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논문] 대림절_오감 활짝 열어 그리스도 맞이하는 기간
[이달의 논문] 대림절_오감 활짝 열어 그리스도 맞이하는 기간
  • 김성해 기자
  • 승인 2020.12.11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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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광섭 교수 
(사)한국영성예술협회-예술목회연구원 공동원장

<연구요약>
교회력은 교회의 일 년 삶의 시간표다. 교회력은 대림절(강림절, 대강절, Advent)에서부터 시작한다. 대림절은 성탄을 앞둔 4주의 기간이다. 따라서 일 년의 마지막 달인 12월이 대림절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세상의 달력이 일 년을 분주하게 끝내는 마지막 달인 12월에, 교회력은 대림절로부터 새로운 한해를 조심조심 새롭게 시작한다. 세상 사람들이 송년과 망년이라 여겨 소비하며 헛된 분망함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달에, 교회는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삶을 살 것이라는 벅찬 기대와 새로운 낮의 꿈으로 설렌다. 그리스도인은 내가 세우는 계획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오실 구원의 주님을 기다림이라는 선사된 고은 시간을 산다. 그 시간은 마음을 고요하고 사물을 그윽하게 조율한다. 평화의 주님을 기다리는 시간, 곧 메시아적 시간이 교회의 삶을 인도한다.

흔히 우리가 내일 혹은 미래(futurum)라고 말할 때 그 시간은 아직 오지 않고 경험되지 않은 시간이다. 이 시간의 의미는 인간 주체가 형성해 갈 수 있는 것,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으로서의 미래다. 근대 이후의 인간은, 미래를 과거로부터 일어나는 인과적 힘의 결과로서, 곧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미래는 이미 과거로부터 발전하고 현재하고 있는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느님 나라도 그렇게 이해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도덕적 성숙과 사회적 정의의 실현이라는 세계내적 발전에서 성취된 윤리적 왕국이다. 미래는 인간이 파악하고 장악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미래는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추진력에 달려 있기 때문에 미래보다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일이 중요하다.

그러나 대림절 속에 녹아있는 교회의 시간이해는 매우 독특하다. 기독교적 미래의 시간 이해는 도래(adventus, 到來)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이 그 고갱이다. 그것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대상을 대하듯이 불러내어(표상) 세우고, 주문하여 장악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미래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붙잡으려고 쫒아가는 시간이 아니라 나에게 다가오는 시간으로서 시간까지 지배하려는 인간주체의 오만해진 장악력을 무장해제하는 도래다. ‘도래’(아드벤투스)는 단순히 과거에 축적된 원인들의 결과적 산물이거나 이미 존재하고 있는 가능태가 현실태가 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선포 전체의 중심에 있는 ‘하느님 나라’는 과거와 현재의 연장이거나 개선이나 개혁 혹은 진화일 수 없다. 또한 두 개의 세계가 있어 이 세상이 완전히 끝나고 난 다음에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도래로서의 새로운 시간체험에서 시작된다.

태양력이 자연의 흐름과 생성에 따라 인간의 삶의 시간을 구분했다면, 레위기 23장에 언급된 구약의 절기(유월절-무교절-초실절-오순절-나팔절-대속죄일-초막절)는 자연의 흐름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행위와 언약이 근거가 되었다. 대림절로부터 시작되는 교회력의 시간도 자연적 시간의 흐름을 그리스도(메시아)론적이고 종말론적 시간으로 변형시킨다. 성경에 근거된 시간이해는 매우 사건적이다. 종말론적 시간이해의 핵심은 시간과 역사 완성의 주체인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생생(生生)한 느낌을 불러오는 충만한 시간체험에 있다.

교회력은 일 년의 삶의 무늬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깊이 음미하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살겠다는, 열린 시간을 통해 닫히고 매인 시간을 푸는 새로운 시간짜임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시간을 살고, 하루를 살고, 일주일을 살고, 한 달을 살고 일 년을 살면서 시간 자체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느끼면서 살도록 지어진 것이 교회력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위해 변화시킨 시간이 교회력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시간자체를 그리스도적으로 느끼고 살 만큼 철이 들었을까.

대림절(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림)-성탄절(그리스도의 태어남)-주현절(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나타나심)-사순절(그리스도의 공생애 및 수난과 십자가)-부활절(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성령강림절(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냄)-왕국절 혹은 창조절(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어 세상을 정의, 평화 그리고 창조의 보전으로 다스리심)로 이어지는 교회력은 모두 예수님 생애의 중요한 사건과 관련되어 시간의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 낸다. 그리스도(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림에서부터 시작되는 교회력은 종말론적이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기다림이며 희망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종말론은 희망론이다. 희망의 원형은 먼 미래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탄생, 메시아의 탄생에 있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임한 성령의 현존을 통해 오감을 활짝 열어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기간이다. 누가와 마태복음서에 나타난 성탄절 이야기, 수태고지와 마리아의 은총과 신앙의 삶,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세례 요한의 탄생, 예수의 탄생과 영광과 평화,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의 경배, 말년에 성전에서 시므온이 경험한 오감을 통해 아기 예수를 안고 보는(觀想) 신비로운 체험에 이르는 첫 출발 시점이다.

 

심광섭 교수.
심광섭 교수.

<연구자와의 인터뷰>

교회력이 시작되는 대림절 절기의 신앙적 의미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대림절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을 앞둔 대단히 중요한 절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로 이 땅에 오셨고, 그 오심을 준비하고 맞이한다는 의미죠. 즉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던 것을 기억하고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는 4주가 대림절인데, 이 4주가 그리스도인에게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또 앞서 연구에서 기록했듯이 태양력 및 달력과 비교하자면 달력은 한 해의 끝이지만, 대림절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이 포인트인 셈입니다. 결국 인간의 계획에 따라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보다는, 그리스도의 오심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여 시간과 체험을 지배하고, 그 자체가 원칙이 되는 것이 대림절이 갖는 중요한 의미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인간의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죠. 특히 서구 쪽에서 지배적인 성향이 드러났는데, 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은 공간을 지배한다는 의미입니다. 때문에 서구사회에서는 신대륙을 발견하고, 우주와 달 등의 행성에 착륙하면서 공간을 지배하려 했습니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죠. 모든 공간에 동시적으로 임할 수 있는 스마트폰은 유비쿼터스(Ubiquitous) 성향을 띄고 있는데, 이 유비쿼터스가 무소부재(無所不在), 어디에나 있으며 없는 곳이 없으신 하나님의 속성과 유사한 셈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속성을 인간의 과학기술이 점령했다고 볼 수 있죠.

두 번째로 인간은 시간을 지배하고 싶어 합니다. 때문에 과거는 역사를 기록하며 과거의 시간을 지배한 것으로 치지만, 중요한 것은 미래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도 있습니다. 그런데 미래를 지배하는 것은 신(神)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미래를 잘 모르기 때문에, 미래를 알기 위해 예측을 많이 합니다.

인간의 많은 예측 연구 중 하나가 바로 빅데이터입니다. 빅데이터를 통해 수많은 정보를 모아서 그간의 행보를 통해 향후의 길을 예측하는 것인데, 이를 통해 미래를 장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코로나19 정국을 통해 미래는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배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래를 지배하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볼 때,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시간은 우리가 지배할 수 없으며, 시간의 주인은 여전히 그리스도, 하나님’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기다림은 결국 시간 의식인데, 그 기다리는 시간이 가혹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평화의 왕을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기쁜 시간 의식인 셈입니다. 이 기쁘고 설레며 벅찬 시간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대림절을 출발점으로 삼아 1년간의 삶을 살아가라는 원칙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림절 첫 번째 주. 심광섭 교수
대림절 첫 번째 주. 심광섭 교수

‘대림절’을 생각하면 여러 개의 초가 둥글게 말아진 사철나무와 함께 세워져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데, 대림절과 관련된 의례의 특성이 있는지요?

독일은 대림절이 시작되면 대림환을 꺼내놓고 촛불을 한 주에 하나씩 밝히기 시작합니다. 교회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직장인 사무실과 학교, 공공기관, 가정집 등에서 이를 지키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1986년 유학생 시절, 제가 머물던 기숙사에서도 대림환을 설치했었는데, 처음에는 대림환이란 문화가 생소한 탓에 거실에 대림환에 홀로 켜진 촛불을 몇 번이나 끄면서 그러한 의식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대림환의 초 4개에 불이 다 붙은 지 2-3일 후면 그리스도가 오신 성탄절이 되는 것을 생활예전을 통해 더욱 가까이 느낄 수 있던 시간이었죠.

그러나 한국교회 중에는 대림절의 촛불의식 문화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 의미를 찾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대림절 절기에 알맞은 말씀 묵상은 어떤 것이 있는지 제안 부탁드립니다.

성경 중 누가복음 1-2장이 가장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스토리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보면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잉태 이야기로 시작되며, 이후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성령으로 잉태할 것임을 알려주는 수태고지, 마리아가 엘리사벳과 문안하고, 마리아의 찬양, 요한의 탄생, 사가랴의 찬양,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목자와 동방박사의 경배 등으로 이어집니다.

성탄의 메시지 이후에는 헤롯왕의 영아살해로 인한 이집트 도피와 훗날 성전으로 돌아온 뒤 정결예식을 받는 장면과, 성전에서 기다리고 있는 예언자 안나와 시므온, 시므온의 노래까지 성경에 나오는데, 대림절을 맞아 이 부분까지 묵상하는 것을 권유합니다.

성인들은 대림절 기간 동안 말씀을 목상하면서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지켜보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내 마음, 내 영혼 속에서 탄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연구의 제목도 ‘오감으로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기간’이라고 기재했는데, 이 말처럼 머리로 아는 지성적인 교제를 넘어서서 영적인 교제, 오감을 통한 몸의 감각적 교제까지 갈 수 있길 바랍니다.

성화를 보면서 묵상하는 것도 좋습니다. 성화 중에는 마리아의 수태고지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두 여성의 태중에 있는 아기들끼리 서로 영으로 인사하는 모습, 예언자 시므온이 어린 예수를 안는 모습 등이 그림으로 남아있는데, 그림을 보며 아기 예수, 메시아를 안는 느낌을, 말씀 묵상을 통해 체험할 수 있길 바랍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

올해는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전환기적 어려움을 지나고 있습니다. 팬데믹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올해 대림절을 어떻게 활용하고 지키는 게 좋을지 구체적인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2.5단계까지 격상되면서 비대면 예배도 불가피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목사님들은 자꾸 말씀 중심으로 이야기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정작 성도들은 콘텐츠를 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배의 콘텐츠가 비주얼했으면 좋겠습니다.

비주얼은 시각적인 요소도 있지만 청각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따라서 대림절에 들을 수 있는 음악과 찬송, 크리스마스 칸타타, 헨델의 메시아 등을 들려주며 환경을 조성하길 바랍니다.

또 큰 별로 장식한 크리스마스 트리와 함께 말구유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과 박사들의 경배하는 모습이 담긴 조형물도 만들어놓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유와 마굿간, 마리아와 요셉, 동방박사 등 다양한 요소들을 성경 속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런 조형물은 성도들이 보면서 말씀을 더욱 생동감 있게 묵상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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