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호] 행간(行間)이 없는 사람
[93호] 행간(行間)이 없는 사람
  • 주필 이창연 장로
  • 승인 2020.06.16 1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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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행간(行間)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1인 미디어의 시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국립묘지에 가보시라. 묘지 한 켠에 서있는 이인호 소령의 묘비명에 ‘얼마나 조국을 사랑했기에 청춘도 정든 임도 버리고 그대 몸은 부셔져 가루가 되고 피는 흘러 이슬이 되었거니 그대 흘린 피! 이 땅 적시어 생명 되어 흐르리’라고 씌어있겠는가. 조국의 산하를 지키기 위해 산화한 영령들을 생각하면 진보니 보수니 하면서 피터지게 싸우는 꼴이 보기 싫다.

화제의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마지막 회에 조연으로 등장하는 노규태(오정세)와 홍자영(염혜란)의 연애 장면이 방영되었다. 노규태가 연상의 홍자영에게 “근데, 누나 동기 새끼들은 다 판검산데 왜 굳이 나랑 결혼을 해?” 하고 묻자 “난, 너랑 있으면 편해, 넌 사람이 행간이 없잖아”라고 홍자영이 대답한다. 노규태는 행간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뉘앙스로 “행간, 행간….”을 읊조린다. 그러자 홍자영이 단호하게 다시 확인해 준다. 우연히 <동백꽃 필 무렵>의 시청자 대열에 드라마 중반부터 합류한 필자는 주옥같은 대사에 무릎을 치며 작가의 정체에 궁금함이 생기기도 했다. 그 주옥같은 대사 중 하나가 바로 “넌 행간이 없어”이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거의 정확한 낱말과 정확한 낱말의 차이점은 실제로 엄청나다. 그 차이는 진짜 번갯불과 반딧불만큼 다르다”라고 했다. 요즘처럼 이리 재고 저리 재며 사는 세상에 노규태 같은 인물을 드라마에서라도 본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행간’이 검색어 1위를 한 것이다. 아마도 행간의 뜻을 모르는 분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때, 네이버 검색창에 행간을 치면, ‘행간(行姦):명사. 간음을 행함’이라는 뜻이 가장 먼저 떴다. 드라마에서 쓰인 행간(行間)은 ‘다른 뜻 보기’를 눌러야 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 지금은 행간을 검색하면 행간(行間)이 먼저 나오고, 그 풀이는 '1. 쓰거나 인쇄한 글의 줄과 줄 사이. 또는 행과 행 사이 2. 글에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지 아니하나 그 글을 통하여 나타내려고 하는 숨은 뜻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뜬다.

사람들이 다 노규태 같아서 행간을 읽을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세상에는 ‘행간을 읽어야만’ 보이는 진실이 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의 언행, 그리고 권력을 얻고자 하는 자들의 언행은 행간을 읽어야 거짓과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 시스템들이 누구에 의해 또는 어떤 단체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는지도 행간을 읽어야 실수가 없이 옳고 그름을 파악할 수 있다. 행간을 읽을 수 있어야 나쁜 짓을 하려는 사람들이 활개를 치지 못한다. 과거에는 훈련된 사람들이 사회현상의 행간을 읽고 이를 알려주었다면, 1인 미디어의 시대인 오늘에는 국민 모두가 행간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기 시작한 것 같다. 죄를 지은 사람은 죗값보다 더 큰 사회적 지탄을 받아야 했고, 흔히 마녀사냥이라는 것이 횡행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혹세무민(惑世誣民)에 몰두하여 사이비 교주처럼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데 급급했다. 사이비 교주를 따르는 신도들은 교주를 비판하는 일이 절대 없다. 교주는 자신들이 지켜야 할 절대선(絕對善)이기 때문에 누가 자신들의 교주를 비난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공격한다. 지금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대중의 흐름에 영합하는 것을 넘어 이 흐름을 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

며칠 전, 필자가 존경하는 대 선배님을 여러 언론사 선후배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함께 뵌 적이 있다. 해직기자 출신으로 언론사 사장, 신문협회 회장도 지내셨던 그는, “내가 50년 동안 기자생활을 했지만 요즘처럼 뭐가 옳고 그른지 헛갈린 적이 없습니다. 국민들이 이렇게 처참하게 패가 갈려서 싸운 적이 내 기억에는 없어요. 한 쪽은 지구인의 말을, 다른 한 쪽은 화성인의 말을 해요. 그런데 이제는 내 생각을 말로 못 하겠어요. 이젠 자신이 없어요”라고 말씀을 하셨다. 아마도 당신의 생각을 말하는 순간 어느 한 편으로 낙인이 찍히는 세태에 대한 염려가 크셨던 모양이다. 그 선배는 후배들을 위한 조언도 해 주셨다.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일수록 여러분이 제대로 해 주셔야 합니다. 만약에 그럴 수 없으면 일기(日記)에라도 써서 그 기록을 남겨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자식에게라도 여러분의 생각을 알려줘야 합니다.”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행간(行間)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1인 미디어의 시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창연 장로

소망교회
전 NCCK 감사
CBS방송국 전 재단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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