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결핍은 빛우물이다
[전문가 칼럼] 결핍은 빛우물이다
  • 백우인 위원
  • 승인 2021.08.13 13: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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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잎사귀가 사람의 얼굴만큼이나 각양각색이다. 맥문동같이 가늘고 긴 형태를 갖추고 있는 식물은 군집을 이룰 때 더 풍성하고 멋진 풍경을 이룬다. 이들이 강이나 바닷가 근처에 있고 석양빛이 흠뻑 넘치게 쏟아진다면 게다가 미풍까지 분다면 그들의 흔들거림은 우아하고 황홀함 그 자체다.

손바닥 만큼이나 큰 플라타너스 잎사귀는 잘 말려두었다가 그 위에 가만가만 붓펜으로 시를 적어두면 좋을만큼 넉넉한 폼이다. 그래도 크기로 치자면 연잎을 능가할 만한 것이 있을까 싶다. 애기들 우산으로 써도 좋으리만치 크고 큐티클층이 두터워 물방울들을 뭉쳐 엄지손가락만한 다이아몬드를 만들고는 그 위에다 하염없이 데굴거리고 논다.

장미꽃 모양으로 사방을 향해 뻗어있는 로제트과들은 땅에 바싹 달라붙어 있는 냥이 야무져 보이면서도 규칙대장 같다. 고물고물거리는 애기 손가락 모양의 잎사귀는 볼 때마다 앙소리 내면서 한입 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엽다. 바늘같이 뾰족한 잎들은 뭔가 견뎌야만 했던 시간이 있었구나 싶게 결연해 보인다. 식물들은 그들이 있는 토양과 기후 조건에 잘 적응하기 위해 이처럼 그들의 양태를 갖춘다.

그들에게 적응은 곧 생존을 향한 몸짓이다. 생존의 단계를 넘어설 때에라야 생장과 생식과 번식을 위한 몸짓을 할 수 있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각축전의 차원을 넘어가면 이제 그들의 관심은 생장이다.

19세기 초 리비히(Justus Liebig)는 식물들의 생장 조건에는 최소량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을 밝혔다. 생장의 필수 원소 10가지 중 어느 하나가 결핍되면 다른 9가지가 아무리 풍성할지라도 부족한 그 한 가지가 식물의 생육을 지배한다. 부족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 증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를테면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거나, 잎사귀가 갈색으로 변해간다거나 껑중하게 키만 자란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예민하게 표현하면서 부족한 원인자를 갈구한다.

우리 인간도 다르지 않다. 무엇엔가 결핍되거나 결여가 있는 이들은 그 요소에 대해 민감하고 예리하다. 그리하여 결핍과 결여의 원인자 앞에서 우리의 감각은 먹이를 발견한 굶주린 늑대처럼 반응한다. 햇빛을 보고 눈이 부셔한다면 우리의 시세포에 있는 명반응의 시스템에 결핍이 있다는 의미다.

식욕을 잃어 음식을 먹지 못하면 혀는 약간의 음식에도 예민해져서 미세한 맛을 구별해 낸다. 사랑에 결핍을 갖고있는 이는 사소한 무관심과 소홀함에도 격렬한 상실감을 느낀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결핍된 언어는 들려지는 표면 언어를 넘어 심층에서 튀어 올라온 언어들의 뉘앙스에 예민해진다. 그리하여 은폐된 액면 그대로의 언어들이 저절로 탈은폐된 직접화법으로 들려오는 것이다. 결핍은 사태를 좀 더 적나라하게 감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라깡에게 결핍은 언어의 세계인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발생하는 원초적인 것이다. 예컨대 타자에 의해 발화된 기표가 있다고 하자. 선생님, 학생, 직원, 사장 등등. 이 기표들은 주체에게 일종의 페르소나를 요구하는 것인데, 이때 주체가 그 기표와 동일시 되기위해 어떠한 노력을 한다해도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을 수는 없을 뿐만 아니라 ~라는 기표로 불려지는 순간 주체는 한쪽 어깨가 베어진 달처럼 주체의 일부는 잘려나간다. 구멍 뚫린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체는 잘려나간 한쪽 귀퉁이를 채울 대상인 '오브제 아'를 구성해 낸다. 그리하여 주체는 오브제 아를 향한 끊임없는 술래잡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라깡의 결핍된 주체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다. 우리의 주체는 투명한 태양 빛속에 다양한 파장의 빛깔을 안고 있는 것처럼 분열되어 있다. 내 안에 있으면서도 초자아에 의해 거세되고 숨겨져 그림자로 존재하는 결핍된 주체들의 거주지가 무의식이다. 이곳에는 결핍된 주체뿐만 아니라 상처받고 결함이 있는 주체도 나란히 있으며 이들은 종종 어떠한 증상이나 꿈으로 등장한다.

거세는 존재를 숨쉬게 하고 자유하게 하는 마음의 공백을 만든다. 결핍은 공백에 드리워진 하나의 빛우물이다. 빛은 지평을 열고 공간을 비워낸다. 빛은 '무'였던 것으로부터 존재를 유출한다. 빛우물을 바라보는 이들은 빛의 농밀함과 시간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는 날 것 그대로의 자연을 체감하는 내밀한 경험을 한다. 이것은 존재의 창조이며 이 경험은 그곳을 들여다보는 이만이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백을 '본다'는 것은 모호하고 불확실한 세계에서 원초적이고 생생한 자아를 만나는 것이다. 결핍은 화살표를 우리 내면의 우물로 향하게 한다. 그리하여 결핍은 사태를 좀더 정직하게 지각하는 힘이 있으며 우리 안의 코나투스를 깨운다. 결핍을 안고 있는 그대와 나는 빛우물에 있다.

 

백우인 위원

(영성과 예술 연구원,

새물결 플러스 <한달한권> 유튜브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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