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는 몇 년 사나요?” 와이너리에 방문해서 포도밭을 둘러보다 보면 흔히 하는 질문이다. “놔두면 꽤 오래 살아요.”라고 대답하곤 한다. 수령이 가장 많기로 알려진 포도나무는 슬로베니아 마리보르에 있다.
17세기에도 살아있었다고 전해진다. 포도주를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포도를 재배하는 지역 가운데 제일 오래된 포도나무가 있는 곳은 호주 남부 바로사 지역이다. 이곳에 가장 오래된 포도나무들은 1847년에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포도주 제조 역사가 오랜 유럽에 포도나무 고목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는 19세기 중반에 유럽 대륙을 휩쓸며 포도주 산업 지도를 바꾸어버린 병충해 때문이다. 이때 특히 프랑스가 큰 피해를 입었다. 근래 들어서는 상업적으로 이윤이 남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정 시간이 지나면 포도나무를 뽑고 밭을 갈아엎기 때문이다.
인기 좋은 품종으로 바꿔 심기도 한다. 대체로 포도나무 수령이 3년에서 20년 정도일 때 생산된 포도로 여러 면에서 이상적인 포도주를 만든다. 어쩌다 오래 남겨진 포도나무들은 당연히 유행과 상관없는 품종이기 일쑤다.
라벨에 올드 바인(old vine, 또는 프랑스어 이탈리아 독일어 어떤 언어로든)이라고 써있는 포도주에 소비자가 기대하는 것은 긴 세월이 포도나무에 부여했을 가치다. 사실 그 재료가 된 포도를 생산한 나무의 수령이 얼마인지, 그런 나무에서 생산된 포도주가 어떤 비율로 들어있는지는 대개 알 수 없다.
수령이 30년이기도 하고 50년이기도 하고 80년이기도 하다. 20%를 담을 수도 있고 100% 올드 바인일 수도 있다. 이렇다 할 규정도 거의 없을뿐더러 규정을 만들어야 할 만큼 오래된 포도나무가 많지 않아서인 것도 같다. 다만 일반적으로 올드 바인이 가진 특징은 있다. 젊거나 성숙한 포도나무에서 난 포도보다 더 농축된 과일 맛을 낸다. 결과적으로 포도주도 더 진한 맛을 낸다.
포도나무 뿌리는 땅속 1m 정도에서 성장에 필요한 영양과 수분을 끌어올 수 있다고 한다. 오래된 포도나무는 뿌리가 훨씬 깊다. 토양과 여러 성장 조건에 따라 땅속 6m까지 깊이 파고 들어간 뿌리도 발견된다. 그래서 오래된 포도나무는 자신이 자리한 땅의 성격을 더 드러내기 마련이다. 가뭄이나 비바람에도 강하다.
지난해 다르고 올해 다른 기후에도 휘둘리지 않고 꾸준하게 잘 익은 열매를 생산한다. 긴 세월 동안 포도나무가 체화한 경험의 결과라고 할까. 오래된 포도나무가 농부의 파트너라면, 농부는 파트너의 성실함에 맘놓고 기댈 수 있다.
문제는 포도알 크기가 작고 열매도 전성기에 비해 훨씬 적게 열린다는 점이다. 가만 놔둬도 주변 상황에 일희일비하는 일 없이, 가꾸느라 농부가 애쓰지 않아도 크게 손타지 않고 저 혼자 알아서 균일하게 잘 익은 포도를 내는 큰 장점에도 불구하고 생산량이 적다는 것은 이윤을 남겨야 하는 측에서는 반갑지 않다. 이윤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바란다면 역시 세월을 이겨낸 포도나무가 얼마나 든든할까.
시편 가운데 의로운 사람을 나무로 표현한 찬양은 오래된 포도나무를 떠오르게 한다. 주님께서는 의인을 지켜주시어 그들이 나이 들어서도 주님의 정의를 드러내게 하신다는 고백이다.
“의인은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높이 치솟을 것이다. 주님의 집에 뿌리를 내렸으니, 우리 하나님의 뜰에서 크게 번성할 것이다. 늙어서도 여전히 열매를 맺으며, 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르를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의 올곧으심을 나타낼 것이다. 주님은 나의 반석이시요, 그에게는 불의가 없으시다.”(시편 92편 12-15절, 새번역) 오래된 포도나무처럼 하나님의 뜰에 깊이 뿌리 내려 하나님의 뜻을 온몸에 담아내는 우직한 삶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