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데겔 설교] “자신의 살을 주는 것을 약속하신 주님”
[이달의 데겔 설교] “자신의 살을 주는 것을 약속하신 주님”
  • 이신성 기자
  • 승인 2021.08.12 09: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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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15일 성령강림절 후 열두 번째 주일
요한복음 6장 51-58절

신학적 관점

생사가 걸린 문제에 대해 설교하지 않는다는 것은 요한이 전하는 복음을 설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이 오늘 본문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이 세상의 생명”이다. 그리고 이 생명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선물이라는 것이 강조된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51)

후대에 본문을 성례전적 교리에 입각해 해석하면서 교과서적 답을 이끌어 내기도 했지만 이는 본문이 제시하는 당혹감을 생생하게 전달하지 못한다. 본문을 성례전적으로 해석하는 신학자들도 매우 다양한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본문을 가장 사실적으로 해석한 동방교회의 크리소스톰으로부터, 가장 상징적으로 해석한 스위스 개혁자 츠빙글리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학자들이 요한복음 6장을 성만찬을 이해하는 핵심 구절로 여긴다.

그러나 루터는 특이하게도 51절의 예수의 말씀에 대한 주석을 통해 “이것은 성만찬에 적용할 수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루터의 설교는 열정적이었고, 그림과 같은 생생한 묘사법을 사용했는데, 그가 이 본문을 갖고 설교한 내용은 살펴볼 가치가 있다. 그는 예수가 “그의 살을 먹는 것”과 “그의 피를 마시는 것”에 대해 말한 이유는 먹고 마시는 일에 익숙한 청중들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이것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했다. 루터는 예수가 51절에 말한 “나의 살”에서 중요한 것은 “살”이 아니고 “나의”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소시지의 재료가 되는 살이 아니다. 정육점에서 팔거나, 늑대나 개가 먹은 그런 살이 아니라는 것이다.

크리소스톰도 설교에서 생생한 표현을 사용했는데 루터와는 달리 성례전과 예수의 살과 피를 연결한다. 53절의 내용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교했다: “예수는 자신의 육체를 우리 수준으로 낮추셨다. 우리가 그분을 머리로 둔 몸이 되어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와 같은 낮아지심을 통해 우리는 더 이상 그를 올려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무리를 먹이실 때 그랬던 것처럼, 하늘로부터 온 빵은 제한이 없다. 오직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 자만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런 다양한 해석들을 통해 우리가 어떤 결론을 얻을 수 있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주시는, 죽음보다 더 강한 생명은 언제나 육신을 통하여(요일 4:2) 온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고후 5:16) 이 진리는 육체적으로는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도 유의해야 한다.

주석적 관점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는 선언은 대단히 도발적이다. 이제는 이 선언을 더 엄청나게 밀어 붙인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51). 이 말은 불평하던 유대인들이 서로 논란하게 만들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에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을까?”(52). 모세 시대에 “먹을 수 있는 고기를 달라”(민 11:13)고 요구하면서 간청하는 유대인들 이야기의 숨은 암시가 있다. 예수가 만나 고기 대신에 자신의 살을 주는 것을 약속한다고 보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것이다. 이제 그는 피를 마시라고 말한다. 사람을 잡아먹는 소리를 제쳐 두더라도, 이 언급은 이스라엘 음식규례의 근본적인 금기사항을 위반하고 있다(레 17:10-14; 신 12:16, 24을 보라).

요한복음은 예수에 대한 그들의 충성이 이제는 그들을 미워하는 그들의 이웃과 가족인 “유대인”로부터 분리되는 위험에 처한 작은 신자들의 그룹인 내부자들을 위해 씌여졌다. 그들은 6장의 시작에서부터 주님의 성찬 예식의 메아리를 들었고, 그러한 메아리는 네 복음서의 기적적인 먹임 사건의 설명에서도 들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이 본문은 우리가 그것을 미리 알고 있다고 전제하면서도(13장), 예수가 제자들과 하신 마지막 만찬을 묘사하지 않는다. 이 생략의 효과는 우리들로 하여금 성례의 의미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빵을 먹고 잔을 마실 때, 단지 예수가 배반당한 저녁에 보인 그 예식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우리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마지막 성찬의 기록이 말하듯이(고전 11:23-26),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기적적인 급식이 성만찬을 가리키는 표적일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말씀에서처럼 성만찬은 그 자신의 죽음을 가리키는 표적이다.

이러한 논란에서 예수가 제기한 수수께끼는 이 복음서 전반적인 스타일의 특징이다. 유대인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가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3:4)라고 물은 것처럼, 이제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에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이러한 질문들은 수수께끼처럼 내부자들의 대답은 분명하지만, 외부자들에게는 불투명하다. 수수께끼에 대한 대답은 이것이다. 예수가 빵이나 살을 준다는 것은 자신을 준다는 것인데,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수수께끼, 역설적인 이야기의 이상한 역설이다. 영원한 지혜와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에서 내려와 “육신이 되어”(1:14), 육신으로서 자신의 생명을 주려는 것이다. 이 복음서에서 말하고 있는 신자들은 “그의 영광을 보았는데”(1:14) 하지만 역설적인 형태로 보았다. 그의 표적은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계시하고 있는데, 하지만 그의 영광의 사건은 그의 “시간”이 오는 전체적인 이야기를 통해 기다려야 한다(2:4,11; 4:21,23; 5:25,28; 7:30; 8:20; 12:23; 13:1; 17:1: 참조 16:21, 25, 32). 모세의 구리 뱀처럼, 예수는 그를 믿는 사람들의 생명을 위하여(3:14-15) 매달려야만 한다. 독생자로서 예수는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17:5) 그 영광을 다시 받아야만 한다. 그 영광, 하늘에서 왔다가 아버지께 다시 돌아가는 그 높임은 정확하게는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다(특히 12:32-33에 주목하라).

예수의 제자들 가운에서 여럿이 그랬던 것처럼 “이 가르침은 어렵다”(6:60).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자신을 역설적 삶에 헌신하고 세상을 이상하게 바라보며, 세상에서 안락하게 사는 편안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상식으로 보이는 것들에 대해 영원한 회의를 갖는다. 그들은 자신들을 미워할 세상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요1 2:15; 5:19). 박해받는 소종파는 외부자들에 대하여 자신을 정의하려 한다. 그러한 유혹에 굴복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포기하고, 요한복음이 말하듯 하나님이 계속 사랑하는 세상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그룹에 대해 부정적인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목회적 관점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또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는 생명이 없다”(53절)는 본문은 현대인의 감성으로는 충격적인 말씀이다. 현대인들은 예수가 “식인”의 은유를 사용해서만이 아니라, 주의 만찬에 참여하지 않거나 교회의 연회에 참여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 생명이 없다는 배타적인 주장 때문에 충격을 받고 놀란다. 예수는 이런 음식들이 지금의 삶뿐만 아니라 영생으로 가는 통로라고 하는 주장을 확대한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8절).

예수의 이 충격적인 말이 교회생활에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적어도 우리가 거룩한 식탁에서 먹고 마실 때, 고유하고 반복할 수없는 방식으로 영원이 시간 속에 침입했다는 것이다. 영원이 우리의 시간 안에 계속 스며들고 있다. 빵과 포도주로 기념하는 잔치는 우리를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연결시킨다. 그리스도는 영원하시고, 그래서 그와 연결된 우리도 영원하다. 이 잔치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속한(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영원한 공동체 안에 있다. 영원한 공동체는 인간의 행위나 교회의 성취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주의 죄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의 행동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것이다. “오, 하나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것은 전에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선포했지만 지금은 세상을 위하여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의 잔치다. 예수께서 요한복음에 처음 등장하실 때 세례요한은 이렇게 선포한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1:29).

해석의 또 다른 길은 “영원”이라는 작은 단어에서 발견된다. 교회의 찬양들은 “영원히 forever”와 “영원한 eternal”이라는 단어들로 가득 차있다. 최근의 사건들과 역사의 도전들은 모든 것이 덧없고, 지나가며, 존재하지 않을 운명이라고 선포한다. 우리 자신이 영원히 살고, 우리 국가가 무한하고, 우리의 조직들이 영원하게 하려는 인간적인 시도는 항상 있었다. 이것은 우연성을 능가하는 확실성을 확산시키려고 힘쓰게 하는 타고난 자신감인데,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교회는, 사람들이 말하는 “영원”이라는 것이, 아무리 오래 되었어도 일시적일 뿐인, 단지 인간적이고 우발적인 기구들의 주장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그들을, 영생의 빵을 먹으며 터덜터덜 따라가고 있다. 미국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우리가 시민으로서 향유하는 자유의 일부를 하나님의 섭리에 적절하게 귀속시킬 수 있지만, 모든 기독교인들은 우리의 지나치고 무지한 자만심 때문에 우리가 향유하는 자유와 우리가 기대하는 보호가 무너지지 않도록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긴 안목으로 보면, 모든 나라의 모든 깃발, 모든 나라의 모든 상징, 모든 나라의 모든 군대와 의회는 역사의 쓰레기차로 버려질 것이다. 그러나 (성당에서, 오막살이에서, 교외의 광채 속에서, 혹은 도시의 상가교회에서) 예수의 몸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시는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는 영원하다.

설교적 관점

요한복음은 풍성한 은유적 이미지로 주목을 받을 뿐만 아니라 반복되는 표현으로도 유명하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를 생명의 빵, 하늘로부터 내려온 영원한 빵(요 6:51)이라고 한 번 더 말하고 있다. 예수가 빵이라고 말할 때 그는 밀가루, 물, 이스트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 온”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51절).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우리를 깊고 다양한 층으로 이루어진 세상, 즉 눈으로만 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는 세상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우리 현대인은 볼 수 있거나 만질 수 있는 일상적인 세상을 사는데 익숙해 있다. 현대인은 “이것은 그냥~”이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이건 그냥 빵이야.” “오늘은 그냥 사무실에서의 또 다른 날이야.” “그는 그냥 나사렛에서 온 유대인이야.”

요한복음은 이런 현대인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 더 많은 것을 기대하도록 훈련시키려 하고 있다. 여기서 이해를 위해 넘어야 하는 벽은 성육신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우리 안으로 들어왔다(요한복음 1장). 성육신은 영적이고 종교적인 것에 대해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던 자연스럽고 일반적이며 널리 퍼져있는 이해와는 너무 달라서, 예수를 통해 우리들에게 육신(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는 장소임을 반복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이 6장 전체를 통해 예수는 천천히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성육신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제거한다. 그는 지혜로운 교사이고 열정적인 치유자이며 기적적인 표적과 놀라운 일을 행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빵”이다. 그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이다. 그는 우리가 먹어야 할 “살”이고 마셔야 할 “피” 다.

바로 이 때 성육신은 생생하게 다가오면서도 또한 혐오스럽게 느껴진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 “살”을 먹는다. “피”는 생명 그 자체에 필수적 요소이다. 레위기 법은 엄격한 유대인은 도살한 짐승의 피를 마시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래서 피를 마신다는 이미지는 특히 혐오스럽게 다가온다. 하지만 53절에서 예수는 인자의 살과 피를 진실로 먹어야 한다고 말하며 이 먹고 마시는 역겨운 일을 마지막 날 일으킴을 받는 것과 연관시킨다(54절). 우리는 단지 예수와 함께 있거나 혹은 예수를 따르는 것 그 자체로 충분히 어려운 일이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그를 먹어야만(57절) 한다.

만일 육신이 된 말씀을 성찰하는 일은 우리가 그것을 먹고 소화시켜 친밀하고 깊은 결속을 이루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냉철하고 차가운 사고로 훈련된 우리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이 비유는 바울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갈 2:20)라는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 그리스도와 진정으로 그리고 온전한 결합 없이는 그 분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의자 깊숙이 편안하게 앉아서 마치 예수가 추상적이고 몸이 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예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성육신은 우리가 일어나서 앞으로 나와 우리의 빈손을 벌리고 포도주를 마시며 빵을 씹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는 먹고 마신다는 점잖은 표현에서 씹고 벌컥벌컥 들이킨다는 보다 자극적인 표현으로 전환하고 있다.

‘말씀의 잔치, 교회력에 따른 복음서 설교 2021’에서 발췌

 

성찬식 모습. pixabay
성찬식 모습.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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