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흑백논리가 품고 있는 모순
[전문가 칼럼] 흑백논리가 품고 있는 모순
  • 이정배 교수
  • 승인 2021.01.07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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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 리 존스 감독의 《더 선셋 리미티드》(2011)
영화 '더 선셋 리미티드' 포스터

영화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장치는 제한된 공간과 한정된 시간을 설정해놓고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공간을 제한하기 위해서 감옥, 동굴, 우주선, 빌딩 등의 배경을 설정해두고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한다. 영화가 장면을 일정한 공간에 가두어두면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은 오로지 등장하는 인물에게 집중하게 되는 효과를 얻는다. 시간을 한정시켜놓으면 관객 마음에 긴장감을 지속시킬 수 있다.

그래서 영화들이 종종 해가 진 어두운 밤에 시작하여 아침 해가 떠오르는 시간까지를 한정시켜놓는 걸 즐겨한다. 비슷한 예로 폭탄을 설치하고 카운트다운을 실시하는 것 역시 시간을 한정시켜두어 관객들의 마음을 오로지 영화 내용에 집중시키려는 속셈이 깔려있다. 영화 《더 선셋 리미티드》는 시간과 장소를 최대로 집약시켜놓았다. 영화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행동에 집중하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따라서 한가운데 둥근 탁자가 있고 긴 의자와 혼자 앉을 수 있는 의자 그리고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과 공간 밖으로 나가는 길이지만 굳게 닫힌 철문 사이를 오가며 대화하는 두 사람의 움직임과 시선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등장인물은 ‘화이트’라는 사람과 ‘블랙’이라는 두 사람이 전부다. 이웃집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목소리로만 존재할 뿐 실제 등장하진 않는다.

두 사람의 본래 이름도 등장하지 않고 자살하려던 백인과 그를 구해서 데리고 온 흑인이 성서를 가운데 두고 논쟁하는 방식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논쟁 내용에 너무 집중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움직임에 주목하는 것이 좋다. 논쟁의 주제가 성서의 가치, 하나님의 존재, 삶의 의미, 삶과 죽음으로 옮겨가면서 진행하지만,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다. 차분하게 각자의 논리와 이야기를 펼쳐가면서 서로의 입장과 견해 차이를 보여줄 뿐이다.

교수이면서 무신론자이자 허무주의자인 백인은 논리적으로 의견을 전개하고, 힘들게 살아온 흑인은 비유와 이야기를 통해 생각을 펼쳐나간다. 영화는 두 캐릭터를 모순적으로 묘사했다. 백인은 검은색 옷을 입었고, 흑인은 흰색의 옷을 입었다. 백인 교수는 지성인들이 모여 있는 대학의 교수들은 서로를 혐오한다고 고백하고, 다른 사람의 자살을 막는데 열심인 흑인은 살인죄로 교도소에 수용된 과거를 고백한다.

백인은 블랙커피를 즐기고 흑인은 물마시기를 좋아한다. 많은 책을 읽은 지식인 교수는 지식의 결론이 죽음이고 무의미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흑인이 독서량이 적고 성서밖에 모르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흑인은 지식을 가지고 세상을 부정하려는 핑계로 사용하는 것과 외로움과 허무에 빠져 사는 백인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격하지 않게 자신의 논리를 펼쳐나가면서 의견이 마주치고 서로의 모순된 부분들이 등장한다. 일주일에 세 번 역을 지나는 고속열차 시간을 체크하면서 한 사람은 자살을 계획하고 다른 한 사람은 자살할 사람들을 구해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결국 자살하겠다는 백인을 설득하지 못해 문을 열어주고선 ‘그를 도와주길 바라셨다면 왜 저런 언변을 안 주셨지요?’라고 절규하는 사이 창밖으로 태양이 떠오르며 영화가 끝난다.

이와 유사한 장면을 복음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율법 학자와 예수님이 논쟁하는 장면을 보면, 논리적으로 무장된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모순된 이야기를 꺼낸다. 예수님은 그들의 논리에 휘말리지 않고 더 크고 근본적인 개념을 말씀하거나 비유를 통해 스스로 안고 있는 논리적 모순을 깨닫도록 만든다.

율법 학자들이 흑백논리로 접근하여 흑이란 대답을 하든 백이란 대답하든 모두 그다음 공격할 논리를 만들어오는 반면에 예수님은 절대로 흑백논리로 대응하지 않는다. 흑백논리는 또 다른 흑백논리를 생산해낼 뿐이라는 걸 잘 아셨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보면서 어떤 이는 결국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이는 어둠의 터널에서 밝음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로가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각자는 가던 길을 돌이키지 않는 한(회개하지 않는 한) 자신의 길을 그저 걸어갈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빛의 근원인 태양이 다시 떠오른다는 걸 영화는 말하고 있다.

이정배 교수
이정배 교수
문화예술비평가
예목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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