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시론- 장수진의 시 ‘서울의 혜영이들’
[전문가 칼럼] 시론- 장수진의 시 ‘서울의 혜영이들’
  • 장준식
  • 승인 2021.04.10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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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영아 밥은 먹고 다니니

엄마 메시지 치지 마세요

내 시를 읽어드릴 수 없어요

나는 오늘 밤에도 바람에 스치우는 별을

찢어버리는 년이에요

우리의 우울을 합치면

껍질 벗긴 바나나로도

서로 찔러 죽일 수 있을 거에요

ㅡ 장수진의 시 ‘서울의 혜영이들’ 부분, 시집 <사랑은 우르르 꿀꿀>에 수록

 

1980년대 대학생들의 최고 키워드는 '데모'였다. 1990년대 대학생들의 최고 키워드는 '취업'이었다. 현재 대학생들의 최고 키워드는 '생존'이다. 1980년대 대학생들에게는 '낭만'이 있었고, 1990년대 대학생들에게는 '꿈'이 있었다. 현재 대학생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그래서 한국은 '헬조선'이라 불린다.

1997년 IMF 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왕은 '금융자본'이다. 지금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자본(돈)'이 세상의 왕노릇을 하고 있는 시대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자본이 우리에게 대항해야 할 '적'으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병철은 마르크스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자본은 자신의 번식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착취하는 것이다. 자유 경쟁 속에서 자유롭게 해방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자본이다"(심리정치 13쪽).

신자유주의 체제가 무서운 이유는 눈에 보이는 적이 없다는 것이다. 넘어야 할 산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자기' 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해야 한다'는 외적 강제 대신 '할 수 있다'는 내적 강제를 통해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자기 착취를 하게 끔 유도한다. '할 수 없다'며 내적 강제인 '할 수 있다'에 저항하는 자는 무능력한 사회의 낙오자로 전락하고 만다.

요즘 대학생들은 모여서 ‘데모’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공공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모여서 ‘꿈’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넘어야 할 산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따로 각자 알아서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자기계발’에 힘을 쏟을 뿐이다. ‘할 수 있다’는 자기 동기, 자발성, 자기 주도적 프로젝트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아는 신자유주의적 주체이다. 즉, 신자유주의 체제에 묶여 있는 주체이다. 한병철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목적에서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다”(심리정치 11쪽). 여기서 존재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무한한 자유 경쟁의 토대를 만들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주체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고 오히려 노예의 상태에 놓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체제의 주체는 개개인이 고립되어 있어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을 기회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자유는 근본적으로 관계의 어휘이다”(같은 책 12쪽). 결국 타인과 함께 자아를 실현할 기회를 박탈당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개인은 우울할 뿐이다.

시인은 신자주유주의 주체에 ‘혜영’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 주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서울에는 ‘혜영이들’이 가득하다. 시인은 다른 시에서 혜영이들의 ‘슬프고 우울한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자본주의가 몰려온다. 슬프고 우울한 감정이, 그것은 블루스…”(백색 숲의 골초들). 이 우울한 주체, 혜영이들은 “오늘 밤에도 바람에 스치우는 별을 찢어버릴” 수밖에 없다. 누가, 어떻게 ‘혜영이들’에게 시를 다시 읽을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장준식 목사

세화교회 목사

예술목회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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