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호] 두렁바위에 흐르는 눈물
[113호] 두렁바위에 흐르는 눈물
  • 이창연 장로
  • 승인 2021.03.10 14: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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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주의는 이 나라를 통째로 빼앗아 갔다. 인권과 자유, 말과 글, 이 땅에서 수확된 곡물과 재산, 심지어 성과 이름까지 모두 강탈해갔다. 이 땅의 남자는 전쟁터와 탄광으로, 여자는 공장과 정신대로 끌려갔다. 전국에서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1919년에 일어난 삼일운동의 물결은 경기도화성군 향남면 제암리 두렁바위골에도 거세게 밀어닥쳤다.

제암리 마을 사람들은 4월 초순에 이웃 발안 장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주재소에 잡혀가서 심한고문을 당하고 풀려났다. 얼마 뒤인 4월 15일에 일본순사와 헌병들이 아리따 다께오 중위가 이끈 일행이 제암리에 도착하여, 만세운동 때에 그들이 저지른 야만적인 행위를 사과하겠다고 예배당으로 사람을 모이라 했다.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한 사람 중에 나오지 않은 사람은 꼭 나오도록 채근하였다. 이 운동에 참가했던 장정들이 모이자, 아리따 다께오는 몇 마디 훈시를 하는체하다가 예배당 밖을 나와 밖에서 예배당 문을 잠그고 집중사격과 동시에 예배당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그들은 이웃 고주리에 가서 여섯 명을 나뭇단에 묶어 불을 지르고 총을 쏘았다. 그 엄청난 사건 며칠 후 그때에 의료선교사이던 스코필드 박사가 찾아와 잿더미가 된 예배당 터에서 엉클어진 유골들을 모아 들것 여덟 개에 담아 거기서 얼마쯤 떨어진 언덕에 한꺼번에 묻었다. 여러 증인들 말에 의하면 제암리 사건에서 희생된 사람은 모두 스물아홉 명이었다. 그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었으나 천도교인들도 아홉 명쯤 포함되어 있었다고 했다.

제암리 두렁바위골은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안 씨 집성촌이다. 희생자 스물아홉 명 중 스무 명이 안 씨 문중이었다. 전동례는 1898년 싸리골이라고 부르는 화성군 봉담면 세곡리에서 태어나 열네 살이 되던 1912년 10월 5일에 제암리에 사는 안진순과 혼인했다. 1914년부터 남편의 권유로 교회에 출석했는데 1919년에 일본의 만행으로 남편을 잃었다. 그 뒤로 홀로 두 자식을 키우고 시부모를 모시면서 남편의 권유로 시작한 신앙생활을 남편 못지않게 신실해 감리교교단에 속한 제암교회에서 장로장립을 받았다. 그리고 일평생을 교회에 충성하였으며 불굴의 순교정신으로 육이오 때에도 교회를 사수하였고, 실신한 믿음과 봉사로 1966년에 표창을 받았다. 그것 말고도 많은 상을 탔다. 그러나 그가 받은 표창장 따위는 장롱 위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 그의 세상살이에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다.

증언 당시 여든세 살이었던 전동례는 여태까지 살아남은 이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었다. 당시 집집마다 불을 질러서 이 마을의 서른 채가 넘는 집들을 두 채만 빼고 모두 태워버리는 것을 눈으로 직접 봤다. 이 땅의 사람치고 고통스럽지 않은 삶을 산 사람은 몇이나 될까마는 전동례 만큼 모질디 모진 삶을 산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는 일본제국주의의 손에 집과 남편을, 그의 생활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그 어려운 시대에 식솔들을 이끌고 힘겹게 살았다. 그리고 해방된 뒤에도 그의 형편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들들이 죽고 손자, 증손자까지 키워 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다.” 라는 누가복음(23:34)을 되새기면서도 그는 증언당시에도 “생각만 해도 분하구 원통해서 일본사람들 용서하구 싶지 않다”고 했다.

1965년 10월 28일에 일본에서 기독교방문단이 찾아왔을 때에도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죄 값으로 예배당을 새로 지어주겠으니 용서해달라고 했으나 그는 반대했다. 그러나 감리교 교단의 결정에 따라 1968년 2월에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일본에서 보낸 사백만 엔과 여러 교회에서 헌금한 천만 원으로 교회를 세웠다. 이렇게 세운교회의 벽에는 “.....일본인들의 요청에 따라 우리가 화해함을 기념하기 위하여......”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자신은 일본인을 기독교 정신에 따라 용서하려고 노력한 적은 있어도 일본인들과 화해한 적이 없으므로 그 말이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예배당에 가도 그 앞을 지나갈 때에는 딴 곳을 보고 얼른 지나친다고 했다. 1981년 3월 10일 뿌리깊은나무에 증언하였고 1992년 11월 8일 96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하버드대학교 램지어 교수는 ‘정신대에 끌려간 여성들이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 성노예가 되었다’고 발표한 논문이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 일본은 진심으로 잘못을 사과해야 한다.

이창연 장로(소망교회, NCCK감사)
이창연 장로(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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