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박창환 학장님, ‘아버지’라 불렀던 분을 보내드립니다."
[특별기고] "박창환 학장님, ‘아버지’라 불렀던 분을 보내드립니다."
  • 곽재욱 목사
  • 승인 2020.11.19 12: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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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에서 보다 아버지로 모시며 가까이에서 본 모습
한 번도 자신을 내세우시지 않으신 분
모스크바 장로회신학교 오전 강의를 마치고 대학원생들과 함께. 곽재욱 목사 제공
모스크바 장로회신학교 오전 강의를 마치고 대학원생들과 함께. 곽재욱 목사 제공

장로회 신학대학 제13대 학장을 역임하신 박창환 목사께서 한국시간으로 지난 주일인 11월 15일 0시 23분(한국시간) 미국 네브래스카 오마하에 있는 셋째 아들 박선진 목사의 사택에서 향년 96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 전 주일 예배를 다녀오신 후부터 불편하셨다가 마지막 3일간 급격히 나빠지시면서 하나님의 품에 평안히 안기셨다고 한다. 박 목사님은 아들 선진 목사가 시카고, 애틀랜타를 거쳐 네브래스카까지 목회지를 옮기는 내내 아들이 섬기는 교회의 협동목사로 주일 설교를 도우시며 건강하게 사역을 감당해 오셨다. 그 동안 2013년 시카고에서 부인 현수삼 권사를 하나님 곁으로 먼저 보내셨고, 2015년에는 장남 명진 씨를 먼저 보내는 큰 아픔을 겪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그 어느 때에도 내색하는 일이 없어 가까이 있는 사람들조차도 목사님이 그 일들로 흔들리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고 박창환 목사께서는 1924년 항해도 황주에서 박경구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나셔서 그의 조부 박태화 장로의 형이신 박태로 목사로부터 손자 박범 목사에 이르는 ‘한국교회 최초의 5대 목회자 가정’으로 일구셨다. 그 동안 한국교회의 선교와 순교, 목회와 교육의 전 방위를 넘나들며 뚜렷한 족적들을 남기신 가운데 그 가문을 한국기독교의 일대 명문으로 세우셨다. 목사님의 소천 이후 이 며칠 간, 부고를 겸한 추도문들을 통해 목사님의 이력들에 관하여 일반에 상당히 전달된 것으로 알고, 필자는 ‘아버지’라고 불렀던 그 분과의 개인적 만남을 통해 받은 감동과 가르쳐주신 교훈을 독자들과 나누는 것으로 고인을 향한 사랑과 추모의 정을 대신하고자 한다.

등 뒤로 뵈며

박창환 목사님은 필자가 낳으신 아버지를 제외하고 ‘아버지’라 부르며 모셨던 분이시다. 그 인연의 시작은 1976년 여름지난 어느 때였다. 그의 아들 호진 군과 필자는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의 76학번 동기이고 ‘소리 지르는 돌들(Shouting Stones)’이라는 음악그룹밴드를 같이 하고 있었던 관계로 우리는 장신대 캠퍼스 안에 있었던 그 사택에 자주 들락거렸다. 독자들께 한 가지 양해를 구할 것은 당시 필자는 특별한 소명감이 없이 선친의 강요에 의하여 신학교에 입학하였던 터라 신학생으로서의 마땅한 경건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 때 그 댁에는 호진 군의 어머니 현수삼 권사께서 신학교의 추수감사예배 때에 사용할 포도주를 작은 항아리에 담가 놓으셨는데 치기어린 우리가 그만 그 항아리에 손을 대는 범죄를 저지르고 만 것이었다. 외출에서 돌아오셔서 그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께서 필자를 대놓고 야단을 치시지는 못하시고 대신 아들 호진 군을 혹독하게 질책하셨다. 친구가 야단을 맞고 있는 그 시간 내내 필자는 진정 몸 둘 바를 알지 못한 채 우두커니 방 바깥 마루에 서 있었다. 여름 더위가 아직 물러가지 않은 때였나 보다. 마루에 서있는 필자는 아들이 벌을 받고 있는 방 저쪽에 다른 열려있는 방으로 책을 읽고 계신 아버지의 등을 볼 수 있었다. 당시 그 아버지는 신학교의 교무처장. 사모님의 질책에 이어 교수님의 중형의 선고가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벌을 대기하는 그 무겁고 숨 막히는 시간 내내 바깥에서 매미만 ‘맴맴’ 줄기차게 울어댔다...... 그러나 마침내 필자에게 내린 선고는 ‘아버지의 선고유예’였다. 영원처럼 계속될 것 같던 질책이 끝나고 우리가 발소리를 죽이며 집을 빠져나오던 그 순간에 필자는 그 때까지 미동도 없던 그분의 등을 얼핏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나중에 깨달은 사실은 그 때 한쪽의 준엄한 질책과 다른 한쪽의 독서의 정적의 힘든 대조가 계속되던 가운데 마루에 서 있었던 필자와 미동도 없이 책을 들여다보고 계셨던 그 아버지의 등 사이에 어떤 특별한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 가운데 어떤 평안함, 평범함 가운데 어떤 신비스러운 느낌이었다. 그 이후 어느 때부터인가 필자는 그분을 아버지라 불렀고, 그 분은 공석에선 필자를 ‘곽목사님’, 사석에선 ‘재욱이’라고 부르셨다.

얼굴로 똑바로 보시며

그 분의 앞모습을 제대로 뵌 것은 그 해 가을 장신대 ‘마펫홀’에서 열렸던 ‘소리 지르는 돌들’의 콘서트에서였다. 그 때 우리는 찬조 공연을 제외하고 앙코르를 받지 않는 12곡을 공연했다. 당시 우리의 장비와 연주는 요즘 뮤지션들의 그것들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수준이기는 했으나, 굳이 그 의의를 찾자면 한국교회에서 복음성가 및 찬송가를 그룹사운드로 연주한 첫 시도였다는 자리매김을 할 수는 있겠다. 당시 우리는 대학 1학년생들로 교계를 넓게 살필만한 시계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아는 한 그 당시에 우리 외에 그렇게 찬송가를 전자음악으로 연주하는 그룹의 존재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없기 때문이다. 신학교 안에서 밤에 연습을 하던 중에 바깥에서 돌이 날아들기도 했고 ‘사탄아 물러가라!’는 고함을 듣기도 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신학교의 모든 교수님들께 콘서트 초대장을 보내기는 했으나 정작 참석을 꺼리는 분위기가 만들어져 있었던 것 같았다. 콘서트 날짜가 다가오면서 어느 교수께서 오시고, 어느 교수께서 오시지 않을까가 우리들 사이의 큰 이야깃거리였다. 결국 그 당시 학장이셨던 이종성 교수께서는 직위 상 오시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다른 많은 교수님들도 얼굴을 비치지 못하셨다. 그 와중에 지금까지도 가슴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장면은 그 때 객석 맨 앞자리에 박창환, 고용수 두 교수께서 꼿꼿하게 앉아 계셨던 것이다. 어쩌면 다른 교수들도 오시긴 하셨으나 필자가 제대로 살피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때 박창환 교수님은 ‘그냥 기죽지 말고, 잘 해보라’는 무언의 격려로 객석 앞자리 한 중간을 당당하게 지켜주심으로 그분은 당신이 우리에게 누구시라는 것을 확실하게 가르쳐주셨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셨다.

저만치 멀리서 뵈며

그 후에 그 아버지를 제대로 뵌 것은 그로부터 10년 넘는 세월이 훌쩍 흐른 후였다. 사실 그 시간 동안 필자가 교수님과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분께서 70여년을 강단을 지키셨으니 그것은 다른 어느 누가 어림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소명의 수행이고, 그러므로 필자의 기본적 행동반경 역시 교수님께서 재직하셨던 장신대라는 작은 캠퍼스의 한정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필자가 그분을 뵙지 못했다는 것은 몇 십번이고 캠퍼스 안에서 마주친 형식상의 인사 외에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인격적 만남이 없었다는 뜻이다. 당시 필자는 ‘회복과 소명’이라는 변명으로 그 이전의 삶의 일체의 관계들에 대한 거리 같은 것을 스스로 한정해 놓고 있었고, 어리석게도 그 속에 귀하게 간직해야만할 그 분의 사랑과 은혜까지도 등한히 해 버렸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 동안 그 분을 피해 다닌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찾아뵙지는 않았던 것이다. 필자는 병역 복무를 하는 동안에 심정과 소명에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였다. 군 복무 후 신학과 목회의 소명감으로 충만하여 신학교로 다시 돌아왔고, 그 때부터 필자의 목표는 지난 시간 잃어버렸던 것들을 회복하고 빈 곳들을 채우는 데에 맞추어져 있었다. 또한 그 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매개가 되는 친구 호진 군이 그 기간 동안 신학교를 떠나 있었던 것도 그 한 이유일 것 같다. 필자는 바빴고,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었고, 목표에의 치중으로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는 무심했다.

아버지로 가까이 모시며

교수님을 다시 찾아뵙게 된 것은 오로지 필자 편의 이유 때문이었다. ‘죽는 날까지 마치지 않는 것이 신학’이고, ‘신학공부하다 죽으면 순교’라는 교수님의 가르침에는 어폐가 되는 말이겠지만 필자는 ‘신학공부를 마치고’ 강단의 자리를 찾아 전전하던 중에 ‘모스크바 장로회 신학교’의 교무처장으로 가게 되었다. 그 전에 재직했던 안양대학교에서 학교를 옮기는 줄로만 생각했으나 그것이 총회파송 선교사로서 파송되어 간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소명과 준비가 부족했던 탓으로 불과 두 학기를 지났을 즈음에 필자와 가족의 상태는 고갈되어 더 이상 모스크바에 머물기가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그 때 학교로부터 필자가 떠나려면 필자의 빈자리를 채워놓고 가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 때 고심 중에 떠오른 것이 수년전에 박 교수님께서 은퇴를 하셨다는 사실이었다. 교수님을 찾아가 모스크바 신학교를 도와주실 수 있는지 몇 번 머리를 조아렸더니 의외로 선선히 대답해 주셨다. 아마 당시의 모스크바 장로회 신학교의 학장으로 이의호 목사님이 재직하고 계신 것이 그 결심의 큰 요인이 되었지 않았나 싶다. 옛날 박창환 교수께서 장신대에 재직을 시작하실 때에 이의호 목사님은 학교 앞 광장교회에서 목회하셨던 친구 사이이시고 그 부인들, 현수삼 권사와 김숙희 권사도 친밀한 관계이셨기 때문이다.

1996년 2학기가 끝날 즈음에 모스크바로 모셔서 그 중에 세 달간은 당시 모스크바 신학교 목조 건물의 2층에 나란히 살게 되어 정말 아들같이 모시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그 기간이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는 참 진하고 따뜻한 시간이었다. 박창환 교수님, 이의호 학장님, 그리고 필자는 모스크바 외곽 그 외딴 곳 어려운 환경의 한 집, 옆 칸에 나란히 살면서 정말 가족이 되었다. 밥도 같이 먹고, 강의도 같이 하고, 시장도 같이 다니고, 연극구경도, 시내 구경도 같이 가고.... 그 때 필자도 확실하게 두 분 내외분을 아버지 어머니로 모셨고, 그분들도 필자를 아들과 같이 대해주었다. 아들 삼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두 분은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으면 금방 필자를 아들로 대해 이름을 부르시며 말과 마음을 함께 놓으셨다. 후에 , 2016년도에 이의호 학장님의 부인 김숙희 사모님께서 미국 미네소타의 따님 혜란 씨의 집 근처 요양원에서 세상을 떠나실 때 일주일간의 혼수상태여서 갑자기 깨어나셔서 따님에게 이르시기를 “곽 목사가 온다니까 집 청소 깨끗이 놓고 음식 준비하라”고 이르시고는 다시 혼수상태로 들어가셨다가 소천 하셨다고 한다. 필자를 본적이 없는 혜란 씨로서는 놀랍고 이상한 일이어서 그 일을 아들 이한성 선교사에게 전했고, 필자는 그를 통해서 전해 들었다. 그 때 그 말을 듣고 방에 혼자 들어가서 오랫동안 통곡했었다. 박창환 교수님 부인 현수삼 권사님은 필자의 큰 딸에게 친히 피아노를 레슨을 해 주셨다. 그 분의 지론이 피아노를 처음 배울 때에 손가락을 잘못 배우면 평생 연주를 하면서 고치지 못하는 수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우리 아이의 손가락을 친히 교정해 주시려고 애쓰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필자는 그 때의 꿈을 가끔씩 꾼다. 지금은 우리 부부 외에는 그 어른들은 모두 이 세상을 떠났다. 이번에 박창환 교수님께서 네 분 중에 마지막으로 떠나신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네 분이 모두 미국의 여기저기에서 세상을 떠나신 연고로 필자는 그 한분도 마지막을 지켜드리지 못했다. 사도들이 세상의 여러 곳으로 흩어져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각각 순교하셨다고 했던가? 그분들을 모셨던 때로부터 25년, 어느 듯 세월이 흘러 필자도 적은 나이는 아닌 것 같다. 그래도 필자는 그 분들을 떠올리며 아직도 아이와 같은 심정이다. 지금도 필자의 실수와 탈선을 엄중한 침묵으로 꾸짖으시고, 좌절과 절망에 대해서 꼿꼿하게 바라보시며 힘내라 하실 것 같다. 그리고 주위를 물린 자리이시면 금방 음성을 바꾸며 이름을 불러주실 것 같다.

박창환 교수님, 그는 자신의 묘지를 남기지 말라고 하셨다 한다. 심지어 유골도 남기지 말고 흩뿌려 자취를 없애라고 하셨다 한다. 그는 어느 한 번도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으신 우리들의 아버지이셨다.

곽재욱 목사. 가스펠투데이 DB
곽재욱 목사(동막교회). 가스펠투데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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