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특집] 고통과 슬픔의 공명기
[기획 특집] 고통과 슬픔의 공명기
  • 고진하 시인
  • 승인 2021.06.28 07: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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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목회연구원 예술신학 콜로키움
다섯번쨰
곰보배추를 채취하는 고진하 목사. 출처 한겨레 휴심정.

어느 해 늦가을, 나는 서울 북한산 기슭에 있는 신학대학 캠퍼스로 고정희 시인을 만나러 갔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시인과 나는 연배가 달랐지만 같은 신학도였지요. 산자락을 온통 울긋불긋 물들인 단풍은 캠퍼스 숲까지 밀려 내려와 있었습니다. 우리는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 앉아 시와 인생과 하느님에 대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해가 저물어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시인은 멀리서 찾아온 아우를 빈손으로 보낼 수 없다며 자기가 깔고 앉았던 큰 손수건에 황금빛 은행잎을 주워 차곡차곡 담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즉흥적인 퍼포먼스였죠! 그렇게 손수건에 꽁꽁 싼 은행잎을 내 품에 한 아름 안겨주며 말했습니다.

“아마 이런 선물은 처음일 걸?”

시인의 꽃얼굴엔 장난기 어린 미소가 피어 있었습니다.

“정말 값진 선물이네요. 이걸 깔고 앉으면 황금 방석에 앉는 거 맞죠?”

“어쭈, 제법인데. 머잖아 시인이 되겠는걸!”

그가 건네준 선물을 품에 안고 기숙사로 돌아오면서 나는 정말 영혼의 부자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심신이 궁핍하던 시절이라 그 값없는 선물이 큰 위로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시인은 그 무렵 시대의 아픔을 부둥켜안고 사는 이들에게 크나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습니다. 그런 여러 작품들 중 <상한 영혼을 위하여>라는 시는 인생의 고통을 긍정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것을 긍정하도록 하며, 궁극적 위로가 무엇인가를 깊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수작이지요.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세월이 조금 흐른 뒤의 일이지만, 시인이며 목사가 된 나도 위로자의 소명을 가슴에 품고 살게 되었습니다. 내가 남에게 줄 수 있는 위로란 어쩌면 손수건에 싸서 건네는 낙엽 같은 것. 하지만 나는 그런 위로자의 소명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건네거나, 손을 마주잡고 하느님을 도우심을 비는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절망의 나락에 주저앉은 이들이 두 다리에 힘을 얻고 일어설 때, 나는 내게 주어진 소명에 대해 감사하게 됩니다.

서른 해 가까이 목사로 살아온 생을 돌이켜 보면, 내가 정성을 기울여 한 일의 많은 부분은 마음 상한 영혼들을 위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곁님들이 당하는 고통과 슬픔의 공명기(共鳴器)가 되는 일. 그 일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지요.

지난봄에는, 교우 중에 한 분이 참척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참척’이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은 일을 말합니다. 나는 교우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교우 딸의 시신이 안치된 병원의 영안실로 향했습니다. 교우의 딸은 대학원을 막 졸업한 장래가 촉망되는 공학도였는데, 장기에 퍼진 암을 이기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일찍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지요.

병원 지하의 썰렁한 영안실, 교우는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이 퉁퉁 붓고 목도 잔뜩 쉬어 있었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교우의 떨리는 어깨만 가만히 끌어안았습니다. 해맑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딸의 영정 아래 앉아 있는 엄마 역시 넋이 나간 듯 말이 없었습니다. 왜 죄 없는 내 딸이 죽어야 하느냐, 하느님은 왜 사랑하는 내 딸을 이리도 일찍 데려갔느냐는 흔한 푸념 한 마디 없었지요. 다만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 표정에는 고난당한 자의 한 전형인 욥의 탄식이 서려 있을 뿐….

“아, 나의 괴로움을 달아보며 내가 당한 재앙을 저울 위에 모두 올려놓을 수 있다면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욥기 6: 2)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의 어처구니없는 죽음 앞에서 늙은 부모는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낼 뿐이었습니다. 명색이 목사인 나도 슬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한 채 같이 눈물만 섞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둘러 눈물을 닦아주려 하기 보다는 서로 눈물을 섞는 슬픔의 공명이 역설적으로 그걸 딛고 일어설 힘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 때 눈물은 어떤 시인의 섬세한 통찰처럼 ‘영혼의 부동액’이 됩니다(마종기). 눈물이 ‘영혼의 부동액’이라고? 그렇습니다. 눈물은 자비와 위로를 담고 있는 따뜻한 액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안구 속에 은밀히 숨어 있는 눈물샘은 ‘축복의 샘’이 아닐까요. 예수는 그래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마태 5: 4)이라고 한 것일까요.

마음눈을 열어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가 함께 슬퍼하며 위로해야 할 상한 영혼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습니다. 극빈의 고통, 실직의 불안, 전쟁의 공포, 환경 재앙, 영적인 공황 등 우리를 넘어지도록 하는 삶의 부정적 요인들은 허다합니다. 이런 부정적 요인을 스스로 극복하고 자기 힘으로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자기 힘만으로 일어설 수 없는 사람들이 세상엔 더 많습니다.

하지만 힘없고 연약하고 무지한 사람만 아니라 강한 자도 넘어지고 지혜로운 사람도 실족할 수 있습니다. 신심(信心)이 두터운 사람도 절망의 벽 앞에서 희망의 끈을 탁,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생의 길 위에는 숱한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그 누구도 ‘나는 타인의 위로와 격려 따윈 필요치 않아!’ 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을 ‘사이’[間]의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때론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이기도 하고, 때론 위로를 베풀어야 할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주고받는 위로는 불완전합니다. 내가 당한 슬픔과 괴로움을 함께 나눌 사람이 곁에 있어도 위로받지 못할 때가 있지 않던가요.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혼자 울부짖고 혼자 기도하고 싶을 때가 있지 않던가요.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홀로 자기 존재의 바탕인 하느님과 대면하고 싶은 갈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갈망 끝에 하느님과의 웅숭깊은 대면이 이루어질 때 우리도 시인처럼 담담히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눈물’도 ‘영원한 비탄’도 없다는 전언. 왠지 나는 이 전언이 마치 하느님의 음성처럼 들립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있을까요. 이런 위로는 사람이 사람에게 베풀어줄 수 없습니다. 눈동자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만이 베풀어주실 수 있는 것이지요.

아무도 흔들 수 없는, 하느님과의 내밀한 교감으로만 얻을 수 있는 이런 궁극의 위로야말로 곧 구원이 아닐까요.

 

 

고진하 시인

(감리교 은퇴 목사,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체스코의 새들』 『얼음수도원』 『거룩한 낭비』 『명랑의 둘레』 『야생의 위로』등 9권이 있으며, 영랑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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