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임을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매임을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 이신성 기자
  • 승인 2021.04.21 15: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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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산업선교회 노동주일 설교 공모전 당선작 1등

영등포산업선교회(총무 손은정 목사)에서는 노동주일을 맞아 ‘노동주일 설교문’과 ‘노동주일 성도의 약속 10가지’를 공모했다. 이번에 당선된 설교문과 성도의 약속 10가지를 영등포산업선교회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다.

총회노동주일(4월 25일, 세계노동절 직전주일)은 제44회 총회에서 결의하여 노동의 신성함을 일깨우고,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일자리가 없어 고통당하는 실직자와 가족, 비정규직 노동자 및 일용직 노동자들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 제정된 주일이다.

총회노동주일 공모전 설교 당선작 1등(박만희)

1. 성경본문 / 누가복음 13장 10-17절(새번역)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11 그런데 거기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허리가 굽어 있어서,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었다. 12예수께서는 이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불러서 말씀하시기를, “여자야,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13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곧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14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에 분개하여 무리에게 말하였다. “일을 해야 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으시오.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 15 주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끌고 나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 16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이 매임을 풀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니,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모두 부끄러워하였고, 무리는 모두 예수께서 하신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2. 작성 취지와 주제

(1) 모든 것을 자본으로 바꿔 말할 수 있는 세계에서, 교회마저도 사람을 수단으로 삼아 쉼을 빼앗는 현실에 대한 저항.

(2) 말씀을 읽고 나누는 때와 장소에서 선언되어야 할 것은, 착취를 조장하는 삶이 아니라 쉴틈 없는 노동으로 허리 굽은 이웃들의 안식임을 전달하려는 취지.

3. 대상 / 교회 일반

4. 설교 / 매임을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일하시며, 쉬게 하시는 하나님의 평화가, 땀 흘리며 수고하는 모든 노동자에게 함께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 서론: 사람을 위한 안식

언젠가부터 쓰지 않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충성, 봉사, 헌신, 순종 같은 말들입니다. 그와 같은 단어들을 교회만큼 자유자재로 쓰는 집단이 또 있을까요. 그 말들은 교회 내 일꾼을 필요로 할 때 주로 쓰입니다. 여러 주일학교의 교사, 성가대, 찬양팀, 주방봉사, 임원, 각종 행사에 필요한 담당자 등을 세울 때마다 그것들은 소환됩니다. 사람이 모이면 일손이 필요한 거야 당연하지만, 거기에 하나님을 아무렇게나 갖다 붙이는 게 싫었습니다. 하나님을 핑계로 사람을 도구로 만들어 쉴 수 없게 만들고 소모하니까요. 당시 제 눈에 교회는 사람들의 삶과 쉼에는 무관심한 듯 보였습니다. 이렇듯 삐딱한 시선이 저를 사로잡았을 때 떠오른 질문이 ‘교회 뭘까?’였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묻는 중입니다. 교회 뭘까요. 그렇듯 거창한 질문에, 복음서 한 구절이 한 조각 해답을 주었습니다. 예수의 말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막2:27) 불온해서 굉장한 발언입니다. 어떤 복음서는 이 발언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했다고 기록합니다. 감히 안식일을 건드렸으니까요. 예수는 당시의 안식일 이해가 사람을 억압한다고, 그래서 안식일의 참뜻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안식일 법을 다시 읽고, 그것을 뒤집으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그렇습니다.

● 매임을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본문은 흔한 병 고침 사건을 다룹니다. 예수님은 치료하고 누군가는 낫습니다. 익숙한 패턴이죠. 본문은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드높이는 걸까요. 그게 전부는 아닐 겁니다. 고쳤고 나았는데, 그 후에 한바탕 소란이 있었던 걸 보면 예수님의 능력만을 드높이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때는 안식일이고 장소는 회당입니다. 회당은 지역 주민들이 모여 말씀을 듣고 나누던 장소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그렇게 하듯, 그들도 안식일에 말씀을 듣고 있던 모양입니다. 그곳에 불청객이 나타납니다. 등이 굽은 여인입니다. 본문은 따르면, 그녀는 18년 동안이나 허리가 굽은 채로 살아온 여성입니다. 몹쓸 질병이나, 후천적인 장애였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우선은 그런 거라고 해둡시다. 그 뒤 내용은 뻔합니다. 예수님을 그녀를 치유합니다. 손을 뻗어 아픈 곳을 만지고, 그녀는 나음을 얻습니다. 굽은 허리를 곧게 합니다. 감격스러운 이야기죠.

문제는 다음입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회당 담당자가 부들부들 떠는 겁니다. 본문은 그가 분개했다고 말합니다(14절). 그는 왜 화가 났을까요. 무엇이 그를 분노하게 했을까요. 분을 삭이지 못한 그는 이를 꽉 물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일을 해야 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으시오. 그러나 안식일에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14절)

맞는 말 아닌가요. 틀린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른 날 고쳤어도 됐을 겁니다. 굳이 종교적 율법이나 사회적 합의를 어겨서 문제를 일으킬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여섯 날이 있으니까요. 무려 18년인데, 낫는다고만 하면야 하루를 더 못 기다릴까요. 근데 굳이 안식일입니다. 바꿔 생각하면 꼭 안식일이라야 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놀람과 감탄 대신 돌아온 냉랭한 분노에 예수는 이렇게 답합니다. 15절과 16절 일부입니다. “너희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끌고 나가서 물을 먹이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이 매임을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매임을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되물음이 저를 매료했습니다. 속박을 푸는 일, 그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한편 질문도 생겼습니다.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등이 굽었다’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유 대상이 왜 하필 소와 나귀였는지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사람을 동물에 댄 것이니까요. 그렇게 질문하던 중에 떠오른 내용이 있습니다. 신명기 5장 14절입니다.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 너나, 너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뿐만 아니라, 너희의 소나 나귀나, 그 밖에 모든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안에 머무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하여야 한다.”

십계명입니다. 그중에서도 안식일 법이죠. 하나님에 관한 십계명 중 가장 길고, 지켜야 할 내용을 가장 구체적으로 명시한 법입니다. 특이하게도 이 계명은 소와 나귀를 포함합니다. 소와 나귀는 집안일을 하는 가축(家畜)입니다. 노동하는 짐승인 것이죠. 이 계명, 하나님의 법은, 쉬게 해야 할 대상에 소와 나귀를 포함합니다. 가축들까지도 당신과 똑같이 쉬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 법은 안식일이 향하는 안식 곧 쉼이 어디까지 향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숨 쉬는 모든 생명까지입니다. 어떤 생명도 쉼에서 빼지 못하게 합니다. 힘든데 말하지 못하는 동물이라서, 노동으로 학대받을까 염려해서 성경이 직접 소와 나귀를 챙깁니다. 명심해야만 하죠. 그러니, 안식일이 되면 닫힌 외양간을 열고, 그들을 데리고 나와 물을 마시게 한 겁니다(15절). 그런데, 소와 나귀만큼도 쉬지 못하던 존재들이 있던 겁니다. 어떤 이들은 안식일이랍시며 회당에서 말씀 펴놓고 공자 왈 맹자 왈 읊어대는데, 그것을 떠받치느라 허리를 펴지 못하던 이들이 있던 겁니다. ‘등이 굽었다’는 표현은 별다른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희귀한 질병이나 후천적 장애를 가리키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상황입니다. 도무지 허리를 펼 수 없는 누군가의 상태입니다. 굽어 버린 등은, 가혹한 노동 현실에 몸을 빼앗긴 누군가의 삶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이들을 쉬게 하라는 예수의 초대마저 박탈당한 이들의 현실을 뜻하는 말입니다. 매임을 풀어주라는 건, 그들을 쉬게 하라는 겁니다. 함께 아브라함의 딸이니 허리를 곧게 하고 안식을 누리게 하라는 겁니다. 굽은 등으로 너희를 떠받치는 이들 없는지 살피란 겁니다. 너희가 깔고 앉은 넓디넓은 율법 아래에, 허리를 숙인 채 등으로 그것을 떠받친 이들이 더는 없게 하라는 겁니다. 너희 놈들이 안식에서 빼버린 존재에게 쉼을 돌려주라는 겁니다. 안식일 법이 가축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생명을 쉬게 하는 거라면, 바로 그날에(안식일) 굽은 허리를 곧게 만드는 일은 지극히 마땅합니다. 그게 안식일이니까요. 그러므로, 이 사건은 다른 엿새가 아니라, 반드시 안식일 말씀이 나누어지던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습니다. ‘쉬게 하라! 신성함을 핑계로, 사회적 합의를 변명 삼아 쉼을 빼앗지 마라!’ 이게 그날 그 자리에서 선언되어야 할 말씀이니까요. 본문은, 긴 시간 안식에서 배제되어 허리를 펴지 못하는 누군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며 누군가의 안식을 빼앗고 또는 외면하는 우리에 관한 이야기이고요. 그러니 그야말로 그날, 그리고 오늘 선언되어야 할 복음입니다.

● 오늘은 당신들의 것입니다.

예수는 그 여인이 사탄에게 매여 있었다고 말합니다(16절). 앞에서 드린 말씀을 전제로 한다면, 누가 사탄인가요. 허리를 펴지 못하게 하는 무엇입니다. 등을 깔고 앉은 누군가입니다. 노동자들의 쉼에 무관심한 자들입니다. 사회구조가 악일 수 있습니다. 서로를 디딤돌 삼지 않으면 쉼을 확보할 수 없다고 믿게 만드는 구조 말입니다. 낮게 깔린 디딤돌일수록 허리를 펼 수 없을 테니까요. 노동자의 쉼 따위는 관심 없는 자본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면을 빌미로 더 힘든 노동에 자신을 갈아 넣으라고 부추기는 그것 말입니다. 굽은 등과 그들의 목숨에는 무관심한 돈 말입니다. 때로 말입니다. 사탄은 교회(회당)일지도, 혹은 주일(안식일)일지도,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낸 하나님일지도 모릅니다. 안식을 선언해야 할 때와 장소에서 우리가 누군가의 등을 짓누르고 있다면 말입니다. 애석하게도 사탄은 자신이 그것인지조차 모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해석했을 회당장이 안식을 안식일 바깥으로 밀어버리려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말씀과 율법과 안식을 이유로, 안식 없음을 방치한 회당장처럼 말입니다. 남은 엿새를 말하지만, 18년을 방치했으니 혐의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안식을 침해했으니 말입니다.

노동이 신성한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쉼이 필요한 노동자들이 수두룩하다는 것만큼은 잘 알겠습니다. 쉼을 빼앗는 것만으로 부족해서, 노동자들의 등과 허리를 누르고, 누르고 또 눌러서 프레스에 집어넣어야만 안락함을 얻는 이들이 있다는 건 알겠습니다. 남은 엿새를 핑계로 안식을 뒤로 미루고 미루는 세계를 알겠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쉼을 얻기 위해 노동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추운 길바닥에서, 좁은 굴뚝과 철탑과 크레인에 누워 힘든 잠을 청하느라, 굽어가는 등과 허리가 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말씀을 읽은 자리에서 선언해야 할 복음은 무엇일까요. 바로 오늘, 매임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외침입니다. 지금 당장, 굽은 등을 곧게 펴도록 해야 한다는 의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쉬러 오라는 초대장을, 노동자들에게 되찾아 건네는 일입니다. ‘오늘은 당신들의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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