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사람] 차보욱 원로 장로(보성읍교회), “살아 숨 쉬는 동안 주님께 충성하는 것”
[믿음의 사람] 차보욱 원로 장로(보성읍교회), “살아 숨 쉬는 동안 주님께 충성하는 것”
  • 정성경 기자
  • 승인 2020.09.21 09: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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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18 좋은이웃 밝은동네’ 시상식에 ‘좋은이웃 개인부문 버금상’을 수상한 차보욱 장로(보성읍교회, 보성평생대학 학장).

 

어머니의 기도로 회심한 후

욥의 인내를 기억하며 살아온

흔들리지 않은 신앙의 발자취

지역을 위한 사랑과 헌신으로

보성군의 ‘좋은 이웃’ 인정받아

2018년 11월, 차보욱 장로(보성읍교회, 보성평생대학 학장)가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18 좋은이웃 밝은동네’ 시상식에 ‘좋은이웃 개인부문 버금상’을 수상했다. 전남도와 광주광역시, kbc문화재단이 kbc광주방송과 함께 진행하는 ‘좋은이웃 밝은동네’ 시상식은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며 살맛 나는 고장 만들기에 앞장선 시민과 동네를 발굴해 지역공동체 실현을 촉진 시키고자 2005년부터 진행된 시상식이다.

보성평생대학 학장인 차보욱 장로에 대해 “평생을 고향 보성을 위해 남다른 애향심으로 향토문화 발전과 자원봉사활동에 앞장서 온” 것으로 평가한다. 특히 1995년 보성평생대학을 설립해 교육 소외계층인 노년층에게 27여 년 동안 양질의 배움의 기회를 제공한 것에 주목했다.

차 장로는 보성평생대학을 통해 보성군민의 삶의 질 향상과 여가문화 확산에 기여했으며 500여회가 넘는 인문 교양강좌를 개최하고 다양한 취미 교실 등을 통해 행복한 지역공동체를 만드는데 앞장서고 있다. 또 10여 년 전부터 꾸준히 경로위안잔치를 개최해 지역사회에서 경로효친 사상을 고취하고 매주 첫째 토요일이면 보성역 광장에서 이웃과 함께 사랑의 점심 나누기 행사를 개최하는 등 그의 지역사회를 위한 사랑과 섬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차 장로의 지역 사랑의 기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자신이 경험한 사랑을 지역사회에 고스란히 전하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신실한 신앙인이자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그의 어머니였다.

1936년 보성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차 장로는 어머니 박옥금 권사의 독실한 신앙을 어렸을 적부터 보고 자랐다. 보성읍교회에서 설립한 보성유치원에서 조보모로 수고했던 그의 어머니는 처녀 시절부터 일본 경찰들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할 정도로 독실했다.

1945년 조국은 해방을 맞이했지만 남과 북이 나뉘면서 이념전쟁에 보성군도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우마차 조합장이었던 차 장로의 아버지도 몇 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겼지만 1950년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인해 차 장로의 가족은 광주로 이사를 하게 된다.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차 장로는 중흥교회에서 아동부 교사와 성가대를 하면서 10여 명의 아동부가 연말에 40명이 되는 부흥을 경험하기도 했으며 1년 동안 수십 번 성경을 통독하기도 했다.

교회에서는 차 장로가 신학대에 가길 바랐지만 차 장로의 아버지는 농과대학을 가서 가업을 잇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전남대학 농과대학에 입학했지만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로 학교를 그만두고 순천에서 양조장을 하시는 부모님을 돕기 위해 광주를 떠났다.

한국전쟁 직후 한국 사회는 무법천지였다. 차 장로가 어느 날 집에 와보니 사채업자가 고용한 상이군경들이 손에 도끼와 망치, 낫을 들고 술독과 집기 등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있었다. 여러 차례 애걸 끝에 한 달간의 기간을 벌었지만 이후에도 집에 몰려드는 채권자들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차 장로는 자살을 결심했다.

순천시장에서 청산가리를 사온 그는 사랑방에서 물을 떠놓고 약을 먹으려는 순간, 왈칵 문이 열리며 그의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그리고 청소도구를 들고 와 방을 닦으셨다. 아들의 행동을 주시하시던 중 어쩐지 수상해 따라 들어온 것이다. 어머니는 눈문을 흘리며 “보욱아, 내가 예수는 오래 믿었지만 성경은 네가 더 많이 봤지 않느냐? 욥의 인내를 기억해라!”라고 말씀하시곤 눈물을 닦으시고 나가셨다.

차 장로는 수십 번 성경통독을 하며 읽었던 욥기 23장 10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를 떠올리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봤다. 그는 신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것이 요나와 같았고, 부유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당시 아버지가 양조장(당시 양조장은 마을의 부의 상징이었다)을 하려고 했을 때 “예수 믿는 집에서 양조장을 하면 안된다”는 어머니의 간곡한 애원을 뿌리치고 아버지를 부추겨 양조장을 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회개했다.

“그때 하나님께 무릎 꿇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주님 뜻에 맡기겠다고, 우리 가정 목숨만 구해주신다면 죽도록 주님 위해 살겠다고 기도했다.”

그럼에도 빚 갚을 날은 다가오고, 차 장로의 아버지는 약속한 날 밤 10시가 되어 돌아와서 “이제 우리는 죽었구나. 내가 미안하다. 다 내 죄 때문이다”며 가족들을 끌어안고 우셨다. 빚쟁이 할아버지의 성격을 아는 차 장로는 꼼짝없이 그날 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늦은 밤이었지만 차 장로는 큰 소리로 ‘고대가’를 부르며 논두렁을 지나고 공동묘지를 지나 빚쟁이 할아버지 집을 찾아갔다. 그 집에 다다르기 전, 공동묘지에서 마지막으로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때 시편 91편 15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는 음성이 그에게 들렸다. 그리고 눈을 뜨자 차 장로가 만나고자 했던 빚쟁이 할아버지가 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사정을 들은 빚쟁이 할아버지는 집을 팔고 떠날 때 전액을 갚기로 다짐을 받은 후 그를 보내줬다.

2008년 보성평생대학 10년사 출판기념회에서 차보욱 장로

이후에도 차 장로와 동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부대교회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것, 재건국민운동 교육 간사로 발탁되어 고향에서 청년회장과 부녀회장들을 교육해 마을의 발전을 도모하고 각 읍면에 상록양재 학원을 개설해 농촌계몽 운동에 큰 역할을 한 것, 이 모두가 순천을 떠나면서 서원했던 “나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 그의 실천과 신실한 하나님의 역사였다. 그러나 잠시 세상에서 방황하며 폐결핵으로 또 다시 죽을 고비를 넘긴 그는 여전히 그를 놓지 않는 어머니의  사랑을 다시 한번 깨닫고 돌아오게 된다.

1968년, 차 장로는 보성에서 처음으로 문화원을 시작했다. 부원장으로 시작한 그는 1973년 원장으로 취임해 청소년과 주부들을 위한 독서운동을 시작했으며 1983년에는 처음으로 전국적인 문화행사인 보성다향제를 개최하고, 1990년도에는 전국시범 문화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84년 피택 장로가 된 차 장로는 1995년 보성읍교회 80주년 행사를 앞두고 “인간은 누구에게나 행복할 권리가 있는데 지역이 열악하고 낙후되어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소외되면서 좌절과 실의에 빠져 무기력해져가는 노인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 생활에 활력을 불러일으켜 여생을 행복하게 지내도록 해야한다”고 제안해 노인대학을 설립했다. 그리고 2002년에는 보성읍교회에서 복지관을 건축하고 개관했다.

2015년 보성평생대학 16기 졸업식에서 차보욱 장로

현재 보성평생대학의 재학생은 230여 명으로 졸업생만 1600여 명이나 된다. 지역사회 대부분 어르신들이 이곳 출신이다. 오랫동안 지역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차 장로의 끊임없는 헌신과 봉사, 그리고 지역사회를 위한 대내외적인 특별한 행사와 강연회 때문이었다.

500여회가 넘는 강연 가운데 미국 백악관 장애인 특별보좌관이었던 강영우 박사를 비롯해 한국 최초 경제학 박사 백영훈 박사, 유태영 박사, 이한빈 부총리를 비롯한 전석홍 장관 및 정부산하 기관장, 대학총장, 국회의원, 대학교수, 교단 총회장, 법조인, 연예인, 목사, 언론인 등 사회저명 인사들이 강의를 맡았다. 차 장로는 “보성평생대학 25주년을 맞아 그동안 이곳에서 강연을 해준 분들의 강의 내용을 책으로 엮으려고 한다”고 밝혔다.

올해 85세를 맞는 차 장로의 기도 제목은 “살아 숨 쉬는 동안 주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의 기도로 죽음 앞에서 회심한 그의 서원대로 “하나님이 조용히 나를 하늘나라로 부르실 때까지 남을 위해 사는 삶을 끝까지 실천하고자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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