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데겔 설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달의 데겔 설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 이신성 기자
  • 승인 2021.02.26 12: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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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28일 사순절 둘째 주일
마가복음 8장 31-38절

 

신학적 관점

예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은 마가복음과 우리의 신앙생활 모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그때는 물론 지금도)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다. “당신은 메시아입니다”라는 베드로의 모범적 답변은 이 모든 것을 기독교적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극적인 치유, 수수께끼 같은 비유, 믿을 수 없는 기적, 파격적인 개방성 등은 메시아적 행동 양식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걸림돌이었던 예수는 병고치는 자, 가르치는 자,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자, 모든 이를 받아들이는 자가 된다. 따라서 우리도 보살피고, 분별하고, 새로운 이를 환영하고 모든 사람들을 환대해야 한다. 그러나 모범적인 신앙고백 뒤에 따라오는 것은 듣기 언짢은 내용이었다.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버림받고, 큰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한다. 베드로의 응답을 보면 이 새로운 가르침이 좋은 소식으로 다가오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베드로가 겪었던 충격과 반감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고통당하고 죽임당하는 메시아의 관점에서 이 이야기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야기의 결말, 즉 부활의 영광스런 승리, 승천, 성령의 풍성한 은사, 아직 살아있는 제자들의 활약 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사순절 기간에도 우리는 넘치는 연민으로 모두를 환영하는 예수나,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에 주목하지, 고통과 피에 찌든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죽음이 복음서와 복음 자체의 핵심 주제인데도 말이다. 따라서 베드로와 같이 우리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온전한 답을 내지 못한다. 마가복음의 핵심사상은 루터가 말한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과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의 대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영광의 신학은 자명하게 받아들여지는 삶의 원칙과 신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당연히 행동할 것으로 기대되는 방식에 근거한 신학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신학은 고통과 죽음을 통해 신이 당신의 약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에 근거한다. 영광의 신학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원하는 것이고, 십자가의 신학은 사람들이 신에 대해 상상하는 모든 기대를 부정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권능이 아니고 약함 속에서 드러난다. 하나님의 지혜는 자명한 경구를 통해 드러나지 않고 비유와 역설에 가려져 있다. 하나님의 생명은 죽음 속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예수는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영광의 신학)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고자 하는 사람들(십자가의 신학)은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욕망이나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확실성, 위험, 고난 등, 즉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이 없다고 판단하는 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은 늘 도와주고, 치유하고, 환영만 하는 낭만적인 예수상에 근거한 기독론을 거부한다. 마가복음은 인간의 능력 향상만을 위한 기독론도 거부한다. 예수가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은 그의 몸을 인식하고, 제자도란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주석적 관점

마가복음에서 절정의 순간 중의 하나는 베드로가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8:29)라고 제자들에게 예수의 진정한 된 지위를 처음으로 인정한 순간이다. 오늘의 본문은 메시야됨이 의미하는 것과 제자도의 모든 것을 명확히하는 연속 대화이다. 이 주제-예수의 메시야되심과 진정한 제자도의 본질-는 이야기가 점점 더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고 제자들이 그의 운명에 대한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면서 나머지 복음서의 주요한 특징이 된다. 인자는 반드시 고난을 받을 것이다(8:31-33). 인자는 수수께끼 같은 칭호이다. 그 뿌리는 다니엘서에 나오는데, 하늘에 계신 분으로 모든 백성들을 지배하는 왕권이 주어진 분이다(단 7:13-14).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가 여러 번 자신을 가리키는 칭호로 사용 한다. 이 본문 전에 예수는 지상에서의 권세를 정의하면서 인자라고 칭했다(2:10, 28). 또한 이 말의 위치가 그의 메시야됨의 본질을 해석하고자 함인데, 이미 인정했듯이 인자가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그리고 살아난다는 것에 관해서이다. “반드시”란 단어가 단순히 고난, 죽음, 부활이 불가피하다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9:12; 13:7-11 참조). 베드로는 그를 바짝 잡아당기고, 항의하였다. 마가에서 예수는 사탄이나 더러운 영(1:25; 3:12; 9:25)을 꾸짖고,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시고(4:39), 제자들과 군중들은 과도한 청원자들을 꾸짖었다(10:13, 48). 하지만 제자가 그의 선생을 대하는데는 부적절한 방식이다. 마가는 베드로가 왜 이런 방식으로 반응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문맥적으로는 인자인 메시야가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예수의 제시에 대해 반대하는 것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예수의 메시야됨이 보다 더 전통적인 기대 즉 왕권, 권력과 승리(시 2편; 솔로몬의 시편 17장 참조)를 따라야 한다고 여기는 듯하다.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반응도 마찬가지로 극적이다. 예수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셨는데, 이것들도 또한 베드로의 항의와 연루되어 있는데, 그들의 제자도가 예수의 메시야도의 본질을 돌아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의도적으로 제자들이 보고 듣도록 예수는 베드로가 인자가 고난받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예수를 시험하는 사탄(1:14-15)이라고 폭탄발언을 하고 있다. 메시야의 고난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이해를 앞세워 하나님의 계획을 거부하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제자들 또한 고난을 받아야 한다(34-38). 다음 절들은 방금 발생한 것의 의미를 발전시킨다. 메시야가 고난을 받아야 한다며, 그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날카로운 일별과 함께 제자들이 베드로와 논쟁을 하도록 한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예수는 계속 같이 있었던 군중들에게도 제자들에게 한 가르침을 주려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의 말씀이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열두 제자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 잠재적인 제자들도 예수가 고난을 받고 목숨을 버리므로 얻고자 했던 예수와 같이 고난을 기꺼이 받고자 준비해야 한다. 본문은 인자에 관한 두 번째 선언으로 결론을 내리는데, 재림에 초점을 두고 경고한다. 세상의 기준을 채택하고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생각하며 고난받고 로마 십자가에 돌아가신 메시야를 부끄럽게 여긴다면 자신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광에 싸여 돌아 올 때에 배척당할 것이다.

목회적 관점

거의 모든 기독교 예배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상징에 초점을 둔다. 교회들마다 자기들만의 건축 양식, 전통, 신학의 기준을 적용하여 십자가의 모양을 선택하지만, 예배당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그곳이 기독교의 예배 공간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대부분의 기독교 예배당에는 물론 강단과 성경, 초와 성찬상, 의자와 난간과 같은 다른 상징들도 있다. 다양한 교파에 걸쳐 존재하는 단 하나의 믿을 만한 상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신약의 모든 책들은 예수의 구속 사역을 규정하는 핵심으로 십자가를 지목하기 때문에 이것은 적절하다. 어떻게 이해하든, 로마의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은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갈라놓는 죄와 죽음의 넓은 간격에 다리를 놓은 것이다. 게다가 십자가 처형이 없으면 부활 안에서,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결정적인 승리가 가시화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것이 기독교 예배 공간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제시되든지, 신앙의 중심적인 상징이며 나사렛 예수의 여정의 적절한 마침이다. 왜 모든 예배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에 두면서, 우리 자신의 십자가는 어디에서도 상징화하지 않을까? 마가는 예수가 그의 제자들과 제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것을 복음의 중심에 둔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가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예수가 다른 사람들을 처음 부르신 것이 사도가 되거나 안수를 받거나 혹은 심지어 교인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 자신의 길을 가신 것처럼, 살아계신 하나님과 함께 자기 자신의 신앙의 여정을 책임지고 떠나는 그의 제자가 되라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높이 들어 올리는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설명된 신앙의 이야기를 너무 자주 무시한다. 제자도는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과, 놀랍고 궁극적인 구원을 발견하도록 우리가 받은 것을 주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는 가끔 그것을 설교하고, 때로는 그것을 실천하기도 한다. 예배의 마지막 말은 회중을 향한 우리의 축도인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권고일 때가 많다. 하지만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가 앞서 걸어가신 희생의 여정을 우리 자신이 전적인 책임을 지고 가라는 예수의 부르심에 대한 영구적인 상징이 없다는 것이, 교회가 제자 대신 회원으로 채워지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마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듣고 새롭게 받아들인 제자로의 부름의 상징들, 가정과 가족, 일과 거래, 봉사와 놀이의 세계로 돌아갈 때, 우리 예배당을 나서면서 우리 각자를 위한 다양한 십자가들을 지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로 가는 여정을 온전히 기억하기 위해 구성된 사순절은 십자가를 향한 예수의 여정의 온전함을 기억하면서, 우리를 제자로 부르시는 예수의 요청에 응답하기 적합한 때이다. 이 40일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놀라운 힘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내재된 힘에 대해서도 숙고할 것이다. 이 절기에, 우리의 예배당에 있는 십자가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만 묵상하지 말고,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모든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와 함께 사랑과 섬김의 길을 가라고 요청하는 예수의 그림도 함께 묵상하는 것이 현명하다.

설교적 관점

사순절 기간에 가장 중요한 질문은 “예수의 신실한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뷰크너(Frederick Buechner)는 세례 후에 예수께서 40일간을 광야에서 머무르면서 예수가 되는 의미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었음을 상기시키면서, 그리스도인들도 사순절 기간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여러 면으로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가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그 답을 찾아가고 있다. 우리는 메시아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기 이전에 먼저 예수에게 메시아는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예수가 본문에서 다루는 것은 이 두 가지 질문이다. 그의 대답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받아들일 수 없다.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1세기 유대인들 간에 다르긴 했지만, 메시아가 로마의 압제로부터 유대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고 갈릴리는 이 혁명을 실현하기 위한 온상의 역할을 하였다. 예수를 따르던 갈릴리 제자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누구도 고통을 당하고 죽는 메시아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난, 거부, 죽음이 언급되었을 때 듣기를 중단한다! 그들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터무니없고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의 죽음에 대한 것이 들렸다 할지라도 그 부분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예수의 시나리오 중 가장 어리석은 것이다. 또 부활은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메시아는 결코 고난을 당하거나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께서 “명백히” 가르친 것이었다 (32a). 예수가 말하는 메시아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은 불신앙으로 이어진다. 메시아의 길을 가는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한 베드로는 이미 바로 전에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했지만(29절) 그래서는 안된다고 펄쩍 뛴다. 베드로는 예수에게로 가서 자신의 팔을 그에게 두르고 메시아라는 직책에 대해 말한다. “고난, 거부, 죽음은 메시아의 길이 아니다. 명성, 권세, 지배가 메시아가 가는 길이고 권세와 힘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다윗의 보좌에 앉는 것이다. 우리는 왕관을 따라 여기까지 왔지 십자가가 아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선입견으로 눈이 가려져 있었다. 메시아의 과제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으로 인해 정작 메시아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들 또한 얼마나 이런 죄를 범하고 있는가? 교만하게도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심지어 예수 자신의 말씀조차 우리를 설득 할 수 없다. 존재방식에 대한 우리의 편견, 전제, 선입견등으로 우리의 눈이 가려져서 거기서 벗어난 다른 것은 믿지를 못할 것이고, 우리를 죽음에서 살아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라고까지 생각한다. 물론 우리는 결코 우리의 말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예수께 항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항변”은 보다 상냥하고 점잖다. 우리는 예수를 점잖게 무시하고 무관심하게 대한다. 우리는 결코 그의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리지 않을 것이고 단지 우리는 그를 죽게 할 뿐이다!

자아가 나를 지배하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나 왕국으로 향하는 고통없는 지름길을 찾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대신할 다른 길을 계속해서 찾아보려할 것이다. 하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때 비로소 예수를 따를 수 있다. 우리 목숨을 부지하려는 모든 노력은 무의미하다 (35-38절). 다른 길을 찾으려는 모든 노력은 그 길을 곧 십자가의 길을 보여주신 분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진정한 제자의 길이다. 결국 진정한 메시아의 길과 참된 제자의 길은 상호 연관되어 있다. 결국 예수를 있는 그대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생명을 내어준 고난 받는 자로 받아들이려 할 때, 우리 또한 우리를 이해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를 수 있다.

‘말씀의 잔치, 교회력에 따른 복음서 설교 2021’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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