교장인 김인준 목사는 순교를 당했다. 북한 땅에서 신학교육을 수행할 수가 없어 서울로 옮겨왔다. 1948년 비어있던 남산 신궁 터에 자리를 잡고 신학교육을 시작했다. 한국전쟁 중에 부산 땅에서 부산진교회 건물을 빌려 신학교육을 이어갔다. 1960년 이후 광나루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평양에서 광나루에 이르는 동안 그 모진 역경의 시간에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버팀목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올해 개교 120주년을 준비할 때 하나님께서 그런 명령을 주셨다. ‘무너진 교회를 세워가는 버팀목이 되어라… 네가 버팀목이 되어 한국교회 버팀목이 될 사람들을 세워라…’ 지금은 버팀목이 필요하다.

다시 흙묻는 손으로

아주 오래전 20대의 한 젊은이가 미국 옛 수도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에 있는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미국 남장로교 대표 신학교였던 그 학교 졸업생들은 조선 땅에 선교사로 가장 많이 달려가던 때였는데 그 젊은이도 신학교 졸업 후 조선 땅으로 가기 위해 기도로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졸업 후에 바로 조선 땅으로 달려가지 않고 버지니아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한다. “지금 조선 땅에는 목사 선교사도 필요하지만 의사 선교사가 더 필요하다”는 선교 보고를 들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1819년에 설립한 이 학교는 오늘날 명문 주립대학 가운데 한 곳이다. 그 명문대학에서 의학 공부까지 마쳤으니 앞길이 보장되었지만 공부를 마친 후 선교지 중에서 가장 열악한 곳이었던 조선 땅으로 달려간다. 먼저 온 유진 벨(Eugene Bell) 선교사와 함께 목포에 선교스테이션을 개설하고 낮에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로 저녁과 쉬는 시간에는 주로 환자를 진료하는 일로 거의 쉴 틈이 없이 시간을 쪼개어가며 사역에 힘쓴다. 조선에 먼저 와 있던 의사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두 사람이 힘을 합해 진료하니 조금 수월한 듯 했으나 몰려드는 환자가 너무 많아 결국 과로로 쓰러졌다. 미국으로 돌아가 2년 남짓 치료를 받았다. 1904년 조선 땅에 다시 돌아와 유진 벨 선교사와 광주에 선교스테이션을 개설한다. 화순, 보성, 고흥, 광양, 강진, 해남, 진도, 완도, 목포, 영암, 무안, 나주 등이 그의 선교지였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던지 1909년 이 지역에서 200여 명이 세례를 받았고 430여 명의 학습 교인이 세워졌다.

1909년 3월 한달 동안 선교 여행이 진행되었다. 3월 28일 주일 설교를 위해 광주에서 60km이상 떨어진 장흥에 도착했다. 그날 저녁 갑자기 한파가 몰려왔고 한밤중에 고열에 시달렸다. 다음날 교인들이 쓰러져 있는 그를 발견했고 광주로 전보를 친 다음 그를 가마에 태우고 광주로 달렸다. 상태가 위중하여 가마꾼을 바꾸어 가며 사흘 밤낮을 달려 수요일 새벽 2시 경에야 광주에 도착했다. 로버트 윌슨 의료선교사의 극진한 치료를 받고 조금 호전되는가 싶더니 토요일 아침 다시 악화되었다. 목포에 있던 의사 선교사 윌리 포사이드에게 급히 광주로 오라는 전보를 보냈다. 배를 타고 영산포까지 온 그를 마중 나간 청년 최흥종이 인도하여 광주를 향하는 시간에 그는 세상을 떠난다. 조선 땅에 온 지 11년 나이 42세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다. 40일 후에 유복자로 넷째가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광주 양림동산에 묻혔다. 그의 이름은 클레멘트 오웬(Clement C. Owen, 오기원)이다.

만약 정말 만약에 의학 공부를 하지 않고 의사가 되지 않았다면 그는 그렇게 과로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거다. 만약 영산포에서 눈보라를 뚫고 광주로 향하던 포사이스가 도움을 요청하는 한센병에 걸린 한 노파를 외면하고 달려갔다면 혹시 그를 살릴 수 있었을지로 모른다. 그런데 떨고 있는 그 노파에게 자기 외투를 벗어 입히고 말에 태우고 눈보라 길을 걸었기 때문에 그는 사랑하는 친구를 살리지 못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애양원의 전신인 한국 최초 나병원을 세워 ‘한센인의 아버지’로 칭함을 받았던 최흥종 목사가 바로 거기에서 나온다. 호남지방의 최초 장로 최초 목사 광주가 자랑하는 독립운동가였다.

1970년대 장신대 캠퍼스 잔디밭에는 한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주님만 따르리.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 시작할 때도 그 마음으로 달리는 오늘도 그 마음으로 언젠가 우리 사역을 마칠 때도 그 마음으로 달릴 수 있길 빌고 우리의 생을 마칠 때도 그 마음이면 좋겠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시는 버팀목으로 달려가고 계시는 한 분 한 분을 주님께서 칭찬해 주시길 바라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올려지기를 빈다. 글‧사진 엄무환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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