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화가들이 만난 아브라함의 제사 ② 가톨릭의 아브라함과 개신교의 이삭, 카라바조
[전문가 칼럼] 화가들이 만난 아브라함의 제사 ② 가톨릭의 아브라함과 개신교의 이삭, 카라바조
  • 심광섭 목사
  • 승인 2020.09.12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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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생명이란 인간이 스스로 받아들여야 할 죽음이면서도 동시에 이것이 참 삶으로의 길인가보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열매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그분의 명령을 듣는다.

예물이나 사례가 아니라 번제물로 바쳐 재가 되어버리게 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아비는 제 자식의 피로 손을 물들이고 더럽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순과 비극은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의 부인을 아내로 맞이한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보다 더 심한 것이다.

루터 전통은 이런 현실의 모순과 비극의 경험을 신앙의 “시련”이라 한다.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크나큰 시련을 여러 차례 당하기 마련이다. 아브라함이 겪는 시련의 본질은 하나님이 스스로 언약을 어겨 인간에게 닥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극은 인간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시련의 의미는 실재를 보는 근본적인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는 데 있다. “인간의 인간 놀음에 개구리 돌 맞아 애꿎게 죽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하나님 놀이에는 겉사람은 죽고 속사람이 거듭난다.”

카라바조, '이삭의 희생', c.1603, 104 x 135cm.
카라바조, '이삭의 희생', c.1603, 104 x 135cm.

한국 개신교는 미술작품에 대해 “미술작품은 말 못하는 우상에 불과하다”라고 매우 부정적으로 규정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가르침을 근본적으로 극복해야 한다. 오히려 미술은 영적 요소를 구체적 형태로 체험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의 깊은 욕구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림은 카라바조의 것이다.

카라바조(Caravaggio, 1573-1610)는 정서불안에서 비롯된 제멋대로인 성격과 천부적인 재능, 선술집에서의 폭음과 격렬한 싸움, 그리고 많은 빚과 음침한 친구들, 반복된 투옥, 살인 혐의, 수년간의 도주생활, 때 이른 죽음 등 천재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항목들을 완벽하게 갖춘 가장 찬미 받는 회화의 반항아들 중 한 명이다. 화가의 이런 개인사를 보면 경건한 신앙과 매우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는 인상이 든다.

그러나 모순이 없는 삶, 어둠이 없는 삶을 살지 않는 이 어디 있는가? 강한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명암법을 사용한 그의 독창적인 표현법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지녔고, 로마 가톨릭의 대항종교개혁적인 복음을 전파하려는 열의와도 조화를 이룬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드문 가로 규격에다가 근접 시점이다. 그림은 관람자로 하여금 사건의 현장에 참여한 듯한 생생함을 불러일으킨다. 카라바조는 다른 화가들과는 매우 달리 희생되는 이삭의 모습을 아주 사실적으로 그렸다.

이삭의 알몸은 돌 제단에 던져진다. 그의 머리는 짓이겨지고 있다. 이삭은 우리를 향하여 고통스럽게 바라본다. 고통을 호소하는 눈은 바라보는 이를 삼킬 것만 같다. 겁먹은 비명소리는 산천초목에 쩌렁쩌렁 울리는 듯하다. 아브라함이 굳게 잡은 단검은 예리하게 빛을 뿜고, 이삭의 이마에 흘러내리는 진땀은 쏟아지는 소낙비를 연상케 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옷을 벗기고 등 뒤로 두 손을 묶었다. 아들의 목덜미와 관자놀이를 누르는 손길에 망설임이나 주저함을 읽을 수 없다. 허리춤에서 빼든 단검은 엎어진 제물의 멱을 끊을 것이다. 왜 화가는 고통스럽게 저항하는 이삭을 그렸을까?

카라바조, '이삭의 희생', c.1603, 104 x 135cm.
카라바조, '이삭의 희생', c.1603, 104 x 135cm.

가톨릭의 트렌트 공의회 이후 대항종교개혁은 <이삭의 희생>을 종교개혁의 부당성을 선전하는 미술의 주제로 삼았다. 아브라함은 가톨릭, 이삭은 개신교를 의미한다. 이삭이 경건한 자세를 버리고 반항하기 시작한다. 개신교는 ‘반항인(protestant)’의 몸동작이라는 것이다.

천사의 다급한 상황, 착지하자마자 날개도 접지 못한 채 손짓으로 파국을 저지하고 건너편에 고개를 쳐들고 있는 하나님이 준비한 숫양을 가리킨다. 무의미하게만 보이는 고통은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와 만나 신앙의 시련이 된다.

아브라함의 뒤쪽, 화면의 중앙에서 자라는 나무에서는 부러진 가지에서 새순이 돋아나온다.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이문재)

자신을 나무둥지로 생각하며 종교개혁을 비방했던 당대의 가톨릭에서조차 가지(개신교)에서 돋아나는 새순을 인정한 것이다. 오늘날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 이단이라고, 아니 아예 다른 종교라고 생각하는 한국 교회의 현실과 너무 거리가 멀다.

심광섭 목사 전 감신대 교수(조직신학/예술신학)예목원 연구원
심광섭 목사 
예술목회연구원 공동대표(조직신학/예술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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