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5년 5월 27일에 독일의 급진 종교개혁가인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가 사형당했다. 토마스 뮌처는 종교개혁 당시 독일에서 농민 반란을 이끌었는데 결국 진압군에 의해 농민 반란이 진압 당하자 그 역시 참혹한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2007년 최재호가 쓴 ‘토마스 뮌처, 혁명의 신학자’란 소논문에 따르면 토마스 뮌처는 1489년 경 하르츠 산기슭의 소도시 슈툴베르크에서 출생하여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에 가장 먼저 반응한 종교개혁 1세대라고 할 수 있는데, 1520년에는 루터의 추천으로 츠비카우에서 목사가 되어 종교개혁자로서 공식적인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토마스 뮌처는 종교개혁가로서 활동하면서 마르틴 루터보다 더 급진적인 개혁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작센 선제후의 지지를 둘러싸고 루터와 치열한 공방을 벌였고 이후에는 시의회를 통해 종교개혁과 함께 정치, 사회개혁을 실시했다. 그리고 1525년에 발발한 튀링엔 농민봉기를 ‘수확의 때’, 즉 종말로 보고 군종목사로서뿐 아니라 장수로서 싸우다가 30대 중반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마르틴 루터의 신학이 토마스 뮌처의 신학보다 다소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성향을 띤다면 토마스 뮌처의 신학은 마르틴 루터의 신학보다 다소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인 성향을 띤다고 할 수 있다. 토마스 뮌처는 참된 신앙이 신과의 관계를 포함할 뿐 아니라 보다 사회 안에서 역동적이고 보다 완전한 삶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개인의 정신세계와 학문에 국한되었던 신앙의 추상화를 극복하고 공동체적 삶의 방식을 회복하려는 종교개혁을 추진했다.
토마스 뮌처의 신학은 당대에도 많은 신학적 논쟁을 야기했을 뿐 아니라, 현재도 그에 대한 신학적 평가는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여러 가지 면에서 토마스 뮌처는 시대를 앞선 사람이었기에 당대와 극단적으로 불화한 비극적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