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칼럼] 벨라스케스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전문가칼럼] 벨라스케스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 임재훈 목사
  • 승인 2021.03.27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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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벨라스케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Christ Crucified), 1632, oil on canvas,
248x169cm, Museo del Prado, Madrid

1. 지중해와 북해 유역의 무역에서 오랫동안 소외되었던 스페인이 유럽역사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지니게 된 것은 대서양으로의 출로를 찾은 15세기 대항해시대(Age of Discovery)

이후이다. 그라나다 알람브라를 제압함으로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세력의 축출을 위한 8세기에 걸친 레콩키스타(Reconquista)가 비로소 완결된 1492년은 카스티야왕국 이사벨라여왕과 아라곤공국 페르난도 2세의 혼인으로 스페인 통일왕국의 실질적인 원년이었으며, 이 해는 동시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해였다.

르네상스의 흐름을 수용한 스페인이 리베라, 수르바란, 벨라스케스와 같은 대가들의 출현으로 17세기 스페인 바로크를 구현해 유럽미술의 흐름에 뒤늦게 기여하게 된 것은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연유에서 기인한다. 스페인 바로크는 유럽의 다른 지역에 비해 보다 직접적으로 이탈리아 카라바조와 플랑드르 미술의 경향을 반영하였으며 동시에 중세 전통에 기반 한 신비주의 영성의 시각적 구현이라는 독특한 지역성을 지닌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2. 스페인 미술 황금시대(Siglo de Ore)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 1599-1660)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Christo crucificado, 1632)는 자연적인 리얼리즘 묘사를 통해 역설적으로 영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바로크 기독교미술의 명작이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몸을 비추는 밝은 빛과 성 금요일 정오 이후를 나타내는 어둠의 배경은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3-1610)의 강한 명암대비(Tenebrism, 테네브리즘)의 영향이다. 카라바조는 화면을 구성하는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 충격을 주고 극적인 효과와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였는데, 벨라스케스에게서는 빛의 효과가 자제되고 있다.

1628년 스페인을 방문한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는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에게 회화연구를 위한 이탈리아 유학을 권유한다. 일 년 반(1629-31) 동안의 이탈리아 체류를 마치고 귀국한 후에 제작한 작품이라서 일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는 원래 세비야화단의 보데곤(Bodegón) 정물화가로 출발해 철저한 객관적 사실주의를 추구하였던 벨라스케스의 일반적 화풍과 달리 예외적으로 고전주의 미술의 경향이 느껴진다. 고요한 포즈의 그리스도의 몸과 이상화된 얼굴과 기울어진 고개 등의 고전적인 분위기는 내러티브 효과를 더해준다. 영성과 신비를 담은 내러티브는 20세기 들어와 미겔 데 우나무노(Migael de Unamuno)의 시 ‘벨라스케스의 그리스도’(El Cristo Velázquez, 1920)를 위한 영감을 제공하였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는 골고다라는 특정의 시·공간이 아닌 보편적인 공간, 영원의 시간에

속해 있는 인상을 준다. 원근법에 의한 깊이로 조성되는 공간감을 부정한 벨라스케스 특유의 화면의 평면화가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그의 공간감에 대한 실험은 후에 마네를 비롯한 인상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3. 주목되는 부분은 커다란 못 하나로 양발을 못 박는 14세기 이후 책형의 묘사가 아닌 중세적 전통으로 복귀해 양발에 하나씩 못이 박힌 모습이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기 위해 그분의 고통까지도 체험하고자 했던 성 프란체스코(San Francesco d’Assisi, 1181/2-1226)의 가르침 이래 중세 미술의 승리의 그리스도(Chritustus Triumphans) 도상은 고난의 그리스도(Christus Patiens) 도상으로 변화한다.

벨라스케스의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는 그리스도는 배경의 어둠으로 표상되는 죄와 사망,

어둠의 심연에 고요함과 숭고함, 의연함과 위엄으로 맞서고 계시다. 작품에 배여 있는 고결한 고요와 심오한 신비의 시정(詩情)은 카라바조와 루벤스를 넘어서는 스페인 영성에 기반 한 벨라스케스만의 회화세계이다.

십자가 패에 히브리, 로마, 헬라 3개 국어로 기록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Iesus

Nazareus Rex Iudaeorum, INRI)은 이 일이 때가 차서 이루어진 보편적, 세계사적 사건임을 나타낸다.

그 아래 숙여진 머리는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 요 19:30) 하신 분의 평화이다.

임재훈 목사 독일 칼스루에벧엘교회 담임 유럽기독교 문화예술연구원장 예술과목회연구원 연구위원
임재훈 목사
독일 칼스루에벧엘교회 담임
유럽기독교문화예술연구원장
예술목회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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