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화가들이 만난 아브라함의 제사③ 렘브란트의 그림으로 읽는 아브라함의 제사
[전문가 칼럼] 화가들이 만난 아브라함의 제사③ 렘브란트의 그림으로 읽는 아브라함의 제사
  • 심광섭 목사
  • 승인 2020.09.19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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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제사’(창 22:1-14) 이야기는 나에게 평생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아있는 본문이다. 목을 잡고 꺽꺽 소리를 질러도, 퉤퉤 침을 뱉어도, 물을 마시거나 밥을 통째로 삼켜도 목에 위태롭게 걸려 있다. 일어나 몸을 좌우로 흔들고 펄쩍펄쩍 뛰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얼굴이 벌게지고 호흡이 가빠져도, 그 본문은 삼키다 잘못 걸린 생선의 가시처럼 목에 걸려 있다. 몸 밖으로 나오지도 몸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는다.

키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에서 그 멀리 이른 아브라함의 “믿음”을 탐구한다. 구약 신학자 폰 라트는 이 본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순종, 순명하는) 인간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고 결론 내린다. 구약의 하나님체험은 갈수록 깊어지지만 그 이미지는 더욱 흐릿해진다. 렘브란트는 20여년 다섯 차례의 그림을 통해 아브라함이 체험한 하나님을 통해 그의 삶의 의미를 새기고자 했다.

아래 그림은 <아브라함의 제사>에 관한 렘브란트의 그림 중 가장 잘 알려진 그림이다.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에서 살았던 개신교도 화가로서 교회의 그림 청탁을 받을 수 없는 환경에서 종교화를 그린 사람이다. 그는 성경을 소재로 가장 많은 그림을 그린 화가다. 성경의 표현과 처리가 전통 교회 공간을 떠남으로써 세속적이 되었지만 표현의 자유를 얻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는 교리적, 교회적 보편성은 뒤로 물러나고 영혼의 자유와 경건이 솟아난다.

렘브란트의 그림들은 그의 자유로운 예술적 심혼에서 나온 것인 만큼, 무엇이 그로 하여금 성경의 내용을 그리게 하였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아브라함의 제사> 같은 경우에는 여러 번(1635, 36, 45, 55년에 2회) 그렸기 때문에 과연 본문의 무엇이 렘브란트를 이다지도 오랫동안 사로잡았을까, 더욱 묻게 된다. 종교적 테두리인 “미술작품은 말 못하는 우상에 불과하다”는 개혁파 하이델베르크 신조도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의 충일하다 못해 한껏 넘쳐나는 예술의 천성적 끼를 막지 못했다.

본문의 어떤 말씀이 그토록 강렬하게 그렇게 여러 번 오랜 기간 그림의 동기를 이끌어 냈을까? 그의 삶의 체험의 파고 속에서 생긴 종교적 반응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렘브란트는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성경 이야기와 친숙하다. 그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탁월한 눈으로 오래 전부터 익숙하게 알던 것을 살피듯 성경 이야기를 이미지화 한다. 성경 이야기는 그의 손에서 항상 새롭게 태어나고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렘브란트, '아브라함의 제사', 1635년, Oil on canvas, 193 x 132 cm(왼쪽), 1636년. Oil on canvas, 195 x 132 cm(오른쪽).
렘브란트, '아브라함의 제사', 1635년, Oil on canvas, 193 x 132 cm(왼쪽), 1636년. Oil on canvas, 195 x 132 cm(오른쪽).

이 두 그림은 렘브란트가 이 사건을 가장 극적으로 형상화해 놓은 것이다. 두 번째 그림(1636)은 1635년에 그렸던 것을 한 제자가 다소 자유롭게 베꼈다. 렘브란트는 이 모사품을 1636년에 다시 만져 덧칠했다.

그림은 성경 이야기의 절정(창 22:9-12)에서 표출되는 광기어린 사나움과 격정의 외적 행동에서나 보이지 않는 인물의 내적 움직임, 인물의 영혼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형상화한다. 이삭은 나무 장작더미 위에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눕혀 있다. 아비의 왼손이 손가락으로 이삭의 얼굴 전체를 단단히 움켜쥐고 목을 사정없이 뒤로 젖혀 누르고 있다.

카라바조의 이삭에서처럼 이삭의 의심과 고통이나, 반항이나 고함소리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삭을 바치겠다는 아브라함의 결행의 결의는 무서울 정도로 사나워 보이고, 인정(人情)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감정상 동요를 억누르고 있는 듯 보인다. 아연실색한 눈은 성난 듯 크게 부라리고 있다. 무엇에 혼을 빼앗긴 듯, 자신의 행위가 천사에게 훼방 받는 것이 싫다는 표정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천사가 노인의 손목을 꼭 붙잡자 칼이 벌써 떨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허공에 얼어붙은 듯 공중에 매달려 있다. 떨어지는 위치나 각도로 보아 이삭의 몸을 비켜 있으나 아직 긴장의 숨을 멈출 수 없다. 천사에게서 나가는 밝은 빛은 칼로 치려고 길게 드러낸 이삭의 목선과 목젖에 떨어지고 있다. 이야기의 극적인 전환이 가능한 한 역동적이며 사실적으로 어마어마한 캔버스 위에 잘 표현되어 있다.

1636년의 그림에서는 뒤편에서 아무도 모르게 나타난 숫양이 그려져 있고 천사의 위치가 변동되었다. 천사는 아브라함의 최악의 순간을 방해하기 위해 왼쪽으로부터 날아들지 않고, 사건의 긴장이 정점에 달한 최후의 순간을 정지시키기 위에 위에서 아래로 하강한다.

긴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나님체험의 요체는 무엇일까? 하나님이 스스로를 감추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공포”(Furcht), 하지만 현실적 버림받음의 경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명하는데서 오는 존재를 뒤집는 “전율”(Zittern), 살의 떨림이 아닐까? “아름다움은 어두운 측면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Beauty is not without its dark side. 틸리히)

신앙은 감각적 경험을 통해 그 예봉이 찬연하게 빛난다. “직관과 감정”(슐라이어마허), “누미노제적 신비, 떨림과 매혹”의 체험(오토), “공포와 전율”(키르케고르)은 하나님 앞에서 생생히 살아 있는 신앙의 이 맥을 잘 짚어준다.

인간의 육신을 통해 받은 이삭, 하나님의 언약의 실현이긴 하였지만 아브라함의 소유로 생각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인 되었다. 이삭은 이제 아브라함에게 속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속한다.

하나님에 대한 무한사랑 안에서의 무한신뢰, ‘하나님 경외’는 사실 하나님의 은총을 믿음으로 감지한 하나님에 대한 응답이다. ‘하나님 경외’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 직관적으로 공명하는 ‘신인감응지리’(神人感應之理)이며, “사랑을 잃은 자 다시 사랑을 꿈꾸고, 언어를 잃은 자 다시 언어를 꿈꾸게“(심보선) 하는 그리스도교적 삶의 프락시스이다.

심광섭 목사 전 감신대 교수(조직신학/예술신학)예목원 연구원
심광섭 목사
예술목회연구원 공동대표
(조직신학/예술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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