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목회] 침묵의 신학, 침묵의 미학
[예술과 목회] 침묵의 신학, 침묵의 미학
  • 박혁순 교수
  • 승인 2021.03.13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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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기 40:3-4)

그리스도교 신학 전통 가운데 하나님을 신앙뿐만이 아닌 이성적 사유로 이해하고 언어로 전달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 곧 ‘긍정’(kataphasis) 또는 ‘긍정의 길’(via positiva)이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을 취하는 신학을 ‘긍정신학’(theologia positiva 또는 kataphatic Theology)이라고 한다. 반면에 하나님에 관해서 ‘~이 아니다’ 하는 방식 밖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고 보고, 일체의 정의·설명·형용을 부정하는 입장이 곧 ‘부정’(apophasis) 또는 ‘부정의 길’(via negativa)이며 이 방식을 취하는 신학을 곧 ‘부정신학’(theologia negativa 또는 apophatic theology)이라고 한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러한 부정신학이 오히려 교리나 신조보다 기도와 명상을 통한 하나님에 대한 직관, 조우, 합일의 체험 등을 얻는 것에 더 관심을 갖는다.

‘부정의 길’이 그리스도교 전통에 크게 부각된 것은, 시리아 출신으로서 5~6세기경 활동하며 ‘디오니시우스’(행17:34)의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한 익명의 신학자, 위(僞)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에 의해 동방정교회로부터 확산된 이후이다. 그는 “신비적인 것을 찾으려면 인간의 지성으로 이해하고 인식하는 모든 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의 참모습을 ‘이름 없음’(Namenlosigkeit)으로 언급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 붙여지는 형용이나 술어는 무효화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나님을 ‘선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고 했다. 하나님은 세계로부터 취하는 모든 유한적 성질과 형식 등을 초월하기 때이다. 위디오니시우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름할 수 없는 이름’인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고, 또한 ‘신비로운 무지의 어둠’이라는 부정성 가운데 하나님이 존재함을 깨닫는 일이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히려 ‘무지의 지(知)’(Bewusstsein des Nichtwissens)이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하나님의 현존과 진실에 다가가는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

위디오니시우스에 앞서 초기 그리스도교에 사상적 기틀을 놓은 교부(church father)들에게서도 하나님의 정체, 특히 성부 하나님의 신비에 관하여 불가형언성(ineffability)과 불가해성(incomprehensibility)을 깨닫는 것은 중요한 몫이었다. 가령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는 서신 가운데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그분은 침묵으로부터 나오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 자신을 드러내셨다”고 표현했다. 유스티누스(Justinus) 역시 하나님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런 칭호는 “어떤 다른 설명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인간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가지고 있는 일종의 판단”이라고 쓰고 있다. 부정의 길과 신비 신학을 추구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of Nyssa) 역시 하나님에 관해 “무한하고 무규정적 실체의 거대한 바다”라는 표현을 썼다. 그는 삼위일체 논쟁을 접하면서도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을 왜곡시킬 수 있고 보았다. 오히려 알고자 하는 의도를 포기할 때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하나님에 관련한 불가해성 및 불가형언성에 관해 아구스티누스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다’ 라고 언제 그대가 말할 수 있겠느냐? 그대가 실제로 하나님을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네가 보게 될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셋째 하늘로 들려 올라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을 들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만일 그가 들은 말이 형언 불가능한 것이었다면, 그 말을 한 분은 도대체 어떤 분이겠는가?

이제 곧 우리의 눈을 부시게 하고 가슴을 뛰게 만드는 봄의 정경이 펼쳐질 시절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볼 수 있고, 맡을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매개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다가서는 것일까? 마침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묵상하는 사순절을 지내고 있다. 신학적으로 추정하기를, 하나님의 아름다움 또한 진리와 선(善)의 정점처럼 십자가에 마련하셨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처참한 몰골로 죽은 30대 목수의 피범벅에서 아름다움을 찾아야 할까? 행여 그 엽기적인 주검에서 미적 쾌감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내가 염두하는 것은 그 비련한 장면을 넘어 근원적인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 심미안이 요청된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줄 때, 신적인 모든 영광과 아름다움도 포기하셨으리라 본다. 십자가 사건 가운데 아무것도 붙들거나 집착하지 않으신 하나님! 보여줄 것도, 뽐낼 것도, 자랑할 것도 다 무효화하신 하나님. 그렇다면 그때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모든 빛깔을 다 품은 빛이 정작 스스로를 투명하게 하듯, 하나님은 모든 영광과 아름다움을 버리면서 스스로를 완전히 아름답게 하신 것이 아닐까? 사실 사순절의 하나님은 신자에게 감동과 감사를 일깨운다. 그리고 찬송과 경배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각자가 느끼고 경험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 가운데 시와 그림과 노래를 지어 올린다.

그런데 나는 문득 이런 각성을 하게 된다. 골고다 십자가에서 맞닥뜨리는 하나님의 투명한 아름다움은, 욥의 사례처럼, 우리에게 오히려 침묵을 청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정작 십자가의 진실을 가장 잘 아는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철저히 침묵했듯이. 모든 것을 비우시고 내려놓으신 신성에 조우하는 인간의 길은 그렇듯 침묵의 길일지 모른다. 아름다운 침묵. 신적인 아름다움에 반응하는 침묵.

박혁순 교수
한일장신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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