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사람] 향산 한영제 장로(신흥교회,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설립자) "한국교회 역사에 큰 획을 그은 향산 한영제 장로"
[믿음의 사람] 향산 한영제 장로(신흥교회,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설립자) "한국교회 역사에 큰 획을 그은 향산 한영제 장로"
  • 김성해 기자
  • 승인 2020.07.10 15: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장통합 내 유일한 장로 총회장
문서 선교 위해 기독교문사 설립
한국 기독교 역사 보존 힘쓰고자
이천에 기독교역사박물관 개관해
한국교회의 역사와 문서선교를 위해 일평생 힘써온 향산 한영제 장로는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과 기독교문사 사역 외에도 이천한나원, 한나요양원, 한나그릴힐 등을 설립하며 노인 복지에도 힘써왔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제공
한국교회의 역사와 문서선교를 위해 일평생 힘써온 향산 한영제 장로는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과 기독교문사 사역 외에도 이천한나원, 한나요양원, 한나그릴힐 등을 설립하며 노인 복지에도 힘써왔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제공

‘전무후무’. 故 향산 한영제 장로(신흥교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총회장 김태영 목사, 이하 예장통합) 104명의 총회장 중 직분이 장로였던 사람은 한영제 장로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한 장로의 장남 한동인 장로(신흥교회 원로)는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에도 장로가 총회의 부총회장으로 나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여건이었다. 특히 젊은 목회자들 중에서는 장로가 부총회장이 되면 안된다며 반대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며 “그러나 부총회장 선거에서 목사 후보와 겨뤄 정당한 과정을 거쳐 표를 얻고 부총회장이 됐다는 것은, 투표권을 가진 목회자들 중에서도 아버지를 부총회장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고 회고했다.

한동인 장로는 당시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주변의 많은 권유들을 받으며, ‘해야 할 일’이란 사명감을 갖고 부총회장 후보 자리에 올랐던 부친 한영제 장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아버님이 최초로 장로 부총회장, 총회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긴 세월의 길을 걸어오시면서 스스로 쌓고 다져놓은 업적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며 “자식인 나조차도 아버지의 모습이 존경스러웠고 지금도 존경스러운데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고 덧붙였다.

한영제 장로에 대한 호평은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정승준 장로(신양교회)는 한 장로의 추모문집 ‘오직 예수의 사람’을 통해 ‘한국 교회 장로들의 존경의 표상’이라고 정의 내렸다.

또 장로회신학대학교 임희국 교수는 “한영제 장로님에게서는 항상 향기로운 그리스도의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누구에게나 따뜻한 손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던 분”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다수의 인물들이 한 장로를 ‘인간애의 실천자’, ‘고향 친구’, ‘인생의 스승’, ‘사랑의 빚’ 등의 단어로 정의했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내 설립한 장대현교회 기공예배 당시 한영제 장로 모습.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제공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내 설립한 장대현교회 기공예배 당시 한영제 장로 모습.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제공

한동인 장로는 “아버님은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늘 사람들에게 베풀려고 하셨다. 타인에게 애정이 많은 분이셨다”며 “자신을 찾아온 사람은 그 누구라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60, 70년대 당시 목회자들 중 상당수가 형편이 어려웠는데, 아버님은 밥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고 보내셨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말했다.

사람 한 명을 귀하게 여겼던 한영제 장로는 1925년 6월 4일 평북 구성군 사기면 향산동에서 5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한 장로는 목회에 뜻을 두고 1946년 평북노회 선천고등성경학교에 입학했지만, 공산주의 정권 수립과 기독교 탄압을 피하기 위해 월남한 이후 영락교회 피난민 수용소에서 생활했다.

이후 한 장로는 목회자의 꿈을 이어가기 위해 서울기독교청년회(YMCA) 중앙신학교에 입학했지만,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중단하고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하루하루 미곡 매매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한 장로는 원주 치악산 전투에 참전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대구 대명동 피난민 수용소에서 생활했다. 그 때부터 복음을 위한 그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영제 장로는 피난민 수용소에서 만난 평북 출신 교인들과 뜻을 모아 대구 평북교회를 설립했다. 이후 교회를 통해 이성호 목사와 정학선 장로, 정영록 장로와 인연이 닿게 됐고, ‘앞으로 문서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 효과적인 시대가 올 것’이라는 이 목사의 뜻에 동참해 1955년 5월 12일 대구 서문시장 입구에 ‘정문사’를 설립했다. 이 정문사가 오늘날 기독교문사의 시초였다.

한국전쟁 이후 책 한 권이 귀하던 시절이기에 정문사는 설립되는 순간부터 기독교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교계의 긍정적인 반응을 보고 용기를 얻은 한영제 장로는 이듬해인 1956년 12월 15일, 기독교 도서 전문 출판사로 ‘기독교교문사’를 설립했다. 이후 정문사와 기독교교문사는 문서선교를 위해 1958년 서울 충무로로 이전했으나, 4.19 학생의거와 사회 혼란, 경제 불황, 재정적 압박 등으로 인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문서선교와 한국기독교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향산 한영제 장로.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제공
문서선교와 한국기독교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향산 한영제 장로.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제공

그러나 한 장로는 문서선교의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1960년 11월, 종로5가 한 책방 구석에서 성경책 판매하는 일을 1년 동안 지속해왔다. 마침내 그는 1년 만에 종로5가 407번지에 ‘교문사’ 서점을 열고 문서선교 사역을 다시 시작했다. 이후 한영제 장로와 교문사는 ‘죽으면 죽으리라’ 위탁 출판 형태의 간행으로 교계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고, 1970년 2월 기독교 전문 출판사인 ‘기독교문사’를 설립했다.

문서 출판과 보급으로 민족의 복음화 및 한국 기독교문화 창달을 목적으로 한 기독교문사는 ‘바클레이 성서주석’과 ‘매튜헨리 성서주석’, ‘헬라어 문법’, ‘라틴어 문법’, ‘히브리어 문법’, ‘성서원어대사전’, ‘한국 기독교 인물사’, ‘한국 기독교 전래사’, ‘한국 기독교 성장사’, ‘한국 민족 기독교 백년사’, '한국 기독교 수난사‘ 등 성경과 성서신학 연구의 기초 교재 및 한국 교회사 관련 도서들을 지속적으로 출판했다.

이후 한 장로는 기독교문사 서점과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성서와 신학, 역사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국내외에서 수집할 수 있게 됐다. 당시 그가 수집한 자료들은 고문헌과 도서 잡지, 신문, 사진, 포스터, 마이크로필름, 고인 유품 등 종류가 다양했고, 이 중에는 한국 기독교 역사와 관련된 귀중한 자료들도 내포되어 있었다.

한영제 장로는 역사적인 자료들을 한국교회 연구자들과 교인들이 함께 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가 박물관 설립이란 해답을 떠올리게 됐다. 그리고 2000년 11월, 경기도 이천시 대월면 초지리에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을 개관했다.

이후 그는 반려자 고화일 권사와 함께 박물관 자료를 정리하면서 남은 생을 보냈으며, 2007년에는 평양 대부흥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박물관 부지 내 ‘평양장대현교회’를 축소 복원했다.

1994년 그는 총회장 직책을 마치고 정년 은퇴를 했지만, 한국기독교의 문서선교 사역과 역사 보존을 위해 마지막까지 힘을 쏟아 부었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은 개관 이후 한영제 장로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해 기획 특별전을 열고 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관장으로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는 한동인 장로는 “현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문헌들, 유물들은 한국 기독교 역사, 한국 역사에 귀중한 자료들이다. 이 자료들이 잘 보관되어야 하고, 또 한국교회사를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일에 기여할 수 있는 박물관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박물관 역사적 자료들을 통해 한국교회 많은 성도들이 한국교회 역사를 마음속에 품고 살아갈 수 있는 귀한 계기를 만들어내고 싶다”고 소원했다.

한 장로는 또 “요즘 한국교회 많은 사람들이 역사에 대한 관심이 저조한 편”이라며 “역사의 중요성을 깨닫고, 박물관 사역이 귀하다는 것을 인지해서 한국교회 역사를 보존하고, 그 역사를 통해 우리 신앙이 거듭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권면하며 마무리지었다.

가스펠투데이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Array ( [0] => Array ( [0] => band [1] => 네이버밴드 [2] => checked [3] => checked ) [1] => Array ( [0] => talk [1] => 카카오톡 [2] => checked [3] => checked ) [2] => Array ( [0] => facebook [1] => 페이스북 [2] => checked [3] => checked ) [3] => Array ( [0] => story [1] => 카카오스토리 [2] => checked [3] => checked ) [4] => Array ( [0] => twitter [1] => 트위터 [2] => checked [3] => ) [5] => Array ( [0] => google [1] => 구글+ [2] => checked [3] => ) [6] => Array ( [0] => blog [1] => 네이버블로그 [2] => checked [3] => ) [7] => Array ( [0] => pholar [1] => 네이버폴라 [2] => checked [3] => ) [8] => Array ( [0] => pinterest [1] => 핀터레스트 [2] => checked [3] => ) [9] => Array ( [0] => http [1] => URL복사 [2] => checked [3] => ) )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제동 298-4 삼우빌딩 402호
  • 대표전화 : 02-742-7447
  • 팩스 : 02-743-744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상현
  • 대표 이메일 : gospeltoday@daum.net
  • 명칭 : 가스펠투데이
  • 제호 : 가스펠투데이
  • 등록번호 : 서울 아 04929
  • 등록일 : 2018-1-11
  • 발행일 : 2018-2-5
  • 발행인 : 채영남
  • 편집인 : 박진석
  • 편집국장 : 류명
  • 가스펠투데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가스펠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ospeltoday@daum.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