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폰테스, "교회 개혁은 목회자와 성도가 모두 함께" 동참 호소
아드폰테스, "교회 개혁은 목회자와 성도가 모두 함께" 동참 호소
  • 이신성 기자
  • 승인 2020.10.21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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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현장 목회자 모임인 아드 폰테스 종교개혁주일 앞두고 기도문과 설교문 배포
기도문에서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모습 회개와 바른 신앙 전수 간구
설교문, 고린도전서 11장 말씀을 통해서 교회 공교회성 되돌아보게 해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 목회자들이 한국교회의 개혁과 헌신을 위해서 결성한 아드폰테스(회장 김의신목사, 광주다일교회)가 503주년 종교개혁주일을 앞두고 공동기도문과 공동설교문을 지난 20일에 배포했다.

아드폰테스는 종교개혁정신으로 목회현장을 개혁하고자 하는 예장통합 목회자들이 마음을 모아 2018년 9월 17일 창립했다. 가스펠투데이 DB.
아드폰테스는 종교개혁정신으로 목회현장을 개혁하고자 하는 예장통합 목회자들이 마음을 모아 2018년 9월 17일 창립했다. 가스펠투데이 DB.

 

공동기도문은 “아버지의 뜻을 구하지 아니하며 인간의 욕망과 탐욕을 좇아 살아왔다"고 고백하며, “종교개혁자들을 통하여 부패하고 타락한 신앙과 교회를 새롭게 하셨건만, 500 여년이 지난 한국교회의 현실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탄식하고 용서를 구한다. 이와 함께 “개혁 교회의 전통을 따라 개혁하는 교회가 되게” 해 주시며 “다음 세대에 바른 신앙을 전수하게” 해 주시길 바라며 기도하게 됐다고 전했다.

설교문은 고린도전서 11장 사도 바울의 성만찬 말씀을 통하여 교회 내 분열로 어려움을 겪던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교회의 사적 성격과 공적 성격의 충돌과 혼동에서 온 것으로 해석하며, 사도 바울이 “자기의 만찬”과 대조해서 “주님의 만찬”이라는 말로 교회의 공교회성을 강조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무엇보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주인 행세를 하는 곳에서는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이 나타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중세 교회에서 발생한 족벌주의(nepotism)를 예로 들며, 교회가 개인이나 지도자들의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재확인”하며 “교회의 공공성을 되찾고자” 했던 것이 종교개혁이었음을 설파하고, 나아가 설교문은 온 성도가 교회 개혁에 동참할 것을 다음과 같이 호소하고 있다. “교회 개혁은 목회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곧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아드폰테스가 배포한 기도문과 설교문은 올해 교단 뿐만 아니라 교계 내 여러 일들로 내홍을 겪고 있는 개신교를 위해서 현장 목회자들이 종교개혁을 맞이하여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 현실 문제를 대처하고 목회자들만이 아니라 일반 성도들과 함께 해결하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아드폰테스 총무 정진회 목사(샘터교회 담임)는 “총회 이후 입장문이나 항의문도 발표하고 서명운동도 했고 새로운 움직임도 있다. 하지만 현장 목회자들로서 종교개혁을 맞이하여 오늘의 현실에서 말씀을 성도들과 어떻게 더 깊이 나눌 수 있을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몇 명이 제안해서 회의 후 공동기도문과 설교문을 만들기로 해 팀을 만들었고 준비했다. 이번에 나온 기도문과 설교문을 아드폰테스 운영위원회에서 더 많은 분들과 나누자고 결정해서 배포하게 된 것”이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이번에 배포된 기도문과 설교문으로 성도들이 종교개혁의 마음을 새롭게 다잡고 한국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 온 성도의 힘을 모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하는 아드폰테스가 배포한 공동기도문과 공동설교문 전문이다.

2020 년 종교개혁 주일 회중과 함께 하는 공동기도문

 

인도자>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저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도 저희를 먼저 사랑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삼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저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이 얼마나 큰 구원이요, 은혜인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회중>

그러나 주님, 저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기뻐하면서도,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잊어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구하지 아니하며, 인간의 욕망과 탐욕을 좇아 살아왔습니다. 내 개인적인 삶에서도 그러했고, 교회 공동체적인 삶에서도 그러했음을 고백합니다.

 

인도자>

종교개혁자들을 통하여 부패하고 타락한 신앙과 교회를 새롭게 하셨건만, 500 여년이 지난 한국교회의 현실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목회자와 성도들이 돈과 세상정치와 목회지 대물림의 문제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며, 주님의 몸 된 교회에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 자녀들과 젊은 세대가 교회를 떠나가고, 저희는 탄식하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회중>

주님, 교단법이 있음에도 특정교회의 목회지 대물림을 허용하겠다고 하는 총회와, 이와 관련된 사람들이 많은 죄악을 합리화 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과 죄를 알게 하옵소서.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옵소서. 주님의 교회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교회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다함께>

교회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저희로 개혁교회의 전통을 따라 개혁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저희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의 현실에도 나 자신과 세상을 비추는 빛임을 믿습니다. 먼저 주님의 말씀을 나 자신에게 비추어 우리의 죄악을 돌이키게 하옵소서. 개인적인 삶에서도, 교회에서도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교회가 주님 앞에, 그리고 세상 앞에 공적인 교회임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저희로 공의로우신 하나님 편에 서게 하시고, 우리 자녀와 다음 세대에 바른 신앙을 전수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이 빛이오니, 이 말씀을 받은 우리들이 세상의 빛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OO교회가 지역사회와 열방에 희망이 되게 하시고, 세상을 향한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어찌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느냐?

고린도전서 11:17-34

들어가는 말

오늘은 종교개혁 503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3년 전 종교개혁 5백 주년을 맞으며 각 교회와 교단 별로 많은 기념행사가 있었고, 교회의 본질을 되찾고자 하는 선언적인 시도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한국교회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돌아봅니다. 아마도 지난 3년은 교회의 교회답지 않은 모습이 더 분명히 두드러진 기간이 아니었다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한국교회는 그 부정적인 모습을 통해,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3년간은 목회자 대물림 문제가 큰 이슈로 부상하면서, 교회의 공공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고 그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산책을 하다 보면 가끔씩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걷는 사람을 봅니다. 조용히 산책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방해나 실례가 될 수 있습니다. 공적인 공간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훈련받지 못해서 생기는 일입니다. 아이들은 자라나면서 집에서 행동 방식이 지하철이나 식당 같은, 함께 쓰는 공간에서 하는 행동이 다르다는 것을 배웁니다. 인간에게는 사적인 친밀감과 공적인 처신이 함께 필요합니다.

신앙에도 공공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죽어서 천국 간다는 말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 왕의 왕, 만 주의 주로 고백하기에, 세계 전체를 보는 근본적인 인식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이 성숙할수록 하나님과 그리고 주위 사람들과 사적인 친밀감이 더욱 깊어져 갈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공공 의식과 가치관, 책임감도 더 견고해져야 합니다.

고린도교회 성찬의 분열

오늘 본문은 고린도 교회의 성찬에 관해 바울이 편지로 권면한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가치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들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롭다고 말합니다(17). 교회 안에 분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심각한 분열을 겪고 있었고, 그 분열이 여러 가지 문제들과 얽혀서 복잡하게 표출되고 있었습니다. 이 분쟁은 성찬의 자리에서 표면화되었습니다. 당시의 성찬은 오늘처럼 작은 떡과 음료로 기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식사를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그 날 함께 나누는 한 끼 식사에 성찬의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공동식사에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하는현상이 벌어졌다고 바울은 말합니다(21). 성찬에서 누군가는 너무 많이 먹고, 누군가는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바울은 이런 현상을 교회의 교회 됨을 흔드는 중대한 사건으로 여겼습니다. 함께 나누는 공적 식사 자리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요?

이 시대는 요즘처럼 분초까지 정확한 시간을 재서 예배를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모임의 시작과 관련한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33절에서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하고 말하는데요. 아마도 모임 장소에 먼저 와서 여유롭게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고, 반면에 빠듯하게 도착하거나 늦게 허겁지겁 온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21-22절에서 바울은 그러한 일들이 결국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예배에 늦게 온 사람들은 매일 긴 시간 노동을 해야했던 가난한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먹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행위를 보고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느냐?” 하고 질책합니다.

교회의 공적 성격과 사적 성격

고린도 교회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교회는 한 가족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사적인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부모와 형제가 서로 흉허물없이 지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듯, 교회에서 성도들은 서로 간의 사랑에 기초하여 비타산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이룹니다. 그러나 교회는 동시에 공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교회가 한 가족이라 하니 목사가 아버지이고 장로가 집안 어른이라고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목사와 장로를 포함한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일 뿐입니다.

우리가 교회라 할 때 그것은 한편으로 개교회를 가리키며 동시에 공교회를 가리킵니다. 개교회란 OO교회, OO교회, OO교회와 같은 지역교회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라는 말은 지역교회를 넘어 한국교회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더 크게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를 한꺼번에 지칭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개교회에 익숙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개 개교회의 울타리 내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일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볼 때는 교회를 개교회보다 공교회로 인식합니다. 예를 들어, 어느 교회가 코로나 방역 수칙을 어겨 문제가 되었을 때, 우리는 저 교회 사람들은 왜 그래?” 하며 안타까워하지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교회는 도대체 왜 그래?” 하며 그것을 교회 전체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로서 무엇을 결정하고 행동할 때는 개교회의 차원과 공교회의 차원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를 대표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의 뜻대로 운영되면 안됩니다. 모든 성도 곧 교회 공동체에 임하신 그리스도의 뜻을 잘 분별해내고 또 실현해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한 가족으로서 이렇게 사적 성격과 공적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다 보니 교회에서 종종 공과 사의 혼동이 일어나곤 합니다. 가정은 비슷한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그래서 편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삶의 배경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하던 대로 교회에 와서도 그대로 편하게 행동하다 보면, 나와 다른 여건에 있거나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공간: 공과 사의 혼동

이러한 공과 사의 혼동이 고린도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초대교회라 부르는 최초의 교회들은 오늘날처럼 독립된 교회당 건물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누군가의 집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만찬이 행해졌던 공간도 누군가의 개인 주택이었습니다. 물리적으로 보면 사적 공간입니다. 교회 자체가 친밀한 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모이는 공간도 사적인 영역이다 보니, 교회가 그 본연의 공적 성격을 잊어버리기 쉬웠을 것입니다.

어떤 개인이 자신의 집을 제공하며 모임을 가졌고, 음식도 제공했습니다. 일반적인 모임이었으면 그 모임에서 누가 상석에 앉을 것인가, 어떤 사람에게 좋은 음식을 줄 것인가 등을 정할 권리는 집주인에게 있습니다. 자신과 친한 사람이나 비슷한 계층의 사람은 앉아서 마음껏 먹고, 노예나 가난한 사람은 시중을 들거나 눈치를 보면서 먹어야 합니다. 개인의 권리가 모임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οκος/οκα)”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배하는 동안은 이 공간이 공적 공간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공적 성격을 강조하는 말이 교회입니다. 교회를 가리키는 헬라어가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인데요. 에클레시아는 본래 그리스의 민회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직접 민주주의를 시행하여, 모든 시민이 광장에 모여 국가의 중요한 일들을 함께 결정한 것은 잘 알고 계시지요? 그렇게 모든 시민이 한자리에 모여 의사 결정을 하는 모임을 가리켜 민회, 에클레시아라 합니다.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에클레시아라 부릅니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처해있는 공간의 성격에 맞추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 공간의 성격은 물리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모이고 또 모여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학교 교실은 공적 공간이지만, 수업시간이 아니라 방과 후에 친구들 서너 명이 모여서 햄버거를 먹을 때는 사적인 공간이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사는 집은 사적인 공간이지만, 손님들이 와 있을 때는 공적인 행동을 기대하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 성찬의 갈등 역시 공간의 사적인 성격과 모임의 공적인 성격이 충돌하여 생긴 일입니다. 이런 충돌은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빈번히 일어납니다. 한 교회를 세우고 성장시켜 가는 과정에서 큰 공헌을 하거나 헌신적으로 수고한 목회자나 성도가 그 교회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갖는 것은 인간 사회에서 피하기 힘든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영향력의 사적인 성격이 교회의 공적인 성격을 넘어버리면, 교회는 교회다움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누군가가 교회의 주인처럼 여겨진다면, 더 이상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의 주인이 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의 만찬과 자기의 만찬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말에 이러한 인식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본문 20-21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여기서 두 종류의 만찬이 대조되고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주의 만찬”(κυριακν δεπνον)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의 만찬”(τὸ ἴδιον δεπνον)입니다. 자기의 만찬으로 번역된 토 이디온 데이프논은 사적 만찬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의 관념에서 사적인 만찬에 반대되는 말은 공적인 만찬”, 헬라어로 데모시온 데이프논”(δημσιον δεπνον)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공적 만찬이라는 용어가 기대되는 자리에 주의 만찬이라는 말을 넣었습니다.

바울이 왜 여기에 공적 만찬이라는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굳이 공적-사적이라는 개념을 명시적으로 대립시키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인의 모임이 주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는 것만으로, 교회의 공적인 성격이 충분히 강조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교회의 모임을 표현하기 위해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당시에 시민들의 공적인 집회를 표현하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 우리가 교회의 공교회성을 말할 때,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권리와 공동체의 유익 사이의 이념적 대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공교회성은 교회의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진리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교회는 사적 소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고전 11:22]”

 

내 집이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자신 집의 노예에게 먹다 남은 음식을 주던, 식사하는 내내 시중만 들게 하던, 내 마음이라는 것이 당시의 관행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용인되던 공간의 규칙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로 모일 때는 그 규칙이 중단되어야 합니다.

어떤 모임에 대한 기여도가 큰 사람이 그 모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세상사의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이런 원리가 뒤로 물러나고 다른 질서가 힘을 발휘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 되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라 사는 곳입니다. 엄연히 내 집에서 모이는 모임이지만, 나는 그 모임에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과정에서 기여가 많은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존경을 받고 큰 발언권을 갖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세상의 논리로는 당연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의 주인처럼 행동을 한다면 그 곳은 교회라 할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말입니다. “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11:20)”라는 말은 너희의 모임은 교회라 할 수 없다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주인 행세를 하는 곳에서는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이 나타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찬에서의 무질서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처방으로 성찬의 중심이 그리스도의 임재를 되새기는 것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본문 23절은 다음과 같이 성찬의 유래를 알려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여기에서 잡히다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디도미”(παραδίδωμι)넘겨준다또는 배신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주 예수께서 배신당하시던 밤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떡을 떼고 잔을 떼어 주신 자리에 참여했던 사도들이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앞에서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아 그 역할을 감당하며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포함하여 그들은 모두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배신하고 부인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라는 말은 우리가 주님을 배반하던 밤에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다시 제자들을 모으셨고, 사도로 세워 주셨습니다. 성찬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실패를 함께 되새기는 자리입니다. 십자가 아래에 있는 모든 교회는 인간의 실패라는 자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부끄러운 이야기

교회의 역사에 족적을 남길 정도로 부흥했던 교회들에는 개척하여 처음 세웠을 때의 감동과 흥분, 성장하는 과정에서 아름다운 헌신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의 이야기가 예수의 이야기를 밀어내고 중심을 차지하면 안 됩니다.

마가복음은 베드로가 세계를 다니면서 전했던 복음이 기초가 되어서 형성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베드로전서 513절에서 베드로는 마가를 가리켜 내 아들 마가라 부릅니다.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사로 일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런데 이 복음서는 놀라울 정도로 베드로와 사도들의 약한 모습, 비겁한 행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는 말까지 들었음을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8:33).

그것은 사도들이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가감 없이 성도들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서의 저자들 역시 사도들을 미화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넘어서지 않게 하려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처절한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교회가 이러한 자세를 본받지 못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영어에 “nepotis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족벌주의라는 뜻으로 정치나 경제, 스포츠 종교 등 각 영역에서 자신의 친족이나 학벌 등의 가까운 사람들을 중용하는 행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중세교회의 교황과 주교들이 자신의 조카(nepos)들을 고위 성직자로 세운 데서 유래했습니다. 공적인 기관인 교회가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온상이 되고, 주님의 교회가 인간의 기관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중세의 성직자들에게 교회가 너무 익숙한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세의 교회에서 성직자들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권한을 성직자들이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결정이 곧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 되어, 아무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아무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편한 공간이 되다 보니, 이내 교회는 그들에게 집과 같은 사적 공간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와 같은 공과 사의 혼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마저도 성서의 권위 아래에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교회가 교회 지도자들의 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재확인함으로써 교회의 공공성을 되찾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종교개혁입니다.

한국교회의 공공성

금년 가을 개신교 각 교단의 정기총회는 온라인으로 열렸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도 본부에는 진행자를 포함하여 오십 명 이내의 인원만 참여하고 전국 38개 교회에 총대들을 분산하여 온라인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현장에는 소수만 있었지만, 거기에 연결된 총대 수가 천오백 명이었고, 그 외에도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관심 있는 모든 사람이 온라인 중계를 통하여 총회 현장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총회의 자리가 교회의 공공성을 잘 보여주는 한국 공교회의 모범이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왜냐하면 총회는 명실공히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250만 성도들을 대변하는 공교회의 의사결정 기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총회의 현실은 그 기대와 너무 멀었습니다. 거기에 공교회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이 교단의 대표로서 모든 성도의 뜻을 대변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이 충분히 공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총회가 끝난 후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이 교단의 변화를 위해 목소리를 모으고 있습니다. 105회 총회 결의에 대한 항의문에 20일까지 1,122명의 목사, 신학자, 전도사, 선교사가 서명했습니다. 이 항의문은 이번 총회가 교단의 대표 기구로서 우리 교단에 속한 성도들의 뜻을 정확히 대변하지 않았음을 천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번 총회의 결정, 특히 목회자 대물림 금지에 관한 헌의 안건을 총회에서 다루지 않고 다시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서명자들의 명단을 잘 보시면 그분들이 우리 교단 대다수 성도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음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항의문은 첫걸음일 뿐입니다. 그 후에도 한국교회의 공교회성을 회복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이 계속될 것입니다. 목회자들의 움직임은 상징적인 것일 뿐입니다. 교회 개혁은 목회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곧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 503주년 기념 주일을 보내며, 한국교회를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한국교회의 현실이 참 어둡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에게 어둠 속에 빛을 보이시고, 우리가 오직 주님의 빛을 따라 바른길로 나아가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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