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제사> 이야기의 또 하나의 중요한 해석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시켜 해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해석이 아브라함의 삶과 신앙에 초점이 놓였다면 이 해석은 ‘아브라함의 신앙’에서 ‘이삭의 희생’으로 초점이 옮겨진다.
창세기 22:1-19은 유대 전승에서 “아케다”로 기억된다. “아케다”는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자기 아들 이삭을 “묶었다”(창 22:9; הָעֲקֵידָה aqedah, The Binding)는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신약의 골고다는 바로 이런 유대적 “아케다”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미드라쉬적으로 적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사랑받는 독자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희생되었듯이, 독생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희생되었다는 해석이다.
하란에서 시작된 아브라함의 긴 영적 오디세이
마지막 이야기는 제의의 영역이 신앙의 영역으로
신에게 바치는 인신조공에서 믿음의 시험으로 변형된다.
하란을 떠날 때는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이 있었지만
마지막 하나님의 명령에는 아무런 언약도 없고
당신의 약속을 완전 무화시키는 명령만이
온갖 소유의 욕망에 대한 영원한 비움만이
이스마엘은 이미 곁을 떠났고
이제는 이삭마저 산 제물로 바치라 하신다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한결같은 무욕의 충성
삶의 끝은 삶의 시작이다.
생의 끝이 생의 시작이다.
유대신앙은 아버지의 경건과 아들의 자발적인 희생을 성경적 신앙의 유산으로 계승하였다. 특히 신구약 중간기를 지나며 이삭의 “아케다”는 “하나님의 어린양”(the lamb of God)으로 재해석되게 된다. “지혜는 한 의인을 보잘 것 없는 나뭇조각 위에 실어서 또 한 번 세상을 구해 주었다“(지혜서 10:4, 공동번역) 이삭이 아브라함의 사랑받는 독자였듯이, 예수님께서도 사랑받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미드라쉬는 이삭을 고난받는 종의 표상과 일치시킨다.
그림은 16세기(1535년) 프랑드르 지역의 화가가 그린 것이다. 그림을 보면 쉽게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 있게 그렸다. 그림은 아브라함이 종들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오르기 전 큰 장작더미를 작은 아들의 등에 메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삭은 장작을 메고
아브라함은 양손에 각각 불과 칼을 들고
산꼭대기를 향해 오른다.
장작을 등에 메고 모리아 산을 오르는 이삭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로 오르는 예수님
산 정상의 제단에서 이삭의 희생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의 희생
하늘에는 먹장구름 가득하고
그 사이로 새떼들만 나른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모리아 산의 “아케다” 이삭과 유월절 희생양 그리고 고난 받는 종의 이미지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