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이야기를 추구하는 창조세계
[전문가 칼럼] 이야기를 추구하는 창조세계
  • 박혁순 교수
  • 승인 2021.05.29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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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끊임없이 나와 당신의 이야기를
생산하고 축적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낱낱의 존재들의
고유하고 진정성 있는 이야기들로 아로새겨지고 있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다음, 신학대학원에서 신학 수업을 시작할 때 나는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확고한 지식을 알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가령 하나님이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인지, 우주와 생물의 발생에 대해 성경적 증언이 맞는 것인지, 태어나자마자 죽은 내 쌍둥이 동생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등등 어렸을 적부터 내 안에서 해소되지 않은 의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불행히도 3년간의 목회학 석사(M.Div) 과정을 통해서 그러한 목마름은 해갈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교리와 변증을 다루는 조직신학을 더 공부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석사과정에서 2년, 그리고 다시 박사과정에서 5년의 시간을 투자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아직 모르니 더 연구해봐야 알겠다’ 정도이다.

근현대에 들어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자연학이 발달하면서 교회가 주장해온 내용들은 매우 심각한 의혹들에 직면했다. 다행히 어느 정도 해소한 주제도 없지 않고 기독교 신조의 변증을 성공해 내는 사례도 없지 않지만, 안타깝게도 보편적·공적 영역에서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자연과학적 사실이나 입증 및 반증 가능한 명제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교회가 직면하는 현실이다. 이에 신학의 위상도 매우 달라질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성경과 전승들을 문학적으로 또는 문헌학적으로 연구하는 방향으로 틀거나, 전통적 목회(사목) 사역을 뒷받침하기 위한 실천적·실용적 분야에 역량이 집중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어느덧 조직신학의 분야에서는 (매우 보수적인 노선에 서 있지 않다면) 대다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정체에 대해, 세계의 발생과 운행에 대해, 생명의 출현과 생태계의 현상에 대해, 영혼·천사·마귀 등의 영적 존재에 대해, 재림의 과정과 영생의 양태에 대해 ‘단언’하는 것을 경계하는 분위기에 처해있다. 확정된 사실이 아닌 것을 주장하다 자칫 ‘유사과학’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당신도 하나님에 대해, 세계에 대해 별 할 말이 없겠다!?’ 하며 비판할 독자가 있을 수 있겠다. 나름대로 조직신학의 ‘신론’에 관련한 방대한 분량의 저서를 집필 중인 나로서 전혀 할 말이 없을 수 있겠느냐마는 그것은 나중에 내보이기로 하고, 대신 근래에 내게 드는 통찰 하나를 남겨보겠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물론 하나님의 이끄심으로 인한 것이겠지만!) 우리 우주와 인격적 존재들은 각자의 ‘이야기’(narrative)를 만들도록 허용되어있다 사실이다. 그리고 궁극적 대단원(종말)에 이르러 아름답고 경이롭고 눈물겹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그 자산(資産)으로 남기기 위해 우주는 존재할지 모른다. 물론 그리스도교의 신학상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사(救援史)를 그렇게 묘사한다. 우주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무대라고. 말하자면 죄악과 사망 권세에 사로잡힌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희생과 부활의 대하드라마가 그 전형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만을 말하고 싶지 않다.

‘빛의 발생’(창1:3) 혹은 ‘빅뱅’(Big Bang)으로 시작된 우주에 어느 시각에 이르자, 울고 웃고 느끼고 체험하며 자기 고유성 및 본래성을 고민하는 자의식이 등장했다. 가만히 생각하면 물질적 우주에 이러한 의식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자연과학도 부정할 수 없는 매우 흥미롭고 기이한 일이다. 단세포동물처럼 생존과 증식을 위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용이한 가능성 가운데 구태여 삶에 환멸까지도 느낄 수도 있는 존재가 출현했다니! 그런데 또 그 의식들은 죽음과 생명, 고통과 만족, 불안과 평온, 잃음과 얻음, 소외와 환대 등의 대극성(對極性) 사이에 갖은 여정과 투쟁을 해야 하는 운명으로 떠밀려져 있다. 이것이 이른바 인간의 실존이다.

대극성 사이로 주어진 삶과 고난과 번민과 투쟁 등을 겪어내는 의식들은 역설적이게도 물적 우주로 하여금 비로소 소리를 내는 ‘악기’로 변모시킨다, 켜지 않으면 널판일 뿐인 바이얼린, 그리지 않으면 천조각일 뿐인 캔버스, 쓰지 않으면 종이조각일 뿐인 원고지가 울고 웃고 느끼고 체험하며 삶을 경주하는 사람들의 의도된 행위로 예술이 되듯,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의식주체들의 삶의 경주를 통해 비로소 물적 우주는 숱한 ‘이야기’(narrative)를 생산하며 일종의 놀랍고 기이한 예술적 공간 또는 예술적 매체가 되는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케사르, 칭기스칸 등과 같은 호걸만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싯다르타, 장주, 키케로 등과 같은 현자만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5세기에 동남아시아 깊은 밀림에서 사냥 중 맹수에 물려 죽은 한 가장의 이야기, 20세기에 스탈린그라드에서 참호를 지키다 전사한 무명용사의 이야기, 21세기에 실리콘밸리의 불황으로 실직한 한 미혼모의 이야기 등등이 우주에 출현했다가 허락된 시공간에 자신의 이야기들을 아로새기고 사라졌다. 그리고 인간 의식의 이야기들은 계속되고 있다. 아마 종말에 이르기까지 우주에는 엄청난 이야기들이 점멸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며 하나님과 그 창조세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하나님께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또 우리는 왜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분명히 우주는 이야기가 출현하고 사라지는 시공간(time-space)이다. 우주는 끊임없이 나와 당신의 이야기를 생산하고 축적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낱낱의 존재들의 고유하고 진정성 있는 이야기들로 아로새겨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우주 또는 세계를 하나님이 읽는 ‘다중소설’(Multi-Novel)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우리도 각자의 이야기들을 다시 반추하고 복기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그때라면 이 세계에 우리를 두신 하나님을 원망할까? 아니면 지난 삶을 저주할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대극성이 해소된 신적 시간에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를 통해 깊은 감사와 감동을 느낄지도 모른다.

인간은 허구[fiction]임을 알고서도 옛설화와 소설에 울고 웃고 감동을 받는다. 그토록 ‘이야기’라는 것은 우리의 정서와 가치관에 가져오는 영향력이 엄청나다. 이야기에 있어서 우리는 진위의 여부 및 현실-비현실의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그만큼 인간은 ‘이야기’에 매우 관대하게 정향된 존재라 할 수 있다. 하여 다음 지면에서 나는 소설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고자 한다. 이야기는 우리의 신앙과 영성의 성장에 더할 나위 없는 벗이기 때문이다.

 

박혁순 목사

(조직신학자, 한일장신대 초빙교수, 창신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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