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낮고 천한 자를 위한 예술
[전문가 칼럼] 낮고 천한 자를 위한 예술
  • 이정배 목사
  • 승인 2020.12.24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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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피아니스트의 전설》(1998)
피아니스트의 전설(1998) 영화 공식 포스터

유럽과 미국을 오가는 대형선박 버지니아호에서 태어나 평생 배 안에서 살다간 천재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극화한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이탈리아 특유의 영화적 특성을 담고 있으면서 무엇보다 감독인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상상 세계를 한껏 반영한 영화이다. 감독은 이전 작품인 《시네마 천국》(1988)을 통해서 자기 색깔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피아니스트의 전설》을 이야기 중심으로 영화에 접근해가면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매우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다.

버지니아호라는 당시 엄청나게 큰 배에서 한 아이가 발견된다. 배의 가장 밑바닥에서 일하는 인부가 그를 발견하는데 마침 그 해가 1900년이어서 그의 이름을 ‘나인틴 헌드레드’라고 지어 부른다. 그는 육지를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채 성년이 된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스스로 피아노를 익혀 배 안에서 연주한다. 상류층이 모여 있는 연회장에서 연주할 때는 악단장의 간섭으로 마음껏 연주를 못 하지만,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향하는 유럽의 가난한 이들이 북적대는 삼등칸에서는 거리낌 없이 연주한다. 독창적인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어느 국회의원이 냄새나는 삼등칸으로 일부러 내려갈 정도다.

우연히 마주친 한 여인으로 인해 육지에 내려가 남들과 같은 삶을 살아보려 마음도 먹어보지만, 콘크리트 빌딩이 거인처럼 서 있는 잿빛 도시 전경을 바라보다 포기하고 배로 돌아온다. 세월이 지나 배가 낡아 더는 운항하지 못해 폭파해 버리려는 상황이 되었다. 오랜 친구였던 트럼펫 연주자 ‘맥스’가 그를 배 밖으로 데려오려 하지만 그는 영원히 그곳에 머문다.

영화는 배라고 하는 한정된 공간을 주된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배 안 공간은 상류층이 머무는 공간과 하층민이 거하는 삼등칸 그리고 가장 밑바닥의 증기기관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증기관이 있는 엔진실에서 일하는 이들은 배가 운항하는 내내 석탄을 화구에 퍼넣어야 한다. 이들이 지내는 공간에는 청소나 세탁 등 배 안의 잡역을 하는 이들이 함께 머물고 있다.

영화의 기본적인 모티브는 노아의 방주이다. 죽음처럼 살아가던 유럽의 가난한 서민들에게 미국은 신세계였다.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행복한 천국과 같은 곳으로 여겨졌다. 그들은 목숨 걸고 유럽을 벗어나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향했다. 미국으로 데려다주는 버지니아 호는 노아의 방주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영화는 방주 안에서 일어났을 일들을 상상한 것이다.

방주도 하나의 세계이다. 온갖 짐승들이 있고 그들을 돌보는 노아 가족들이 함께하는 이 세상의 축소판이다. 영화의 주된 공간인 버지니아 호 역시 세상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려는 의도로 압축시킨 영화적 장치다. 그 안에 다양한 사회적 계층이 있고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이 등장하고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주인공 나인틴 헌드레드는 배의 가장 낮은 바닥인 엔진실 공간에서 낮은 이들과 함께하며 자란다. 그래서 누구보다 배의 모든 공간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삼등칸에서 연주하기를 즐겨한다. 잘 차려입고 격식 있는 대화를 나누는 상층부보다 자유롭고 온기 그득한 삼등칸을 선호한다. 그가 마지막을 맞이하는 곳도 배에서 가장 낮은 곳이다.

당시 대서양을 건너는 일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배 안에 있는 이들은 두려움과 불편함으로 2주간을 좁은 공간에서 지내야 했다. 특히 서민들은 미국에 도착한 다음에 맞이할 삶이 불안했다. 그들은 모든 재산을 팔아 배를 탔고 유럽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했기에 기대와 두려움이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나인틴 헌드레드는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 배 안에 있는 이들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바다만을 한없이 바라보며 무언지 모를 다음 삶에 대해 걱정하는 어느 여인을 위해 곡을 헌정하기도 한다. 오랜 홍수 뒤, 언제 마른 땅에 도착할 것인가 불안했던 노아의 가족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 비둘기처럼 나인틴 헌드레드의 음악은 그들 모두에게 위안을 준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근처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천사와 동방박사의 화려한 인사를 받았지만 거기에서 물러나 갈릴리에서 자라나셨다. 공생애 동안 가난한 이들, 세리, 창기와 같은 소외당하는 이들과 함께 지내셨다. 그들이 쓰는 언어인 아람어를 통해 말씀을 전하셨다. 그리고 가장 낮은 모습인 십자가형으로 죽임을 당하셨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을 통해 우리는 노아의 방주 모티브를 찾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생애를 조망하게 하는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다. 낮고 천한 곳에 오셔서 힘들고, 고통 받고, 어려운 이들에게 복된 소식을 들려주셨던 예수의 전형도 들여다볼 수 있다.

무엇보다 내게 주어진 달란트가 무엇이며, 내가 선 곳은 어디며, 그곳에서 내가 무엇을 할까 하는 물음을 우리에게 던진다는 면에서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의미가 크다.

이정배 교수
이정배 목사
문화예술비평가, 예목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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