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목회] 정의를 완성하는 자비
[예술과 목회] 정의를 완성하는 자비
  • 심광섭 박사
  • 승인 2021.06.11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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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구에르치노, <탕자의 귀환>, 1619. 캔버스위에 유채, 107 x 144 cm, 비엔나 예술사박물관.

탕자의 비유(눅 15:11-32) 32절 중 큰아들에 관한 기록이 7절(25-31절)이나 된다. 큰아들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큰아들로 대변되는 일반적 인간의 보편적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따로 떼어 성찰할 필요가 있다. 큰아들은 동생이 돌아와 잔치를 준비하고 들떠있는 동안 아침부터 밭에 나가 왼 종일 고되게 농사일을 했다. 그가 밭일을 마치고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음악 소리와 춤추는 광경을 목격하고 종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묻는다. 방금 일어난 일을 종이 설명하자,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눅 15:28)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자 아버지가 나와 그를 달래고 설득한다. 그러나 큰 아들의 화는 누그러지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몹시 불만을 토로한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습니다.”

작은아들이 야곱처럼 변덕스럽고 욕심이 많았던 반면, 큰아들은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성실한 아들이다. 큰아들은 진지하고 말 없는 인간임에 틀림 없다. 작은아들은 모든 것을 당연한 것처럼 요구하고 받은 것을 쉽게 써버렸다. 그동안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아무 부탁도 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친구들과 식사를 하도록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았다고 아버지에게 내뱉는 볼멘소리에 담긴 화난 감정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포도원의 품꾼들’의 비유(마 20:1-16)에서 주인이 하루 일을 끝내고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와 마지막 다섯 시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품꾼에게도 각 사람에게 처음에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똑같이 지급한다. 그러자 오전 아홉 시부터 일한 품꾼은 그것이 불공정하다고 항의한다.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 받기로 주인과 합의했다 하더라도 9시간 일한 사람과 1시간 일한 사람이 동일임금을 받는 것에 대해 9시간 일한 사람의 처지에서 항의가 들어가는 것은 정의로운 처사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비유의 초점은 공정과 정의를 그르치자는 말씀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에 온 사람까지도 제외하지 않고 삶의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는 주인의 후한 마음, 곧 은혜에 있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마 20:15). 사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나는 당신을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마 20:13) 하고 처음 온 사람의 불평에 반문하는 포도원 주인은 정의를 침해한 것이 아니라 자애를 베풀었을 뿐이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마음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계산한 세상의 질서를 깨뜨려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게 닫는다. 깨트려 닫는 것이 ‘깨닫다’의 우리말 조합이란다. 하나님은 갈 곳 없는 인간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은혜에 항변하는 것은 시샘일 뿐 떳떳한 정의감이 아니다. 후한 마음은 통합적 삶을 위하여 공정과 정의만 가지고는 부족했던 부분을 완성한다. 사실 예언서와 시편에서 하나님의 공정한 재판은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변호해주고, 가련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에게 공의를 베풀고 그들을 구해주는 것이다(시 82:3-4).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를 삶의 실재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자기 자신을 상실할 수도 있다. 종교개혁자 루터도 두렵고 복수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롭고 은혜로운 하나님으로 이르는 얼마나 멀고 먼 고통스러운 여정을 걸어야 했던가. 자연의 소재들을 사용하여 쓴 반칠환의 다음 시는 차이나고 불평등한 존재의 ‘행위’로부터 공평하고 평화로운 행위의 너른 ‘존재’ 지평이 가능함을 넘보게 한다.

황새는 날아서 / 말은 뛰어서 / 거북이는 걸어서 / 달팽이는 기어서 / 굼벵이는 굴렀는데 /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반칠환, 「새해 첫 기적」 전문

법과 <정의>는 분명 올바른 현실의 기초다. 그러나 정의보다 위에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복음과 <자비>다. 정의는 분명 하지만 그러나 냉정한 것이다. 반면 자비는 상대의 흠과 허물과 때로는 무자비했음을 잊을(forget) 수 없지만 다시 사람 되어짐을 위하여(for) 용서(forgive)하고 상대의 마음을 따사롭게 풀어준다. 법과 정의는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이루고 기존의 것을 충족시키지만 복음과 자비는 그 질서로부터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정의는 기존 질서의 성취감에 만족을 느끼게 하지만 자비는 창조적 삶의 기쁨이 흘러넘치게 한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의 질서보다는 회개하는 죄인 하나의 새 창조로 인하여 더 기뻐한다고 말한 이유이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정의는 자비와 용서다.(iustitia Dei ad extra caritas et remissio). 자비는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하나님의 정의다.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의 화가 구에르치노(Guercino, 1591~1666)의 작품은 바로 <자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아버지는 한 손으로 돌아온 아들의 등을 감싸고 있고, 다른 손은 새 옷을 들고 있다. 돌아온 아들은 더러운 옷을 벗고 있다. 오른쪽 큰아들이 아버지의 자비의 명을 받들어 새 구두를 들고 있다. 그런데 이들 세 사람은 모두 팔을 길게 쭉 뻗고 있다. 그 모습이 힘차고 늠연하게 느껴진다. 손들이 모아진 곳이 마치 소실점 같이 보인다. 돌아온 아들은 새 옷을 입고 새 구두를 신을 자격이 도통 없지만, 아버지의 크나큰 <자비>를 통해 즉시 새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심광섭 박사

(예술신학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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